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산실 피렌체와 후원자 메디치

“후원으로 세계 역사 한 획 그은 전설의 가문”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4/30 [09:52]

문화예술 산실 피렌체와 후원자 메디치

“후원으로 세계 역사 한 획 그은 전설의 가문”

이일영 칼럼니스트 | 입력 : 2018/04/30 [09:52]

중세 시대의 끝없는 전쟁과 분열 속에서 유럽 인구의 삼 분의 일이 죽어간 흑사병이라는 참혹한 재난이 덮친 상실의 어둠 속에서 인류는 지혜로운 문예 부흥운동 르네상스를 통하여 극복의 역사를 열어 왔습니다. 이와 같은 인문주의 문예 운동 르네상스하면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 있는 도시 피렌체(Firenze)를 쉽게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도시와 함께 300여 년간 대를 이은 예술가 후원으로 잘 알려진 메디치가(Medici family)를 만나게 됩니다. 메디치가의 창시자이며 그 바탕인 메디치 은행의 설립자인 조반니 드 메디치(Giovanni diBicci, 1360~1429)를 시작으로 잔 가스토네 드 메디치 (Gian Gastone de' Medici, 1671~1737) 대공을 마지막으로 사실상의 혈통이 단절된 300년 메디치 가문은 곧 르네상스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상업 활동 활발해지며 성공적 사례로 떠오른 피렌체
위대한 문화 운동 르네상스 최대 후원자인 메디치가
메디치 가문의 재력…상업지역의 지리적 효과이용해
재력 중심 메디치 은행…종합적 다국적 기업체 제작

 

▲ 이탈리아 피렌체. <사진출처=PIXABAY>   

 

13세기경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의 밀라노, 베네치아, 중부의 피렌체, 시에나, 로마, 그리고 남부의 나폴리와 같은 대도시의 틈새에서 작은 도시 피렌체가 르네상스 운동의 발상지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이는 르네상스가 시작되던 13세기부터 300년에 이르는 문화 예술 후원의 역사를 써내려간 메디치(Medici) 가문의 생성과 몰락이 바로 피렌체 도시에서 이루어진 사실과 매우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역사에 담긴 거울과 같은 지혜로움을 통하여 현재의 우리를 비추어 보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화예술 중심지


먼저 도시 피렌체(Firenze)를 접하게 되면 역사적으로 바늘과 실처럼 따라붙는 플로렌스(Florence)와 토스카나(Toscana)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도시 피렌체(Firenze)의 영어 명칭이 플로렌스(Florence)입니다. 이는 고대 로마 시대에 꽃이 피는 도시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플로렌티아(Florentia)에서 진행된 이탈리아어 피오렌초(Fiorenzo)에서 피렌체가 진행되었으며 이를 영어로 플로렌스(Florence)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토스카나(Toscana)는 피렌체를 주도(수도)로 하는 지역의 주 이름입니다.


이를 역사적으로 정리하면 BC. 1500년경 미노아 문명, 미케네 문명과 함께하였던 아펜니노(Apennine)와 빌리노바(Villanovan)문화가 형성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BC. 1100년경 에트루리아(Etruria)문명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탈리아 반도의 문명을 기반으로 고대 로마가 건설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원후 59년 고대 로마의 시저(Julius Caesar)시대에 군사 병영지로 플로렌시아(Florentia)라는 도시 이름이 세워진 것입니다. 이후 774년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주역 샤를마뉴 가 정복하여 신성로마제국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 황제가 1077년 카노사의 굴욕을 당한 후 1081년 당시 토스카나 후작이 담당하여 지배하던 피렌체 지역의 귀족들과 힘을 합하여 이를 설욕하면서 피렌체공화국의 바탕이 만들어져 1115년 마침내 피렌체공화국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피렌체는 공화국 설립 귀족들의 세력 속에서 자치도시의 이점을 가진, 상업 활동이 활발해 지면서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천천히 역사 속의 중심도시로 도약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선구의 치적이라 할 수 있는 1013년 산 미니아토 교회(Basilica di San Miniato al Monte)건립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와 함께 4세기경에 건립된 피렌체의 가장 오랜 대표적 유적인 산 조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새롭게 태어난 시기이기도 합니다.


