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영국, 중세시대 백년전쟁의 비밀

“왕위 계승권 얽힌 불안정한 시대의 전쟁”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6/05 [09:32]

프랑스-영국, 중세시대 백년전쟁의 비밀

“왕위 계승권 얽힌 불안정한 시대의 전쟁”

이일영 칼럼니스트 | 입력 : 2018/06/05 [09:32]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프랑스와 영국이 싸웠던 백년전쟁은 두 나라 5명의 왕이 대를 이어 벌인 전쟁입니다. 백년전쟁에 대한 해석과 이해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얽혀 있어 유럽사에서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또한, 1095년에서 1291년까지 예루살렘 성지탈환의 깃발 아래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가 연관된 200년 십자군 전쟁을 끝내고 30년 만에 다시 벌어진 전쟁이라는 점에서 당시 어려웠던 시대 상황이 짐작된다 할 것입니다.


프랑스-영국 5명의 왕이 대를 이어서 벌인 전쟁
왕위계승권으로 인해 백년전쟁의 불꽃이 점화돼
경제적 문제의 전쟁이라는 것으로 보는 게 타당
전쟁을 시작한 원인제공했던 장본인 엘레오노르

 

▲ 아키텐(Aquitaine) <사진출처=https://www.tes.com> 

 

로마 교황청이 1309년부터 1377년까지 70년간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져 있었던 ‘아비뇽의 유수’ 기간 동안 백년전쟁이 지속하였던 사실도 불안정한 시대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이러한 연속된 전쟁과 사건으로 극도로 취약해진 환경여건에서 1348년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이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인명피해가 생겨난 주요한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 현상에서 1298년 이탈리아 시에나의 대표적 은행 가문 본시뇨리의 파산과 1344년 피렌체 3대 은행 가문 바르디와 페루찌 그리고 아차이올리의 파산과 같은 유럽경제의 대표적인 기업의 파산으로 이어진 맥락이었던 것입니다.

 

백년전쟁과 유럽


이러한 백년전쟁의 역사적 배경은 전쟁이 시작된 시점의 500년 전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인류의 제2차 민족 대이동 시기에 북유럽 스칸디나비아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바이킹 세력 중에서 육상전투력까지 겸비하였던 가장 용맹한 전투세력 노르만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9세기 초부터 영국 해협을 타고 내려와 프랑스 서북부 해안을 거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야만적인 전투력을 앞세워 센강을 거슬러 파리까지 수차례 점거하는 매우 위협적인 세력이었습니다. 당시 서프랑크 왕이었던 샤를 3세는 이들의 수장이었던 롤로(Rollo,846~930)와 기독교의 개종과 다른 바이킹들의 침략을 막는 조건으로 타협하게 됩니다, 옛날 프랑크족이 갈리아 북부지방을 지배하면서 새로운 개척지라는 뜻을 가진 네우스트리아(Neustria)지역에 정착하면서 노르만족(Normans)에서 유래된 노르망디 공작의 작위가 내려져 이후 노르망디 영주로 부르게 되었던 때가 911년입니다.


이후 프랑스 전역에 흩어져 있던 노르만인들을 규합하여 강력한 세력을 이루어 노르망 공국이라는 세력으로 계속 세습을 이어갔습니다. 그 후손 중에 사생아로 태어나 플랑드르의 보드앵 5세(Baldwin V) 백작의 딸 마틸다(Mathilda Flandre, 1031~1083)와 결혼하였던 정복자 윌리엄 1세 왕(William I, 1028~1087)으로 불린 인물이 영국 정복을 이루어 노르만 왕조(1066∼1154)를 역사에 기록한 것입니다. 이는 엄밀하게 덴마크 왕조의 창시자인 전설적인 전사 크누트 대왕(Kanut Wielki, 995~1035)이 오랫동안 싸워 1016년 영국을 정복한 이후 세상을 떠나 그의 후손이 잠시 지배하게 되었던 극도로 국력이 취약하였던 영국을 정복한 것입니다.


