‘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출발점 정윤회

지난 정권 적폐의 시작…“국정농단 막을 수 있었다”

김범준 기자 | 기사입력 2018/01/12 [15:36]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출발점 정윤회

지난 정권 적폐의 시작…“국정농단 막을 수 있었다”

김범준 기자 | 입력 : 2018/01/12 [15:36]

‘원조’ ‘전통’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습성을 본다면, 최근 벌어지고 있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시작점은 어디었을까? 대체로 40여 년 전 사이비 목사였던 최태민과 영애 박근혜의 만남을 최초로 볼 것이다. 이처럼 오래된 인연인 최순실 가문과 대통령 박근혜의 인연이 박 대통령 임기 중 최초로 불거지게 된 계기는 바로 지난 2014년 말을 뜨겁게 달궜던 ‘정윤회 게이트’였을 것이다. 당시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태’로 박근혜 전 대통령을 파면케 만든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네이밍으로 퍼졌던 논란은, ‘박근혜 게이트’의 전초격과 다름없었다.

 


 

자신의 무혐의 강조하며 ‘국정농단’과 거리두는 ‘정윤회’

3년 전 폭로의 기억…문고리 3인방 사수 역할했던 정황

세월호 루머에도 얽혀…대중에 7시간 각인 중요한 역할

국정농단 게이트 출발점 지목 조국 수석…재조사 시작?

 

▲ 정윤회와 최순실이 딸 정유라의 승마를 보려 관중석에 앉아 있는 사진. <사진=한겨레>

 

[사건의 내막=김범준 기자] ‘박근혜 게이트’의 다양한 의혹들이 특검 및 검찰의 조사와 이를 통한 재판으로 인해 하나둘씩 진상이 드러나면서, 큰 줄기는 거의 다 정리되는 모양새다. 재판이 진행될수록 최순실의 각종 국정농단 행위와 이를 방조하고 오히려 키워준 박 전 대통령의 행위에 대해 국민들은 분노를 넘어 수치심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사실 이같은 ‘박근혜 게이트’의 진상은 이미 2014년 말 폭로된 적이 있었다.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퍼진 사태는 결국 권력형 의혹인 ‘게이트’자가 붙을 만 했고, 주범격 인물의 이름을 따 ‘정윤회 게이트’로 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정윤회는 물론 대통령 박근혜, 그리고 문고리 삼인방, 김기춘 전 비서실장 등 모든 연루자가 모조리 부인하면서 사태의 진상은 미궁 속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2년 후인 지난 2016년 가을부터 최순실 국정농단의 면면이 속속들이 드러나면서 당시의 폭로들은 생각보다 거대한 권력형 게이트 였다는 게 드러났다.

 

그리고 지금 당시의 사건으로 사실상 비선권력 중심에서 멀어진 정윤회에게 세간에 관심은 지속되는 중이다.

    

무죄 강조 정윤회

 

이같은 언론에 집요한 관심으로 인해 정윤회는 간간히 심경을 드러내곤 했다. 대표적으로 지난해 초 종합편성채널 <채널 A>는 정윤회를 2시간 38분 동안 전화 인터뷰해 보도한 바 있다.

 

당시 정윤회는 승마가 정유라 씨를 방황하게 만들었으며, 딸이 부모를 잘못 만난 탓에 왕따를 당했고 불행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정윤회는 “걔(정유라)가 성악 쪽에서는 좀 두각을 나타냈지. 그 때 기억이 나는데 중3 때. 성악 그만두고 운동하겠다고”라며 “원래 승마가 말이 많고, 아버지 엄마에 대해 힘들어 했는데, 왕따를 많이 당했지”라고 말했다. 그는 또 “아시안게임에 나가 금메달을 따도 본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이 정유라를 방황하게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정윤회는 “뭐가 잘못돼서 애를 저렇게 만들었는지. 너무 어린 나이에 마음 둘 데가 없어서… ”라며 자책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정윤회는 또 박근혜와 최순실과의 관계에 대한 의견도 내놨다. 그는 “여성 대통령에게 남자 참모진들이 가까이 갈 수 있는 한계가 있고, 업무 외에는 남자들이 가까이 가서 말씀드리기 불편하다”며 두둔했다. 또 그는 “대통령도 인간”이라며 “나이를 먹으면 여기저기 아프지 않겠나?”고 반문했다.