피렌체 공화국은 지리적인 여건과 자율적인 상업 활동의 정착으로 여타 도시와 달리 다양한 상업들이 번성하기 시작하면서 급속하게 인구가 늘어나고 영토가 확장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신성로마 황제를 지지하는 귀족 세력 ‘기벨리파’와 로마교황을 지지하는 서민세력 ‘구옐프’ 파의 대립이 충돌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이와 맞물려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100년간 지속하였던 이른바 백년전쟁이 1337년 시작되었습니다. 아울러 1348년 흑사병이라는 인류 최대의 재앙 전염병 재난을 맞아 9만여 명의 도시 인구가 4만5천명으로 절반에 가까운 시민들이 죽거나 도시를 떠나는 참혹한 사태를 맞게 됩니다. 이러한 흑사병 재난 속에서도 피렌체 은행권이 영국왕실에 대규모 대출을 하였을 정도로 피렌체 도시의 경제 상황은 유럽의 주요 도시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격동의 역사 속에서 인류사의 가장 위대한 문화 운동 르네상스의 최대 후원자인 메디치가의 창시자 조반니 메디치(1360∼1429)가 설립한 메디치 은행이 1397년 설립됩니다. 이는 350년 메디치가의 등장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으며 이를 기점으로 르네상스라는 인류사에 가장 아름다운 문화예술이 꽃피는 도시 피렌체에서 피어나는 배경입니다.

 

▲ 조반니 드 메디치와 부인 피카르다 부에리.

 

메디치가문 유례


300년 메디치가의 영욕의 흐름에는 레오 10세 교황(Leo X, 1475~1521)과, 클레멘스 7 세 교황(Clement VII, 1478~1534), 그리고 레오 11 세 교황(Leo XI, 1535~1605)인 3명의 교황과, 16세기 프랑스 앙리2세의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s, 1519~1589)와 프랑스 앙리 4세의 왕비인 마리 드 메디치(Marie de Medicis, 1573~1642)와 같은 2명의 왕비가 배출되었습니다. 또한, 코시모 1세(Cosimo I de' Medici, 1519~1574)의 토스카나 공국의 대공에서부터 프란체스코 1세(1541~1587)와 페르디난도 1세(1549~1609), 코시모 2세(1590~1621), 페르디난도 2세(1610~1670), 코시모 3세(1642~1723), 잔 가스토네(1723~1737)에 이르는 세습 군주로 재위하였습니다.


이렇듯 화려한 300년 역사를 가진 메디치가의 조상에 대한 기록은 놀랍게도 명확한 기록이 전해오지 않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피렌체 그리고 메디치가를 연구한 수많은 학자가 있었고 전 세계에 관련 출판물이 1만5000여 점이 출판되었지만 메디치가의 조상에 대한 기록은 구전된 전설을 바탕으로 논증이 아닌 이야기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사실적인 문헌과 기록을 바탕으로 필자가 오랫동안 헤아려온 메디치 가문의 조상은 1230년경 피렌체 도시 북부 외곽의 무겔로(Mugello)에서 살았으며 의료 또는 제약업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약업 길드에 메디치가의 조상으로 확인되는 계보의 이름이 등장하는 까닭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메디치(Medici) 가문의 명칭이 의학을 뜻하는 라틴어인 메디쿠스(Medicus)에 바탕을 두는 이탈리아어로 의사(medici)라는 사실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메디치가문의 문장에서 확인되는 원형의 공들이 옛 궁전의 의료 또는 약국을 나타내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확인되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일부 학자에 의하여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실현시킨 전설적인 신성로마 황제 샤를마뉴 시대에서 치유능력을 가진 의학적 혈통이 메디치가의 조상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모두 기록이 아닌 추상적 견해로 제시된 의견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주장이 연관성으로 나타나는 사례는 메디치가의 절정기를 이끌었던 위대한 로렌조(Lorenzo de Medici. 1449~1492) 당시 주요 파티에서 샤를마뉴 황제를 소재로 만든 곡을 연주한 사실이었습니다.


르네상스와 함께 역사적인 동행의 대명사로 떠오르는 메디치가의 이야기는 메디치 가문의 수장으로 평가받는 조반니 메디치(G,D,Medici,1360∼1429)가 1397년 설립한 메디치은행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메디치가의 예술적 후원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해석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술적 후원의 실체인 경제적 바탕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극히 단편적인 사실만 설명되고 있습니다.