영국을 정복한 정복자 윌리엄 1세 왕이 세상을 떠난 이후 장남 로베르(Robert Curthose, 1051~1134)는 노르망디 공국을 지배하였으며 둘째 윌리엄 2세(William II Rufus,1056~1100)가 영국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프랑스와 영국이 노르만 왕조의 분할 상속으로 지배되던 중 영국 왕 윌리엄 2세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동생 헨리 1세(Henry I, 1068~1135)가 후계를 이어 프랑스와 영국을 다시 통합하였습니다. 이러한 영국의 지배는 핸리 3세 왕 시기에 계속된 실정으로 영국 귀족의 저항에 부딪히면서 1259년 프랑스 왕 루이 9세( Louis IX, 1214~1270)가 영국을 통치하게 됩니다. 이후 루이 9세 왕이 십자군 참전 중에 사망하면서 함께 십자군에 동행하였던 아들 필리프 3세 왕(Philip III, 1245~1285)이 뒤를 이었으며 다시 그의 아들 필리프 4세 왕(Philip IV. 1268~1314)이 후계를 이어서 필리프 4세 왕과 이베리아 반도의 ‘나바로 왕국’의 딸 후아나 1세(Joan I, 1273~1305)가 결혼하였습니다.


‘후아나 1세’는 1273년 태어나 1년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이들이 없었기에 태어나면서 나바로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이에 어머니의 섭정으로 성장하여 프랑스 필리프 4세 왕과 결혼하여 루이 10세 왕 (Louis X, 1289~1316)과 필리프 5세 왕(Philip V, 1292~1352)그리고 샤를 4세 왕(CharlesIV, 1294~1328) 이렇게 세 아들과 외동딸 이사벨라(Isabellam, 1295~1358)를 낳았습니다. 이들 세 형제는 공교롭게도 차례로 형의 왕권을 이어받았습니다. 외동딸 이사벨라는 영국의 에드워드 2세 왕(Edward Ⅱ,1284~1327)과 결혼하여 아들 에드워드 3세 왕(Edward III,1312~1377)을 낳은 어머니입니다. 프랑스와 영국이 벌인 백년전쟁의 영국 주인공들이 이사벨라의 아들입니다.


이러한 이사벨라의 막내 오빠 샤를 4세 왕은 어머니 ‘후아나 1세’가 ‘나바로 왕국’의 유일한 딸이었기에 그 상속으로 나바로 왕국의 왕을 겸하였습니다. 샤를 4세 왕은 3번의 결혼을 하여 두 아들과 4명의 딸을 낳았지만 모두 어린 나이에 죽었고 셋째 부인 ‘잔 데브뢰’(Jeanne d''Evreux, 1310년~1371년)사이에서 낳은 유일한 딸 블랑쉬(Blanche(1328~1382)는 그가 세상을 떠난 두 달 후에 태어났습니다. ‘샤를 4세 왕’이 세상을 떠난 후 태어난 유일한 후계인 그는 당시 프랑스는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시대에 만들어진 살리카 법전(Salic Law)을 따라 여성의 왕권 승계가 블가능 하였습니다. 이에 숙부인 샤를 발루아 백작(Charles, Count of Valois, 1270~1325)의 아들 필리프 6 세 왕(Philip VI 1293~1350)으로 왕권이 계승 되었습니다. 백년전쟁의 불꽃이 점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침내 영국의 에드워드 3세 왕은 당시 프랑스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가졌던 프랑스 령의 양모 산업의 최대 생산지 플랑드르에 양모 수출을 금지하는 선전포고와 다름이 없는 조치를 강행하였습니다. 이에 프랑스의 필리프 6세 왕은 당시 영국왕실의 주요한 수익원이었던 와인의 최대 생산지 아키텐(Aquitaine)과 가스코뉴(Gascogne)지역이 프랑스 영토와 다름없었지만 영국이 지배하고 있었던 사실에 이 지역의 프랑스령임을 선포하는 맞불을 놓아 결국 1337년 백년전쟁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 엘레오노르(Eleanor of Aquitaine)와 며느리 이사벨라(sabella) (라드공드교회 벽화) 13세기 프레스코화 출처: <사진출처=https://britishheritage.com>

 

왕위계승의 특성


백년전쟁의 발생에 대한 원인은 표면적으로는 프랑스 왕위의 계승과 연관된 갈등으로 파악되고 있지만, 그 실체는 경제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전쟁이 개시된 1337년 당시 프랑스와 영국의 경제 상황은 두 나라 모두 최악의 상태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백년전쟁을 해체해가면 먼저 와인의 최대 생산지 기옌(Guyenne) 과 보르도를 품은 프랑스 남서부 지역의 아키텐(Aquitaine)과 양모 산업의 중심지 플랑드르 이야기를 필수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오늘은 이러한 아키텐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합니다.


