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분단의 상징 이승만과 극복해야할 판문점

“해방 1주 뒤부터 갈라졌던 역사의 비극이다”

정구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4/27 [15:44]

민족분단의 상징 이승만과 극복해야할 판문점

“해방 1주 뒤부터 갈라졌던 역사의 비극이다”

정구영 칼럼니스트 | 입력 : 2018/04/27 [15:44]

조선 왕조는 태조 이성계부터 27대 순종까지 519년 만에 망했다. 1905년 11월 일본의 이토이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이완용을 매수하여 강제로 을사보호조약(乙巳條約)을 체결했고, 1910년 8월 16일 일제 데라우치 통감이 대한제국에 합병조약안을 발효했다. 8월 22일 매국노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은 합병조약으로 우리 민족은 일제의 36년 간 식민지를 받고 나라를 잃었다.


한국 대표 없이 체결했던 치욕적인 정전협정서
정쟁보다는 통합을 원하는 국민 대변 평화협정
동족상잔 비극 6·25 전쟁…실패한 이승만 정권
한 때 속일 수 있어도 한 시대를 속일 수 없어

 

▲ 4월27일 2018 남북 정상회담에서 판문점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함께 걷고 있다. <한국공동사진기자단>

 

우리 민족은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으로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다. 1주일의 기쁨이었다. 9월 2일 맥아더 사령부가 한반도 북위 38도선을 기점으로 남(南)은 미군이, 북(北)은 소련군이 진주하여 점령한다고 발표한 이후 65년 째 남과 북이 갈라져 냉전이 이어지고 있다.

 

평화협정의 시작


지난 1950년 6월25일 북한 김일성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북위 38도선을 넘어 남침했다. 인민군은 무력하기 짝이 없는 국군의 저항을 뚫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7월 3일 한강을 넘고 서울을 점령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으로 미국과 국제유엔연합군(UN)의 참전을 요구했다. 이에 맥아더 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10월26일 압록강까지 진출했다. 중국 정부가 7월 7일 참전을 결정한 이후 10월 19일 중국인민지원군의 인해전술에 다시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후퇴해야만 했다. 1951년 1월 서울을 재탈환한 후 전투는 치열하게 진행된 가운데 1953년 7월10일 휴전회담이 시작되어 급기야 7월27일 판문점에서 우리 측 대표를 제외한 채 유엔측 대표와 북한 축한 대표가 정전협정서에 서명함으로써 오늘까지 남북으로 갈라졌다.


1953년 7월 27일은 3년간의 전쟁을 종식하는 판문점에서의 11분간 유엔측 수석대표 헤리슨 장군 이하 대표 4명, 공산측 수석대표 남일(南日) 간에 영어, 중국어, 한국어의 세 가지 말로 협정문서 정본 9통, 부분 9통에 양측 대표가 정전협정서 조인식 날이다.


이날 유엔측 기자단은 약 100명, 6.25에 참전하지 않은 일본 기자도 10명이 넘었다. 한국 기자는 단 두명 최병자(崔秉字), 백주몽(白晝夢)이었고 “이승만 정부는 1953년 7월 27일 38선을 기점으로 남북을 분단을 확정하는 정전(停戰)협정 조인식에 한국을 공적으로 대표하는 한 사람도 없이 조인식이 이루어졌다.


판문점에서의 정전협정조인식 이후 한반도는 남과 북 분단 속에서 냉전이 계속되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7.4 공동성명, 김대중과 노무현 대통령과 남북 교류, 이명박과 박근혜 남북대화 단절됐다. 우리 국민은 4.27 판문점에서의 역사적인 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회담 후 선언(결정)문에서의 합의 등 평화체제 구축에 물론 전 세계의 집중되고 있다. 65년 만에 남북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2018년 4월 27일 전 세계에서 기자 3000여 명, 9개 국어(語)로 동시통역되어 실시간 중개된다.


남북정상회담을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이 환영하며 지지를 천명 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트위터에서 “북한과 전 세계에 매우 큰 진전이다. 일이 잘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라 하며 긍정적이다.


하지만, 이번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역사적인 회담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전쟁을 종식하겠다는 ”종전 선언“과 ”핵폐기“를 이끌어 내는 게 목적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통합


지난 4월20일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3차 전원회의를 통해 사실상 핵을 보유한 상태에서 그동안 6번의 “핵실험,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 중지와 풍계리의 핵실험장 폐쇄, 경제건설에 충력 치중 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핵‘을 보유한 채 비(非)핵화는 언급하지 않고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조지타운 빅터 차 조지타운 교수는 북한이 비(非)핵화를 하지 않고, “핵 보유국이 되겠다는 선언으로 봐야 한다”, “핵 진정성”은 중국 속감에 “방개비야시향적”이라 했다, 즉 “방귀를 뀌어도 향내는 난다”는 말이다.


청와대는 회담을 앞두고 의미있는 진전이라고 환영하고 있지만 핵 폐기 없는 남북정상과 북미 회담은 “꽃 한 송이가 피었다고 봄은 아니다, 한 잔의 물로 장작더미의 불을 끌 수 없다”라는 격언처럼 무조건 긍정적으로 낙관하는 것 보다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4월27일 남북정상회담에서 65년간 지속된 정전(停戰)에서 큰 틀에서 6.25 전쟁을 종식하는 종전(終戰) 선언에 기대를 걸고 있지만 김정은 노동위원장의 핵개발 중단 선언에는 수많은 함정이 숨어있다.