 

비서관들이 이성이기 때문에 대통령의 가까운 부분에 다가갈 수 없었고 대신 오랜 지인인 최순실이 곁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또한 정윤회는 “최순실과는 2011년부터 거의 남남으로 살았다. 만약 내가 계속 최순실과 가깝게 지냈더라면 막았을지 모른다”며 말했다.

 

최순실의 대통령 연설문 수정 의혹에 대해선 “연설문은 ‘팩트’”라면서 “전문가가 아니면 수정하기 힘들다. 정호성 전 비서관이 상당히 고지식하고 원칙주의자인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국정 농단 폭로의 배후 설계자로 정윤회가 지목되기도 한다고 하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정윤회는 “나는 고영태, 노승일, 차은택, 김종, 안종범 등 국정농단과 관련된 사람을 아무도 모른다”면서 “최순실과 2011년 별거했다가 합쳤지만 남남처럼 살아서 문제의 태블릿PC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재만 안봉근 정호성 등 ‘문고리 3인방’과의 교류 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문건 파동 사건 당시에 딱 한 번 연락했다”면서 “박근혜 대통령과도 2007년 이후부터 연락을 안 한다”고 답했다.

 

정윤회는 이른바 ‘정윤회 문건 파동’ 의혹에 대해 “박관천 전 경정이 허위 기록을 했다는 사실은 이미 판명이 났다”면서 “박지만 회장과는 개인적으로 만나 오해를 푼 적이 있다”고 말했다.

 

정윤회는 “아무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면서 “나는 아무런 죄가 없고 시골에서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인데, 지금은 대체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모르겠다”며 현재의 심경을 밝히며 자신의 무고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실제로 정윤회는 현재 강원도 횡성 땅을 매입해 목장 부지로 개간에 몰두하고 있으며 딸 정유라와는 월 2~3회 정도 전화통화를 한다고 알려져 있다.

    

▲ 지난 2015년 검찰에 출석한 정윤회의 모습 <사진=김상문 기자> 

 

그의 짙은 혐의

 

이처럼 ‘박근혜 게이트’에 대해 안타까움을 밝히면서 자신의 무고함을 강조한 정윤회는 사실 자신이 ‘국정농단’의 무고함만을 강조하기에는 과거의 개입 행적이 상당히 구체적이라는 지적이 많다. 지난 2014년 말 종합일간지 <세계일보>에서 폭로한 ‘정윤회 게이트’ 내용은 정윤회가 어떻게 국정에 개입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보도를 요약해보자면 정윤회가 청와대 내 속칭 문고리 3인방이라는 비선을 통해 국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이를 강력히 부인했고, 오히려 관련문건이 세계일보에 유포되어 불법유출경위에 대해 검찰이 조사하기 시작했다. 박근혜정부는 관련의혹들에 대한 투명한 공개보다는 내부정보들이 유출되는 점만 국기문란으로 규정하고 철저히 문제 삼아 주변의혹들을 키우는 자충수를 두게 되었다.

 

이같은 폭로를 한 세계일보의 최초보도는 지난 2014년 11월28일 청와대의 비서실 교체 인사에 대해 정윤회라는 사람이 속칭 문고리 3인방이라는 창구를 두고 정기적으로 국정에 개입하는 비선 실세란 기사를 낸다.

 

이에 청와대는 불가능한 일이라 반박했고, 문고리 3인방 및 관련자로 지목된 사람들 역시 기사 내용을 전면 부정하며 세계일보를 고소했다. 그러나 이 문건이 청와대의 공식문건임이 드러나자 청와대 및 검찰은 문건의 불법유출경위에 대해서 조사하여 박관천을 통해 세계일보로 흘러들어갔다고 결론지었다.