 

메디치가의 재력


메디치가는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300년이 넘는 오랫동안 대를 이은 예술가 후원으로 세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메디치가의 경제적 바탕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이러한 궁금증에서 전설적인 가문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살펴보면서 그 내용을 하나씩 확인할 때마다 예나 지금이나 부자가 된다는 것은 시대의 흐름을 읽는 뛰어난 감각과 이에 적합한 전환적인 발상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메디치가의 거대한 부를 축적한 과정을 이해하려면 지금으로부터 800여 년 전 세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또한, 가장 먼저 살펴야 하는 부분은 당시 메디치가의 상업 기반이 이루어진 시대 상황과 지역의 지리적 위상을 분명하게 파악하여야 합니다. 이는 메디치가의 상업 활동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근원지와 같은 지리적 요건과 시대 상황이 맞닿아 있는 까닭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면 15~16세기 이탈리아의 지역적 특성은 로마 시대의 권력의 분열에 따른 격변을 거치면서 중세 교회 권력과 함께 쇠퇴하여 특별한 혼란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당시 현대의 영국, 스페인, 프랑스 지역들은 각각의 왕권에 의하여 지역적 통일성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이탈리아 지역은 모든 경제활동이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자치적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 자세하게 살펴보면 이탈리아 북동부 지역 에게해(Aegean Sea) 주변 도시인 베네치아, 밀라노, 제노바 등은 신성로마제국 지배 아래서 13세기 이후 도시별 자주권으로 유지하였습니다. 남부지역은 비잔티움, 노르만,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되었다가 나폴리 왕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이 자리한 중부지역은 로마 교황이 세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피렌체, 그리고 시에나와 같은 도시는 도시국가 형태로 나뉘어 있었던 것입니다. 


메디치가 등장 이전의 피렌체는 1260년까지 여러 혼란을 거듭하면서도 이와 같은 지리적 요인으로 경제발전을 지속 하였습니다. 이후 1292년 성장한 도시에 적합하게 피렌체 행정구역이 재편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피렌체의 급성장에 1298년 시에나 도시의 대표적인 은행 가문인 본시뇨리 가문이 파산하면서 은행업의 중심도시가 피렌체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1337년 백년전쟁을 일으킨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 왕(EdwardIII, 1327~1377)이 피렌체 은행에 작은 채무를 거절하였던 사건과 함께 유럽경제가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됩니다. 이는 백년전쟁이 가져온 파장 위에 1347년 발병된 흑사병이 유럽 전역을 강타한 사태가 겹친 원인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혼란 속에서 1378년 피렌체에서 일어난 양모를 빗질하는 하급 노동자 소모공(梳毛工:치옴피)의 봉기 즉 ‘치옴피의 난’ 이 결국 상류 계급층의 제압으로 무산되었지만, 봉기의 원인도 엄밀하게 흑사병으로 인한 경제적 불황이 가져온 사태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내용은 백년전쟁이 지속하고 흑사병이 더욱 극심하게 유럽을 강타하는 시점이었던 1397년 메디치가의 창시자인 조반니 메디치(1360∼1429)에 의하여 그 유명한 메디치 은행이 세워진 사실입니다. 메디치가 300년 깃발이 오른 것입니다.


이렇게 세워진 메디치가의 경제적 근원인 은행업에 대하여 당시 피렌체 금융업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기로 합니다. 은행을 뜻하는 영어의 bank는 이탈리아어의 banca 또는 ‘돈뭉치를 놓는 탁자’라는 의미를 가진 banco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당시 교회에서는 빌려주는 돈에 대하여 이자를 붙이면 고리대금업자로 간주하여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은행은 이자라는 명칭을 피하여 ‘환전수수료’라는 항목을 개발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위험에 따른 보상을 핑계로 높은 수수료를 받았습니다.


