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텐 ‘엘레오노르 여왕’이 이은 문화 후원의 역사

“아키텐 공국이 낳은 위대한 문학 업적”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6/09 [11:11]

아키텐 ‘엘레오노르 여왕’이 이은 문화 후원의 역사

“아키텐 공국이 낳은 위대한 문학 업적”

이일영 칼럼니스트 | 입력 : 2018/06/09 [11:11]

전설적인 여인 엘레오노르(Eleonore Aquitaine,1122~1204)의 삶에서 빠트릴 수 없는 부분은 문학과 음악의 사랑과 후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고귀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훌륭한 스승을 통하여 인문에서 예술에 이르는 폭넓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나아가 남부 프랑스에서 발달한 의식적이며 세련된 궁전문화에서 체득된 예술의 소양이 뛰어나 당대의 문학가와 음악가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선구적인 여인의 지평을 열었던 엘레오노르 여왕
‘프로방스’와 ‘아키텐’서 발전한 ‘트루바두루’문화
최초의 음유시인이라는 상징성이 컷던 ‘기욤 9세’
시인들은 물론 여러 음유시인과 교류하며 후원해

 

▲ 중세 시대 음유시인 트루바두르(Troubadour) <사진출처=http://www.paulthetroubadour.com>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 중세 유럽의 격동하는 시대에 태어나 최고 권력의 중심을 횡단한 그녀의 삶 자체가 문학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그녀는 8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남동생이 세상을 떠나 죽음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을 경험하였습니다. 이렇듯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마저 세상을 떠난 바로 그해에 자신의 선택이 아닌 프랑스 왕 루이 7세와의 결혼을 통하여 버림받은 여인의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에 타의로 이루어진 사랑의 좌절을 딛고 11살 연하의 사랑을 스스로 찾아가는 선구적인 여인의 지평을 열었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남편을 영국의 왕으로 만들어내는 집념을 통하여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의지를 보인 것입니다.

 