아키텐은 프랑스에서 공작령의 영토로는 제일 넓은 프랑스 삼분의 1에 면적을 가진 매우 부유한 땅으로 이에 얽힌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존재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관계들이 얽혀들어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으로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와인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보르도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아키텐은 남쪽 에스파냐와 근접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스파냐 북서부에서 프랑스 브르타뉴반도 서쪽 끝에 이르는 암석으로 이루어진 리아스식 해안 비스케이만(Bay of Biscay)은 천연적인 해안 요새의 지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아가 동쪽으로는 가론 강이 흐르는  옛 서고트족의 중심지 툴루즈(Toulouse)와 비옥한 평야 지대가 열린 미디피레네주가 있으며 북쪽으로는 바다에서 아키텐 분지를 잇는 교통의 요지 푸아티에(Poitiers) 도시가 있는 광활한 땅입니다.


이러한 지형조건을 가진 아키텐은 고대 로마 시대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곳을 정복하여 피레네 산맥과 가론 강 사이의 갈리아를 이르는 원주민을 뜻하였던 아퀴타니아(Aquitania)에서 유래되었던 지명입니다. 이와 같은 아키텐 원주민의 특성을 잘 나타낸 이야기가 있습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복 이후에 대체로 쉽게 로마화 되었던 다른 영토와는 달리 이곳 원주민들의 강인한 기질로 쉽게 동화되지 않는 고민에 여러 정책을 시도하였지만, 어떤 해결책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기후조건이 매우 적합한 사실을 살펴 포도나무를 심어 환경변화를 추구하였습니다. 포도가 열리게 되면서 다량의 양조가 가능해지고 일상적인 음주문화가 생겨나면서 생활 습관이 변화되었습니다, 이에 엄격한 규율과 통제가 필요하게 되는 법의 적용이 이루어지면서 지배기능이 강화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양조기술이 발달하게 되어 오늘날의 보르도 와인으로 전해온 사실을 통하여 술이 가져다주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다 할 것입니다. 


아키텐의 역사는 막강한 로마 제국의 세력이 약화하면서 서고트족이 들어와 지배하였습니다. 이후 507년 프랑크 왕국의 초대왕 클로비스(Clovis)가 정복하여 프랑크 왕국의 아키텐 국이 되어 카리베르트 2세(Charibert II)가 지배하였습니다. 아키텐은 한때 프랑크족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하여 에스파냐(스페인) 영역의 이슬람교도 사라센과 연합하여 강력한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였습니다.


이후 700년경 아키텐은 공작령 아키텐 공국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프랑스 남서쪽과 이베리아 반도 에스파냐(스페인) 북쪽을 가르는 피레네 산맥 양쪽 지대에서 활동하였던 바스크족(Basques)에게 프랑크족 아키텐 수장들이 연이어 살해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강력한 진압전쟁을 통하여 프랑스령 피레네 바스크족은 점령되었지만 에스파냐 산악지역의 바스크족은 끝내 정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778년 당시 프랑크족의 전설적인 ‘샤를마뉴’ 통치시기에 에스파냐(스페인)를 침략하고 돌아가던 중에 후위 부대가 모두 살해되는 뼈아픈 전설의 상대가 바로 바스크족이었습니다. 무훈 서사시 ‘롤랑의 노래’ 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이후 전설의 ‘샤를마뉴’도 에스파냐를 향한 여러 차례의 공격에는 자신은 출전하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이곳 원주민들의 강력한 기질은 프랑크 제국의 분할에 따라 서프랑크 지배영역으로 존재한 아키텐이 아키텐 공국으로 준 독립 상태를 끝까지 유지한 사실에서 잘 나타나 있다 할 것입니다.