천 년 이전의 은행과 오늘의 은행이 놀랍게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렇듯 확실한 수익기반을 가진 은행이 십자군 전쟁(1096~1270)을 전후하여 지중해 교역이 활발해 지면서 혁신적인 금융활동을 시작합니다. 이는 교역과 금융 수요가 늘어나며 금화와 은화의 수송문제 때문에 환어음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 어음에 수수료(이자)가 붙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금화-은화-환어음-이자)의 교환관계는 금융의 기초를 제공하게 되었으며 이와 같은 금융의 발달과정은 교역의 융성과 함께 부자를 탄생시키는 주요한 업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 되는 일이면 당연히 참여자가 많아지는 이유는 같았습니다. 그러나 질병과 전쟁 그리고 왕조의 흥망에 따라 파산이 거듭되는 개인금융업자에서 공공금융업자로 변화를 거듭하며 세계 금융사는 역사의 한 축을 흐르고 있었습니다.

 

▲ 중세 시대의 은행. 

 

메디치 은행


메디치가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메디치 가문의 창시자인 조반니 드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 1360∼1429)와 그가 1397년 설립한 메디치 은행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조반니는 친척이었던 비에리 디 캄비오 메디치(Vieri di  Cambio MedicI,1323~1396)의 은행에서 은행 업무를 배웠습니다. 조반니의 입지전적인 성공 배경에는 친척이었던 은행가 비에리 드 메디치의 영향이 매우 컷 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반니의 멘토 비에리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기로 합니다. 


비에리는 피렌체에서 환전 관련 일을 하면서 특히 당시 대대적으로 개최되었던 국제 상업박람회인 포아르(Foire)의 전문 환전상으로 일하였습니다. 이러한 세계적인 무대에서 국제 감각을 쌓은 비에르가 피렌체에 은행을 설립한 후 교황청 거래에 모든 노력을 집중하였습니다.


이는 교황청 자금의 흐름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각 지역 세력과 성당에서 기부 및 헌금을 로마 교황청으로 보내면 교황청은 각 지역의 성당 재정 비용을 다시 보내야 하는 사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각 지역에 따라 운용되는 화폐의 기준이 달라 막대한 환전 수익이 보장되는 중요한 고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비에르 밑에서 은행 업무를 배운 조반니가 자신의 은행을 설립한 이후 교황청에 적합한 혁신적인 시스템을 개발하게 되는 근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영민하였던 조반니를 눈여겨 보았던 비에르는 조반니를 데려와 은행 업무를 차근차근 공부시키면서 촉망받는 성실한 은행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에 조반니는 1386년 상당한 귀족 출신인 피카르다 부에리(Piccarda Bueri, 1368~1433)와 결혼하게 됩니다. 당시 피카르다가 결혼 지참금으로 가져온 거금 1500플로린(florins)으로 친척 비에르와 공동으로 비에르 은행 로마 분점을 개설합니다.


이후 조반니는 로마 분점에 근무하면서 교황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교황청 재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물론 각 나라와 도시에서 오는 세력 및 성당 재정 담당자들과 쌓은 인맥이 훗날 조반니가 성공하는 바탕이 되었음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조반니는 친척 비에르가 은퇴하는 시기에 공동으로 소유하였던 로마 분점의 지분을 인수하고 이를 바탕으로 1397년 로마에 메디치 은행을 설립하였습니다. 이후 피렌체로 돌아와 본점을 설립하고 5년이 지난 1402년에는 로마, 피렌체에 이어 베네치아에도 메디치 은행 지점이 운영되었습니다.


1406년 항구도시 피사(Pisa)와 외항인 포르토 피사노(Porto Pisano)가 피렌체공화국의 지배권에 들면서 피렌체는 지중해 교역의 교두보를 확보하면서 다양한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집니다. 이에 메디치 은행은 지중해 교역의 중심은행으로 서게 되어 성장 가도를 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온 교황청이 모든 자금을 메디치 은행에 예치하면서 신용의 상징성과 막대한 자금력이 함께하는 효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당시 조반니는 새롭게 설립되는 메디치 은행을 모두 독립채산제로 운영하였습니다. 나아가 단순한 은행이 아닌 상업 회사의 성격을 가진 종합적인 다국적 기업체로 만들어 간 것입니다. 먼저 부가가치가 높은 각 분야의 사업자를 지주로 구성하여 무역과 제조 그리고 판매로 이어지는 사업체를 메디치은행이 종합적으로 운용하는 회계업무를 관장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메디치 은행의 경영방식은 대를 이어 메디치 은행의 전통적인 시스템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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