공주 엘레오노르


그녀는 이러한 과정에서 물을 가르는 칼날과 같은 권력의 회오리를 거치며 다시 버려진 여인이 되었던 기구한 삶도 그녀의 몫이었습니다. 결국 반란을 도모한 아들을 지원한 이유로 남편에 의하여 16년간이라는 길고 긴 세월을 높고 깊은 성에 갇혀 단절의 세상을 살아야 했습니다. 빛과 어둠 속에서 뒤척이는 바람과 같은 삶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야 비로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부유한 왕국의 공주로 태어나 두 나라의 왕비를 경험하였으며 나아가 왕위를 계승한 아들의 어머니의 삶도 살았습니다. 그 어떠한 비애의 시(詩)에 견주어도, 그 어떤 소설보다도 더욱 소설 같은 그녀의 삶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나라의 작가들에 의하여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시의 감성이 되어 우리의 곁을 맴돌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그녀의 문학적이며 예술적인 소양은 집안 대대로 이어온 가문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유럽 문학과 프랑스 문학의 근원이 되었던 음유시인 트루바두르(Troubadour)의 시작이 엘레오노르의 할아버지인 기욤 9세(Guillaume Ⅸ, 1071~1126)로부터 기록이 전해지며 가문 대대로 시인이거나 후원자의 역할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중세유럽의 궁중 행사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였던 트루바두루(Troubadour)는 남프랑스 항구도시 마르세유를 거점으로 하는 프로방스 지방에서 발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프로방스 지방은 남부 프랑스의 동부지역이며 트루바두르의 최초 작가로 기록이 전해지는 기욤 9세의 지역은 남부 프랑스 서쪽 지역의 아키텐 국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좀 더 엄밀하게 살펴보면 프로방스라는 지역의 역사적 맥락이 고대 로마인들이 BC, 8세기경 알프스를 넘어 가장 먼저 정착한 지방으로 문화적 융성의 기원이 오랜 지방입니다. 이후 BC 600년경에 그리스 식민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정착한 마살리아(Massalia)가 오늘날 마르세유입니다. 이는 로마인의 속주를 나타내는 프로빈키아 로마나(Provincia Romana)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나아가 ‘프로방스’와 ‘아키텐’에서 발전한 ‘트루바두루’가 이곳 지역의 접경도시인 ‘이베리아 반도’의 ‘에스파냐(스페인)’를 통하여 전해온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프로방스(Provencal)라는 제한된 지역의 표현도 엄밀하게 훗날 이탈리아에서 나온 명칭이라는 점입니다. 11세기에서 13세기에 이르는 중세 기간에는 프로방스라는 제한된 지역이 아닌 프랑스 남부 지역을 뜻하는 오시타니아(Occitania)가 프로빈키아 로마나(Provincia Romana)와 아키텐(Aquitaine)지역을 아우르는 명칭이었던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프랑스 중세 문학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하여 당시 언어의 발전과 나아가 프랑스어의 형성과정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프랑스 남부지역을 통칭하는 오시타니아의 언어를 오크어(Lenga d'oc)라고 하며 북부지역의 언어를 오일어(langues d'oil)라 합니다. 오크어는 중세 유럽의 구어를 운문으로 작성하는 음유시인들의 언어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하여 프랑스의 언어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살펴봅니다. 프랑스는 BC.1000년경 켈트족이 정착하였습니다. 켈트족은 고유한 언어 켈트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후 BC, 120년경 로마인들이 프랑스 남쪽 지역을 속주로 지배하면서 4세기까지 사용한 로마 라틴어에서 현지 언어로 동화한 갈로어와 로망어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후 민족 대이동으로 게르만족이 들어오면서 게르만어가 섞이게 되어 다양한 방언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방언은 북부지역의 랑그 도일어(langue d'oil)와, 남부지역의 랑그 도크어(langue d'oc)로 구분되며 오늘날 파리지역(Lutece)의 인근을 말하는 ‘일 드 프랑스’ 지역의 북부 오일어에 바탕을 둔 방언이 ‘프랑시엥(francien)’이 된 것입니다. 결국 이 지역이 프랑스의 중심적인 발전을 이루면서 프랑스어의 바탕이 된 것입니다. 이는 남부지역의 오크어가 라틴어에 바탕을 둔 구어 운문체이지만 오일어는 구어에서 프랑시엥(francien)으로 발전하면서 문장체가 이루어져 고대 프랑스어가 정립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현대 프랑스어로 발전한 내용입니다.


이러한 맥락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프랑크왕국의 최초의 왕 클로비스(Clovis)가 프랑크왕국 시대를 열면서 자신들의 언어인 게르만어를 사용하면서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게르만어는 문자가 없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모든 고대의 문헌이 유일하게 라틴어로 되어있는 이유가 중요한 부분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프랑크 왕국의 전설적인 수장 ‘샤를마뉴’(Charlemagne,742~814)가 이와 같은 소중한 문화적 자료인 라틴어 문헌에 대한 연구에 지대한 후원을 통하여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역사에 기록한 의미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842년 2월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카를 2세’와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 ‘루트비히 2세’가 맺은 동맹의 서약서인 이른바 ‘스트라스부르 서약’ 서가 오늘날에도 그 사본이 전해지는데 서약서가 라틴어로 작성되면서 서약서의 서약 부분이 당시 로망어로 작성된 것으로 이를 프랑스어의 최초 문헌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카페 왕조(987∼1328)시대에 와서 파리지역을 바탕으로 교회와 수도원과 깊은 관계를 맺어 프랑스의 중심지역으로 발전하게 된 내용과 분명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집중된 인구와 생활 거점에서 사용한 언어가 결국 표준어가 되는 이유인 것입니다.
 