이러한 아키텐 공국이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백년전쟁의 주요한 원인으로 등장한 배경을 살펴보면 아키텐의 여공작 엘레오노르(Eleanor of Aquitaine,1122~1204)를 만나게 됩니다. 엘레오노르는 중세 유럽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남긴 전설적인 여인입니다. 두 번의 결혼을 통하여 프랑스와 영국의 왕비를 지냈으며 두 나라를 지배하는 왕의 어머니이기도 하였습니다.

 

▲ 좌로부터 프랑스 루이 7세왕 엘레오노르왕비, 영국 헨리 2세 왕.

 

반란의 배경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이 시작된 원인을 분명 하게 제공한 장본인 엘레오노르(Eleonore Aquitaine,1122~1204)는 아버지 아키텐 공작‘ 기욤 10세’(GuillaumeX,1099~1137)와 어머니 ‘에노르 샤틀르로’(AenorChatellerault, 1103~1130)사이에서 1122년 태어났습니다.


바로 아래 여동생은 태어나 1년 후에 세상을 떠났으며 세 살 아래 여동생 엘리스 페트누이(Aelis Petronille, 1125~1151) 와 자매이었습니다. 


아버지 기욤 10세는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었습니다. 이에 딸 엘레오노르에게 공작 작위와 광활한 영토를 물려주게 되어 주군 세력이며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었던 프랑스 루이 6세 왕에게 후견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하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키텐 공작 엘레오노르는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 속에 최고의 교육을 받은 유럽 제일의 재원이었습니다. 최고의 스승들로 구성된 가정교사를 두어 라틴어를 배웠으며 수학과 천문학 그리고 역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였습니다. 그녀는 할아버지 때부터 문학적인 소양이 깊었던 집안의 내력으로 음악과 문학을 사랑하였으며 예술가들의 후원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활달한 성격과 강한 자존심으로 당시 유럽 제일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였던 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엘레오노르의 후견인 프랑스 루이 6세 왕(Louis Ⅵ, 1081~1137)은 아들 루이 7세(Louis VII,1120~1180)와 결혼을 추진하여 이를 성사시켰습니다. 1137년 7월 25일 '보르도 생 앙드레 대성당(Cathedrale Saint-Andre de Bordeaux)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돌아오던 엘레오노르 부부는 루이 6세 왕의 죽음을 통보받게 됩니다, 이에 남편 루이 7세가 왕권을 승계하였기에 결혼식을 마치고 오는 길 프랑스 왕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엘레오노르와 루이 6세 왕은 마리(Marie de Champagne,1145~1198) 와 알릭스(Alix, 1151~1197) 두 딸을 낳았습니다, 둘째 딸 알릭스를 낳은 결혼 14년 동안 후사를 이을 아들이 태어나지 않아 이에 대한 불화가 이혼하게 되었다는 것이 당시 표면적인 이유이었지만 또 다르게 제기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 당시 루이 7세 왕이 다른 여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개적으로 결혼을 추진하였던 내용이 왕비의 분노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다음은 엘레오노르에게는 레몽(Raymond of Poitiers, 1115년~1149) 이라는 삼촌이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삼촌과 친하였던 엘레오노르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삼촌과 자주 접촉하여 많은 대화를 하게 되었고 이에 삼촌과의 이상한 소문이 생겨나면서 루이 6세 왕이 이에 대한 뒷조사를 시작하였던 이유가 합의 이혼이라는 과정으로 발전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두 딸의 양육은 루이 6세 왕이 맡기로 합의한 이혼이 이루어진 1152년 3월 이후 겨우 두 달이 지나던 1152년 5월 엘레오노르(1122~1204)는 11살 연하인 당시 19세의 노르망디 공작 헨리 2세(Henry II,1133~1189)와 재혼하였습니다. 이후 1154년 10월 헨리가 영국의 왕위에 오르면서 2년 만에 프랑스 왕비에서 영국의 왕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엘레오노르가 헨리 2세와 결혼 당시 헨리 2세는 노르망디 공작이었습니다.