 

이 과정에서 최근 업무일지가 공개되어 메가톤급 파장을 주고 있는 김영한 민정수석과 더불어민주당의 국회의원으로 맹활약 중인 조응천 공직기강비서관이 물러났으며, 세계일보 조한규 사장과 기자 3명이 사직하였고, 당시 문건 유출 혐의를 받았던 최경락 경위가 자살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기 전에 정윤회가 어떤 사람이었나를 아는 게 중요하다. 최순실의 남편 이었다는 것으로 만으로 비선실세 의혹을 받기에는 논리의 비약이 심하다는 지적이 많기 때문이다.

 

정윤회는 지난 1995년 최태민의 5녀 최순실과 결혼했다가 1998년부터 15대 국회의원 박근혜 후보 입법보조원을 지냈다. 2002년 박근혜 의원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한 후에는 총재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지난 2004년 박근혜 의원이 한나라당에 복당한 후에는 공식 직함이 없이 활동했고, 2007년 한나라당 제17대 대통령후보 경선 시기 활동을 중단하고, 박근혜 당시 후보와도 연락을 끊은 것으로 정윤회 본인이 밝히고 있다. 이런 정윤회는 지난 2014년 중반 최순실과 이혼했다.

 

다만 정윤회에 대해서 지난 200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경선 때부터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 정윤회를 비롯한 최태민 일가가 직권을 남용할지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민주당 안민석 의원은 지난 2013년 열린 승마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딸 정유연(정유라)을 국가대표로 뽑히도록 하기 위해 승마협회에 압력을 넣었다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고, 이후 지난 2014년 3월 시사저널은 정윤회가 대통령의 남동생 박지만을 미행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박지만은 막상 검찰 조사에서는 미행사실을 부인했다.

 

이른바 문고리 3인방이란 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제1부속 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 3인을 가리키는 말로, 이들은 박근혜 의원의 정치 입문 시기에 정윤회에 의해 소개되었으며, 박근혜가 대통령에 오르자 비서실에서 근무하게 됐다.

 

이들은 정윤회를 ‘사수’(선배를 말하는 군대식 용어)라고 부를만큼 밀접한 관계로 알려져 있으며, 각종 국정현안에 대해 대통령과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이들 3인을 먼저 거쳐야 했다는 주장들을 빗대 문고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본래는 이춘상 비서까지 최측근 4인방이었으나, 이춘상은 2012년 대선 때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일명 정윤회 라인인 이재만 총무비서관은 청와대의 인사와 살림살이(재무)를 총괄한다. 이재만 비서관이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보니, 최근 이재만 비서관을 사칭한 인사 청탁 사건이 있었다는 보도가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개인정보유출에 관여했던 사람도 이재만 비서관 지휘 아래 있는 총무비서관실 소속의 행정관이어서 논란이 된 바 있다.

    

▲ 조국 민정수석은 ‘정윤회 문건’이 국정농단의 시초로 보고 조사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자주 피력해왔다. <사진=TV조선 뉴스 캡처>

 

세월호 7시간

 

이같은 문고리 권력의 사령탑 역할을 맡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정윤회는, 본의아니게 세월호 7시간 의혹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지난 2014년 7월18일 조선일보는 최보식 칼럼을 통해 세간에 사라진 7시간이 정윤회와 박근혜의 사생활과 연관이 있다는 루머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에 일본 산케이 신문의 가토 다쓰야 지국장은 조선일보 칼럼을 인용해 ‘행방불명... 누굴 만났는가?’라는 기사를 당 해 8월3일 게재했다. 여기서 가토 지국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7시간 동안 정윤회를 만나고 있었고, 이 사람은 박근혜가 젊은 시절부터 긴밀한 사이이다”라는 주장을 했다.

