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박근혜 심판한 대한민국 현대사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다”

정구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4/14 [13:17]

박정희-박근혜 심판한 대한민국 현대사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다”

정구영 칼럼니스트 | 입력 : 2018/04/14 [13:17]

고사성어 중에 “장주몽접(莊周夢蝶)”이란게 있다. “장자(莊子)” 제물론에 나온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날다가 깬 후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자신이 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꿈 같은 이야기다.

 


민주주의 파괴하며 영구집권을 꿈꾸다 죽은 박정희
아버지 닮은 박근혜…세월호 참사 당시 행동 판박이

 

▲ 지난 1978년 12월27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9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사진출처=e영상역사관> 

 

한 세기는 100년이다. 박정희 가문의 비극과 “나비의 꿈”과 뭐가 다른가? 박정희와 박근혜의 가풍은 선인(先人)의 가르침인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으로 요약 할 수 있다. “스스로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엄하게 국민에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대하라”라는 경종을 잊고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인 속담에 “세패노기주 시쇠귀농인(勢敗奴欺主 時衰鬼弄人)”이라 했다. “권력(대통령)을 잃으니 노비(측근)가 주인을 업신여기고, 시운(국정농단)이 쇠퇴하니 귀신(국민)이 사람(대통령)을 가지고 논다”는 말이다.


역사는 진실만을 말한다. 동서고금을 통해 세상을 놀라게 했던 삶 끝에 비명에 죽은 사람이 많다. 양귀비도 안녹산(安祿山)의 난에 쫓겨 파촉(巴蜀)으로 가던 도중 마외(馬嵬)란 곳에서 반란군의 손에 넘어가 뭇 사내들의 진흙 발에 짓밟혀서 사지가 찢겨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마쳤듯이, 박근혜는 국정농단으로 대통령에서 탄핵, 파면되어 자신이 판 무덤(구속)에 들어간 것과 뭐가 다른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


박정희는 1960년 5.16 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탈취했다. 1972년 10월17일 영구집권을 위한 두 번째 유신(維新) 헌법 쿠테타를 결행하여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박정희는 1964년 6.3 사태에 비상계엄령 선포한 이후 시위학생을 연행하고, 학생시위를 공권력으로 진압했다. 오직 정권 유지를 위해 독재와 장기집권을 반대하는 대학생, 종교인, 시민들이 저항하며 확산 될 조짐이 보일 때마다 긴급조치 1호로 시작해 9호까지 발동하여 정치활동, 언론 및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탄압했다. 중앙정보부를 통해 야당인사 탄압, 여권핵심부 동향 파악, 대북공작 등을 주도하며, 인권탄압을 서슴치 않았다.


박정희의 아버지는 동학혁명 중에 체포되었다가 처형되기 직전 사면되었다. 형 박상희는 1947~1948년 남조선 노동당에서 활동하며 10월 대구 폭동 당시 군위 인민보안서장으로 활동하다 경찰의 진압으로 죽었다.


박정희는 1942년 만주에 있는 신경군관학교(만주군관사관학교 제2기생)를 입학해 2년 과정을 수석으로 수료한 후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1944년 졸업하고 만주군 소위로 임관한 후 8.15해방 이전까지 주로 관동군(關東軍)에 배속돼 일본 천황에 충성하겠다는 혈서(血書)를 썼다. 그는 일제식민하에서 극우 친일파였고, 빨갱이라는 좌익 사상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다.


이승만이 공산주의를 색출하는 숙군작업에서 박정희는 특무대에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좌익에 적극 가담한 어제의 동지(후에 전부 처형되었다)들을 밀고(密告)한 댓가로 군부 실세인 김정렬 육군항공사관학교(공군사관학교의 전신)장과 백선엽 정보국장의 선처요청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사면으로 살았다.

 

박정희 정신세계


박정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사상은 군(軍)이라는 개념과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이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청와대 집무실에서 일본군 장교 복장에 점퍼차림을 한 채 가죽장화를 신고 말채찍을 들고 접견인을 맞이했을 정도였다. 딸 박근혜는 어떤가? 세월호 침몰 때도 최태민의 딸 최순실과 함께 지내며 방관한 것은 아버지를 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의 복수심은 대단했다. 이승만이 무소불위(無所不爲) 힘(力)을 휘둘렀던 경무대 행정관인 곽영주가 박정희의 좌익사상, 결혼문제 등을 이유로 소장 진급을 적극 반대했다. 하지만 김정렬의 지원으로 소장 진급 후 원한을 품고 있다가 5.16군사쿠테타를 성공한 후 혁명재판에서 경무대로 몰려온 데모대를 살상한 죄로 곽영주를 사형시켰다. 어디 이 뿐인가? 그토록 충성을 바쳤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프랑스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시켜 제거했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하고, 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긴급조치권, 국회의원 정수의 1/3에 대한 실질적 임명권, 간선제 등 막강한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6년 연임제의 제4공화국 헌법을 제정하여 통과시키고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박정희는 18년 동안 군사독재와 인권탄압에 맞선 대다수 국민과 학생, 종교 지도자민주화 인사탄압, 정작 본인이 집권 18년 동안 사상시비(思想是非)에 휘말리면서도 반공(反共)의 기치를 내세우고 경쟁자인 김대중을 납치하고, 색깔론의 공세를 집요하게 퍼붓기도 했다.