▲ 기욤 9세의 작품 ‘Farai un vers pos mi’ <사진출처=https://www.youtube.com/watch?v=KhlCtF7JJ6Q>


역사로 걸어온 아키텐


‘엘레오노르’의 문학과 음악에 대한 깊은 관심과 후원은 그녀의 할아버지인 ‘기욤 9세’(Guillaume Ⅸ, 1071~1126)가 프랑스 문학의 선구적인 음유시인 트루바두르(Troubadour)의 시조라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음유시인(트루바두르)은 당시 로망스어(오크어)를 사용하여 서정시를 짓거나 노래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연대기가 분명하지 않지만, 프랑스 초기 음유시인(트루바두르) 역사에서 주요한 인물로 부분적인 기록이 확인되는 ‘쎄르까몽’(Cercamon~1145)이 기욤 9세의 후원 아래 활동하였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명확한 출생도 확인되지 않지만 ‘쎄르까몽’의 작품인 ‘나는 고귀한 사랑을 기뻐할 것입니다. (Per fin'Amor m'esjauzira)’에서부터 여러 작품이 오늘까지 전해져오는 사실에서 시와 음악이 가지는 힘을 절감한다 할 것입니다.


프랑스 문학사에서 기욤 9세의 중요성은 단순하게 최초의 음유시인이라는 상징성이 아닌 라틴어에 능숙하였으며 문법과 수사학을 공부한 높은 학식을 가진 인물로 고대의 역사에 담긴 시인들의 깊은 인식을 통한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고대 켈트족들이 남긴 비련의 트리스탄(Tristan)과 이졸데(Isolde)의 감성이 그의 작품에 분명하게 담겨 있는 까닭입니다. 나아가 프랑크 왕국이 로마제국을 정복하였던 시기에 아키텐 영을 지배하였던 푸아티에(Poitiers)의 주교이며 시인이었던 ‘발랑스 포루투나’(Venance Fortunat, 530~607)의 라틴어 시에 나타나는 맥락까지도 분명하게 헤아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아키텐 국의 수준 높은 위상을 의미한다 할 것입니다. 푸아티에의 주교이며 시인이었던 ‘발랑스 포루투나’는 깊은 영감과 믿음으로 시와 음악에 출중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 라틴교회의 음악 발전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가 만들어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는 찬미가 ‘임금님 깃발’(Vexilla Regis)은 569년 동로마 제국(비잔틴 국) ‘유스틴 황제’(Justin, 527~565))가 프랑크족의 공주 출신의 성녀 ‘라데군다’(Radegunda, 518~587)의 요청으로 실제 십자가 일부를 모시면서 부른 노래입니다. 이러한 라틴어 시인 ‘발랑스 포루투나’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이해와 인식을 가졌던 기욤 9세가 프랑스 최초 음유시인으로 기록되는 배경입니다.


또한 훗날 학자들에 의하여 ‘트루바두르’의 시조이지만 가장 현대적인 시인’이라는 평가가 이루어진 사실 또한 그의 오랜 역사를 헤아린 의식의 감성과 절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작품으로 전해진 사랑에서 정치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의 11편의 작품은 비애에서 풍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기법을 담고 있습니다.


로망스어(오크어)로 시대변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의 문학 역사에서 최초 작품으로 기록되는 작품은 ‘아쟁의 셩녀 포이의 노래’(La Chanson de sainte Foy d'Agen)입니다. 이 작품은 바르셀로나 백작 ‘베렝게르 라몬 1세’(Ramon Berenguer I, 1023~1076)시기에 쓰인 작자 미상의 시입니다. 프랑스 아키텐 주(레지옹Region)에 있는 로트에가론(Lot-et-Garonne)의 수도 아쟁(Agen)에서 순교한 성녀 ‘포이’(sainte Foy)또는 피데스(Fides)로 알려진 성녀의 이야기입니다.