노르망디공국의 상위 주군 프랑스 왕의 부인이 이혼 이후 바로 노르망디 공작과 결혼한다는 사실은 당시 시대 상황으로서는 엄청난 파장을 예고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도 파격적인 결혼을 감행한 엘레오노르의 당당한 의식이 느껴지지만, 당시 노르망디 공국이 가졌던 열악한 경제적 입장에서 엘레오노르의 지참금인 아키텐이라는 거대한 영토와 막강한 자산이 충격과 파장을 넘어서는 의미가 작용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탄탄한 경제적 지원을 바탕으로 결혼 이후 1953년 헨리 2세가 영국을 제압하여 왕위를 계승한 사실은 이를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혼 관계가 치열한 갈등으로 나타나 엘레오노르의 남편 영국의 헨리 2세 왕과 전남편 프랑스의 루이 7세 왕이 격돌하게 되었고 헨리 2세 왕의 승리로 프랑스 영토 서부지역 상당 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아키텐이라는 거대한 지역의 특산물인 와인과 농축산물들이 격동의 영국을 지탱하는 상당한 힘이 되었을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엘레오노르와 영국 왕 헨리 2세는 7명의 자식을 낳아 성장하면서 상속과 지배에 따른 문제에서 아버지와 자식과의 갈등이 생겨났고 마침내 큰아들 헨리 영(Henry Young, 1155~1183)이 1173년 반란을 도모하면서 어머니가 이를 지원하였습니다. 이러한 반란이 진압되면서 엘레오노르는 헨리 2세 왕의 지시로 성에 감금당하여 훗날 1189년 셋째아들 리처드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16년 동안 감금상태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 대하여 많은 연대기 작가들이 자식과 왕비의 반란에 초점을 두어 비난을 퍼부었지만 이러한 반란의 배경은 많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 헨리 2세 왕이 11살이나 연상이었던 엘레오노르를 멀리하고 젊은 여인과의 결혼을 추구하면서 생겨난 갈등이 원인이었습니다. 당시 주교단과 교황에게 결혼의 허락을 요청하는 왕과 이를 반대하는 왕비의 주장이 충돌하면서 왕비 엘레오노르는 첫 남편 프랑스 루이 7세 왕의 이혼에 이은 남편의 행동에 깊은 분노와 함께 장성한 자식들을 향한 강한 모성이 작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시 헨리 2세 왕은 큰아들 ‘헨리 영’에게 왕위를 계승하여 주었고 자식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었지만, 지배 권력은 본인이 장악한 상태로 자식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머니를 멀리하는 아버지의 행동에 반감을 품은 자식과 이러한 자식들을 지원한 어머니가 합세한 반란이었던 것입니다.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 엘레오노르는 감금 신세가 되었으며 이후 1181년 둘째 리처드가 지배하였던 어머니의 땅 아키텐을 두고 큰아들 헨리와의 형제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서 1183년 큰아들 헨리가 세상을 떠났고 연이어 3년 후 셋째 아들 제프리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의 땅 아키텐에서 성장하여 어머니로부터 아키텐을 물려받아 유난히 강한 모성을 가졌던 둘째 리처드에게 또 전쟁이 찾아왔습니다.

 

아키텐 중요성


남은 형제인 막내 존이 아버지의 든든한 후원 속에 아키텐을 앗아가려는 형제간의 전투는 아키텐이라는 실체적인 중요성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감금 상태인 엘레오노르의 마지막 힘을 앗아버리려는 헨리 2세 왕의 매정한 심경을 파악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아키텐 제후의 부족과 병사들은 아키텐의 주인 엘레오노르의 아들 리처드를 위하여 온 힘을 다하여 싸웠습니다. 이에 막내 존이 형 리처드를 지원하는 세력으로 마음을 바꾸어 아버지 헨리 2세 왕을 공격하여 오랜 부자간의 전쟁은 아들 리처드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훗날 기록은 그렇게 믿었던 아들 존이 자신을 배신하였다는 충격에 쓰러져 1189년 아들 리처드에게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전하였습니다.


엘레오노르(1122~1204)는 온갖 영화와 아픔을 안고 감금 16년 만에 남편의 죽음을 맞아 구금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엘레오노르는 1199년 아들 리처드 1세가 세상을 떠나 막내 존이 왕위를 계승하여 통치하던 1204년 세상을 떠나 남편 헨리 2세 왕과 아들 리처드 1세 왕이 묻힌 폰트 블라우드 수도원 (Fontevraud Abbey)에 함께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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