이승만 때 단절 된 “한일국교 정상화”에 따른 보상금으로 이승만은 20억 달러, 장명은 28억5천만 달러를 요구했지만,1962년 10월 20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일본 오히라 외상과의  한일 협상 일괄 타결로 8억 달러를 받고, 일제 36년 간 만행에 대한 사죄가 빠진 채 “강제 징병, 원폭 피해, 군 위안부, 우편 저축금과 유가증권, 미지급 임금, 문화재 반환, 어업 문제, 연금 외 개인 피해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데 서명했다. 이 날 국가간 서명으로 지금도 생존 위안부들이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고 있지만, 오늘까지 어떤 정부에서도 속 시원히 해결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 모두 박정희의 책임이 아닌가? 묻고 싶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북한의 남침위협 대처, 근대화와 경제적 발전, 미국의 대 아시아 정책의 변화, 오일쇼크의 충격, 국내외 정치적 현안“이라는 명분으로 국론을 분열하는 영남과 호남의 지역감정은 오늘날에도 대통령 외 선거 때마다 동서(東西)로 갈라져 있다.


박정희는 민주화 탄압의 원흉(元兇)이다.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발생된 김영삼 초산테러사건, 1972년의 김대중 납치사건,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의 암살미수, 윤보선을 지원유세 하던 장준하가 박정희를 친일파로 매도했다는 이유로 구속했고, 산행 중에 의문의 피살체로 발견되었다.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 1979년 김영삼 의원 제명, 1983년 5월 6일 단식투쟁으로 이어졌다.

 

▲ 지난 1979년 11월14일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생신제에 참석한 박근혜. <사진출처=e영상역사관>   

 

박정희 가문의 비극


박정희는 군사 쿠테타 이후 18년 장기집권과 독재와 인권탄압은 계속되었다.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는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문세광에 의해 저격으로 사망, 1979년 10월 26일 신복(神僕)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권총 1탄과 2탄으로 죽었다. 박정희는 비운의 삶을 마감할 때까지 국민들에게 희망과 좌절, 영광과 비극을 동시에 안겨주었고, 딸 박근혜도 여성 첫 대통령이 되었지만, 정치 입문 18년 만에 국정농단으로 탄핵, 파면, 구속돼 1심에서 징역 24년 벌금 180억을 선고 받았다.


김재규는 최후 진술에서 “박정희는 유신 개헌으로 민주주의는 무너졌다. 유신 체제는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다.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박정희를 저격했다”고 진술했다.


“월광재량 쇄불건곡자”(달빛이 아무리 밝아도 곡식을 말릴 수 없다“는 말이다. 박정희가 친일파, 좌익사상을 극복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군인의 길을 걷고 전역한 후 평범하게 살았다면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수불작불성재 역여불교난성기(樹不斫不成材 逆子不敎難成器)”라 했다. “나무는 다듬지 않으면 재목이 되지 않고, 자식은 가르치지 않으면 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속담처럼 박정희 가문입장에서 보면 인생무상 “새옹지마(塞翁之馬)”이고, 역사는,“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규정될 것이다.


세상에는 권력, 돈, 건강이 있다 해도, 정작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는 게 너무나 많다. 어자피 세상이란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대통령의 영화는 풀잎 위의 이슬이었고, 박정희의 18년, 박근혜의 4년 합해 22년 재임 기간은 기와에 내린 서리에 불과 했다.


공자는 수기(修己)하라 했다. 나를 닦고, 나를 깨끗이 하고, 나를 더럽히지 말라는 경종이다. 살다보면 마음은 더러워진다. 더러워진 마음이 욕(慾)이다. 마음을 비우지 못한 탓은 자신의 책임이다. 욕심은 내 마음을 장님의 눈으로 만든다. 삶의 중도에 요절하기 싫으면 분수를 지키면서 “청렴”, “정직”, “긍정”의 삶으로 유턴하라! 

 

jgy2266@hanmail.net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