로마 제국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45년~312년)의 전우이며 카이사르로 봉직하던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250~310)가 황제에게 요청하여 역사상 가장 잔혹한 그리스도 박해가 있었을 때 아쟁에서 순교한 13살 성녀 ‘포이’(Foy,290~303)의 거룩한 믿음을 노래한 작품인 것입니다. 이 작품은 오크어에서 발전된 카탈루냐어의 흔적이 많아 여러 논쟁 속에서 오크어의 가장 오랜 작품이라는 사실과 함께 초기 카탈루냐어 작품이라는 사실을 스페인 출신 학자 ‘마르티 리쿼 모리아’(Marti de Riquer i Morera(1914~2013)와 오크 어와 카탈루냐어에 정통한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언어, 역사학자이며 문학가인 ‘로버트 라퐁’(Robert Lafont, 1923~2009)이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프랑스 문학의 선구적 음유시인(트루바두르-Troubadour)의 언어적 경향의초기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카탈루냐(Catalonia)와 연관된 내용들이 많습니다. 이는 지형적으로 이베리아 반도 북동쪽 끝머리인 카탈루냐가 프랑스 마르세유와 아키텐 지역의 교류가 많았던 사실에서 언어적 합류가 이루어진 과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역사적으로 프랑크왕국이 이슬람교도의 강력한 저지선으로 선택한 바르셀로나 백작령으로 카탈루냐가 존재한 사실에서 프랑크왕국의 동일한 세력인 아키텐과의 다양한 접촉이 있었을 것입니다. 카탈루냐어는 9세기 중세라틴어를 바탕으로 로망어(오크어)의 영향을 흡수하여 독자적인 언어를 매우 빠르게 정립한 언어입니다.


이는 지형적으로 지중해의 해상무역을 통한 활발한 상업 활동이 가능하였으며 이슬람교도의 접촉으로 직조와 같은 전문 기술 산업이 빠르게 발달한 지역의 힘이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일찍부터 예술적인 전통이 강하였으며 훗날 스페인의 근대화 과정에서도 가장 민주적인 도시로 부상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살바도르 달리’와 ‘파블로 피카소’와 같은 현대미술의 거장과 세계적인 음악가 ‘파블로 카살스’가 카탈루냐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 ‘엘레오노르’와 딸 ‘마리’

 

음유시인 후원


프랑스 최초의 음유시인(troubadour)으로 활동하며 이들을 후원하였던 아키텐 국의 공작 기욤 9세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기욤 10세(Guillaume X, 1090~1137)’가 뒤를 이어 아키텐 국을 물려받았습니다.


‘기욤 10세’는 본인이 작품을 남긴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아버지와 함께 활동하였던 시인들은 물론 여러 음유시인과 교류하며 이들을 후원하였습니다. 이들은 ‘조프렐 루델(Jaufre Rudel, 1110~1170)’과‘ ‘쎄르까몽(Cercamon~1145)’ 그리고 ‘베르나르드 방타두르(Bernard Ventadour, 1125~1195)’와 마르카브뤼(Marcabru, 1130~1150)와 같은 그 시대에 대표적인 음유시인들입니다.


‘조프렐 루델’은 ‘5월의 해가 길어지는 때(Lanquan li jorn)’ 그리고『짧은 생애(La vida breve)』와 같은 프랑스 문학사에 소중한 작품을 남긴 음유시인으로 독일 문학의 선구자인 발터폰데르 포겔바이데(Walther von der Vogelweide, 1170~1230)에 영향력을 주었던 음유시인입니다.