 

청와대는 이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가토 지국장을 고소한다. 여기에 대해 “대통령의 일정만 밝히면 끝나는 문제를, 왜 이렇게 복잡하게 국제 문제로 끌고 가려고 하는가?”라는 비판이 있었다. 청와대 외에도 국내의 몇 보수 시민단체들이 8월 6-7일 가토 다쓰야 지국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지난 2015년 12년17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는 이 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해당 기사가 허위 사실을 직시했다고 봤지만 면책 사유가 성립한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는 해당 사안이 공인인 박 대통령에 대한 것으로 일본인들에게 공공의 이익을 위해 알릴 가치가 있는 사안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공인에 대한 기사는 허위 사실이라고 해도 작정하고 비방의 목적을 가진 것이 증명되지 않은 이상 기본적으로 면책 사유가 되며, 기사 내용도 한일 양국 시민사회의 사회적 판단에 맡겨야지, 범죄가 성립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토가 한 행동 자체가 반드시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고 덧붙었다. 5일 뒤 검찰도 항소를 포기함으로써 무죄가 확정됐다.

 

이 재판에서 검찰은 정윤회를 소환해 사건 당일 자신은 롯데호텔도 아니고 청와대도 아니고 강북 지역에서 알고 지내던 역술가 이세민(가명)을 만나고 있었다는 진술을 받는다. 애초에 정윤회는 집에 있었다고 진술했으나, 검찰이 위치추적 자료를 보여주자, 그제서야 번복하고 이세민을 만났다고 진술한다.

 

검찰과 재판부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산케이신문의 보도가 허위라고 결론 짓는다. 하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정윤회의 행적이 아니라 대통령의 동선이라는 점에 대한 의문은 변함이 없어서, 그저 산케이 신문의 보도가 허위라는 결론을 내기 위한 조사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 재판은 비록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을 밝히지는 못했지만, 가토 지국장 고소 사건은 ‘세월호 7시간’ 이슈가 대중들에게 널리 전파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이 사건 이후 산케이신문은 완전히 반 박근혜 정부 성향으로 돌아섰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을 때 일본 언론 가운데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보도하여 일본에서도 대서특필되도록 하는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밝혀지는 진실

 

결국 이같은 정윤회가 행한 ‘국정농단’ 행위는 당시에는 모든 권력 채널을 통해 청와대가 방어할 수 있었지만, 2년 후인 2016년 말 불거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는 상황이 180도 반전되어 버렸다. 오히려 사건의 규모와 심각성이 더욱 커져버렸다.

 

정윤회가 최순실의 전 남편인 점, 내부문서 유출에 강력히 반발하던 청와대가 최순실에게 주도적으로 문서를 유출한 점, 그리고 최순실 본인이 각종 인사문제 및 대통령연설문 작성을 비롯한 각종 국가사업에 관여, 권력형 비리를 저지른 의혹들 대부분이 사실로 밝혀져 버린 것이이다. 당시 검찰 측에서 결론지은 비선실세의 실체 따위는 없다는 발언은 검찰 측이 진짜로 비선실세들에 대해 전혀 몰랐던 것보다는 어느정도 알면서도 입을 다문 꼴이 되어버렸다.

 

이후 밝혀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에서 제기된 비선의 국정개입의 문제점과 개입의 규모를 아득히 초월하면서 결국 정윤회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잔가지에 불가했음이 밝혀졌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은 해외 순방을 가있는 동안 최순실이 직접 경찰 인사에 개입하여 일을 수습시키려고 한 정황 또한 밝혀졌다.

 

결국 경찰 측은 파워게임에서 저만치 밀려나간 비선에게 인사개입이나 당하던 힘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최순실 특검도 이와 관련한 국정농단 사례를 인지하고 정윤회를 출국금지 시켰지만 별다른 조사를 하지 못하고 수사기한이 끝나버렸다.

 

다만 현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조국 민정수석의 경우, “모든 게이트의 출발점은 정윤회 문건”이라며 “당시 검찰이 이를 덮었다”고 말한 바 있어, 검찰개혁위가 이 베일을 벗기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논의할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다.

    

penf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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