유엔(UN)의 대북경제 규제에 대한 제재 완화를 위한 선제적 접근법이 아닌가? 지켜봐야 한다. 이후 회담 결과에 따라 북미 수교, 남북 경제 교류, 이산가족 상봉 등“ 현안들이 차츰 논의 될 수 있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개성공단 폐쇄를 일방적으로 발표한 후에 정부는 보상을 약속했지만 입주업체가 대부분 파산되었듯이 문재인 정부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 국민은 통합을 원한다. “어불우용(魚不偶龍) 견난해호(犬難偕호)“, 즉 ”물고기는 용과 짝을 하지 않고, 개는 호랑이와 같이 살 수 없다“, 지금 정치권은 진보와 보수는 원수처럼 날을 세우고 협치는 없고 서로 공격만 하고 있는 중이지만 여론 조사에서도 국민은 긍정적인 환영이 압도적이다.


지금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전방위 유엔(UN)의 제재압박에 “사면초가(四面楚歌)“라 할 수 있다. 중국 속담에 “강룡난압지두사(强龍難壓地頭蛇)”라 했다. 즉, “힘센 용(핵 보유) 그 땅의 뱀(미국, 중국, 일본, 우방국 등)들을 진압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지금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우물 속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는 격에서 하늘이 넓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국민은 속았다. 이명박 정부 5년, 박근혜 정부 4년, 총 9년 동안의 보수 정권(자유한국당)이 철저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한 것처럼 대선 후보 때 공약(公約)한 국전운영 계획을 공약(空約)이 되지 않도록 남은 임기 중에 잘해주길 바란다.


지금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이 높은 게 독(毒)이 될 수 있다. 중국 속담에 “치모계포압아(痴母鷄抱鴨兒) 치가모양외손(痴家母養外孫)”, 즉 “멀쩡한(믿었던 측근이나 참모)가 오리 알(참여연대 측근 인사, 인사 검증 부실에 의한 김기식 낙마, 국회를 마비시킨 김경수와 민주당원 두루킹(김경원)의 댓글 의혹 등)을 품고, 멍청한 어머니(청와대, 정부부처 등)가 외손(국민들)을 두려워하며 돌봐야 한다”는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승만부터 박근혜까지 역대 대통령의 불운한 말년을 타산지석(他山之石) 삼고 전철을 밟지 않길 바란다.


대통령은 역사다. 필자는 문재인 정부에 충언하고자 한다. 우리 국민은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정전(停戰)”과 전쟁을 종식하는 “종전(終戰)”을 구분할 수 있다.”

 

▲ 이승만 전 대통령. <사진출처=wikimedia>

 

이승만과 거짓


이승만은 고종 12년 1875년 황해도 평산에서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형인 양녕대군의 이방원의 첫째 아들 이제(李提)의 16대손으로 가난한 선비의 아버지 이경선(李敬善)의 6대 독자인 외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의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1898년 고종 황제를 퇴위시키고 부패 · 무능한 정부를 비판하고 민주적 자문기관으로 중추원(中樞院)의 설치를 주장하다가 황국협회의 무고협의로 투옥되어 종신형 선고를 받았다.


젊어서 입헌민주주의를 주장하다가 조선 말 7년 감옥에 투옥 중에 1904년 민영환(閔泳煥)의 감형 주선과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건너가 일본의 한반도 침략 저지를 담은 고종의 밀서를 미국 루스벨트(Roosevelt) 대통령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대통령이 되어서도 박사로 불렸다.


이승만은 미국과 해외에서 40여 년을 보냈다. 일제강점기에는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했다. 1910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 한일합병이 되는 치욕스런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YMCA)를 조직하여 교육활동·정치활동과 독립운동을 했다. 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이승만은 일제식민지하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한 명망으로 중국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우리 민족은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기점으로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하고 임시정부를 세웠다.


이승만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회”를 조직하여 총재로 활동하면서 미국의 지지를 얻고 우익세력의 연합조직체인 남조선 대한민국 민주주의의장, 민족통일총본부 총재를 역임하는 등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5개년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정치적인 활동을 활발히 했다.


우리 국민들은 해방의 기쁨과 함께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컸고, 일본과 국교를 단절한 채 북한 김일성 공산정권하에 맞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 공로는 크다. 그러나 철저한 친미, 반공주의자로 대한민국의 건국 기초를 만들었지만 미(美)소(蘇)의 정치적 이해타산을 교묘히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구성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이 반발하자 그는 한 시대의 지도자로서 위기를 처했을 때 자신을 버리고 국민을 위해서 생명을 걸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전 방송국에서 육성을 통하여 “용감한 국군이 38선에서 북한 괴뢰군을 격퇴하고 있으니 안심하라”고 해놓고 한강다리를 폭파하여 수많은 요인과 무고한 서울시민을 세월호 침몰시 선원을 버리고 혼자만 살겠다고 선장 이준석처럼 버렸던 것이다.


이승만은 국민을 속이면서도 미군의 참전을 호소하고 유엔 16개국이 연합군으로 참전을 유도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으로 350여만 명의 희생자와 1000여만 명의 이산가족을 남기고 국토는 폐허가 되었고 이념 전쟁은 온 국민에게 상처만을 남겼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협정서에 조건으로 분단이라는 남북한을 두 동강을 만들고, 미국으로부터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지만 역사는 분단 주범, 친일파 등용, 정치탄압, 양민학살(4.3, 거창양민. 한세인 등), 반민특위, 사사오입, 3.15 부정선거, 4.19 혁명, 하야, 망명으로 공(公)보다는 실패한 대통령으로 역사는 냉정하게 평가한다.

 

jgy226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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