‘쎄르까몽’은 ‘기욤 9세’ 공작이 1137년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에서 ‘나는 깊은 슬픔으로 애도의 노래를 시작한다. (Lo plaing comens iradamen)’라는 뜻을 가진 플란(Planh-추도시)을 지어 ‘주님, 그를 천상에서 지켜주십시오. 그의 삶은 매우 고귀하였습니다. 영광스러운 신이여, 나는 항의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 갔기에,,,’ 라며 노래하였습니다. ‘베르나르드 방타두르’는 빵 굽는 집 아들로 태어나 프랑스 북부지역의 트루베르(trouvere)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마르카브뤼’는 은유를 통한 기교의 작풍인 트로바르 클루(Trobar clus)의 창시자로 알려진 음유시인으로 그의 ‘신의 이름으로 평화를(Planctus Pax! in nomini Domini)’ 이라는 작품은 기욤 10세의 장례식에 추도시로 전해지는 작품입니다.


이렇듯 아키텐 공국의 가문에 의하여 이루어진 중세 유럽 음유시인의 역사는 ‘기욤 10세’의 딸 ‘엘레오노르’에 이르러 더욱 활발한 후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엘레오노르’도 직접을 시를 지어 전하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엘레오노르’가 처음 결혼하여 이혼하였던 프랑스 ‘루이 7세 왕(Louis VII, 1120~1180)’ 사이에서 낳은 두 딸 중에 큰딸 ‘마리(Marie of France, 1145~1198)’에 의하여 아키텐 가문의 문학적인 유전자가 분명하게 전해진 것입니다.  


1152년 3월 ‘마리’와 ‘알릭스’ 두 딸의 양육은 루이 7세 왕이 맡기로 합의한 이혼이 이루어진 두 달이 지나던 1152년 5월 ‘엘레오노르’는 재혼을 하였던 것입니다. 딸 ‘마리’는 1164년 ‘헨리 1세 샴페인 백작과(Henry I, Count of Champagne, 1127~1181)’ 결혼하였습니다. 딸 ‘마리’는 외 증조할아버지에서부터 전해져온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피가 흐르는 매우 감성적인 여성이었습니다.


7살에 어머니와 헤어져 어린 여동생과 함께 계모의 슬하에서 자라면서 가질 수 있었던 감성들이 그녀의 시에는 다양한 감성으로 나타났습니다. 서정적인 시와 함께 이솝우화와 같은 풍자와 해학적인 시도 존재합니다. 그녀의 작품인 ‘성인 페트릭의 지옥(Saint Patrick Purgatory)‘이라는 시는 옛날 아일랜드의 사도이며 성인이었던 트리치우스(라틴명-Patricius)가 열여섯 나이의 노예로 아일랜드에 끌려와서 갈리아로 도망하여 수도사의 길을 걸어 431년 다시 아일랜드에 와서 주교가 되었던 전설적인 성인의 이야기를 우화적으로 구성한 시입니다.


‘엘레오노르’의 딸 ‘마리’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라틴어를 공부하여 스스로 도서관을 가졌을 만큼 인문에서 문학과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식을 쌓아 예술가 후원에 많은 업적을 쌓았습니다. 아서왕 이야기로 프랑스어의 선구적인 시를 썼던 크레티앵 드 트루아(Chretien de Troyes, 1135~1190)와 같은 작가들을 후원하여 문학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긴 것입니다.


나아가 궁전에 사제로 있던 ‘안드레아스 카펠라누스(Andreas Capellanus)’ 를 후원하여 중세 유럽에 사랑에 대한 토론의 장을 만들었던 사랑의 철학서 ‘사랑에 대하여(Tractatus de Amore)’를 집필하게 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아키텐이 지배하던 푸아티에 궁에서 어머니 ‘엘레오노르’와 함께 ‘푸아티에 사랑의 법정(The Court of Love)’으로 전해진 당시 모호한 관계의 사랑이 빚어내는 문제에 대하여 그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법정을 주재한 사실은 놀라운 일이라 할 것입니다.


백년전쟁의 원인을 낳은 아키텐 공국의 딸 ‘엘레오노르’ 가 낳은 딸 샴페인 백작 부인 ‘마리(Marie of France,1145~1198)’에 의하여 아키텐 가문이 뿌려온 프랑스 문학의 선구적 씨앗이 고운 잎을 틔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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