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뜨겁게 달군 김대중-김정일 ‘남북정상회담’

반세기 만의 만남, 꽃 피은 ‘평화통일의 꿈’

김범준 기자 | 기사입력 2018/06/12 [09:19]

2000년 6월 뜨겁게 달군 김대중-김정일 ‘남북정상회담’

반세기 만의 만남, 꽃 피은 ‘평화통일의 꿈’

김범준 기자 | 입력 : 2018/06/12 [09:19]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는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나 행해졌던 ‘남북 대결 구도’를 강화하면서, 한반도 위기를 넘어 동북아시아 긴장 상황을 유지시켰다. 민주당 정부인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이 반세기의 갈등 분위기를 완화시키고, 남북평화무드를 이어갔지만, 이를 망가뜨리는 것은 한순간이었던 것이다. 다만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서 최악의 관계로 치닫던 ‘남북 관계’를 1년 여 만에 되돌리는 기염을 토했다. 결국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 이은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에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는, 지난 2000년 6월1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의 첫 발을 뗐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 6월, 김대중-김정일 간 ‘남북정상회담 18주년’의 해가 됐다. 


노태우 정부부터 이어졌던 정상회담 노력…김영삼도 실패
김대중 정부들어 시작된 햇볕정책…북한과 해빙무드 커져
2000년 6월13일부터 시작된 정상회담…분단이후 첫 만남
6·15 남북공동선언 채택…통일 대한 양측의 열망 확인 돼

 

▲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웃으며 다가서는 모습. <사진2000정상회담공동취재단>

 

남북정상회담이 최초로 제안된 것은 지난 1988년이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을 통해서 김일성과 김정일을 20여 차례 만나 남북정상회담에 합의했다는 주장이 있다. 8월15일 노태우 대통령의 정상회담 제안에 김일성이 용의가 있다고 회답한 것이다.

 

정상회담 노력


하지만 성사 직전 결렬되고 말았다. 결렬된 배경에 대해서는 노태우 정부 입장에서 군부와 보수세력의 저항이 너무 클 것같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을 생각하고 포기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노태우 본인은 육성회고록에서 북한과 중국의 여건이 덜 조성되었다고 판단했고, 북한이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섣부르게 요구한다는 인상을 받으면서 정상회담으로 인한 실익을 거두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2011년 펴낸 회고록에서는 북한이 자신을 초청했으나 “김일성의 초청이 돈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 박철언 당시 체육청소년부 장관의 말에 따라 초청을 거절했다고 밝혔다.


김일성의 회답으로 정상회담을 연다는 것은 일단 남북 간의 잠정적인 합의사항이 되었으나, 세부 사항 논의와 남북관계의 변동, 국내외의 정치적 문제 때문에 역사적인 회담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지연이 몇 년 간 계속됐다.


이후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열려고 했으며 구체적인 회담 일정까지 잡아두는 진전을 보기까지 이른다. 지난 1994년에 합의된 일정은 7월25일 평양에서 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회담일자가 이미 잡힌 상황에서 7월8일 김일성이 급사돌연사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이 시기 김영삼 정부의 목적은 북한에 돈을 주고, 대신에 북한군을 후진배치시킨다라는 것이었다는 설이 있다. 남북 간의 성격을 볼 때, 이것이 성사되었을지는 다소 의문으로 본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김일성 사망으로 인한 정상회담의 연기를 통보해왔다. 김일성의 사망으로 전군에 비상경계령이 내렸고 북한이 조문을 둘러 싼 한국 내 갈등이 일어났으며 이에 분위기는 일시에 사그라들어 정상회담은 없게 됐다.

 

햇볕정책 시작


소련이 붕괴하고 독일이 통일하는 등 냉전체제가 붕괴하면서 노태우 정부 이래 남북관계는 서서히 해빙무드를 빚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대중 대통령 후보 측은 이전정권과의 차별성을 위해 통일문제에 능통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내세웠다. 이는 점차 유화정책에 호의적이 된 빌 클린턴 행정부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이후 첫 정권교체로 집권에 성공한 김대중 대통령은 이전 정권과 다른 새로운 대북 접근방식을 차용한다. 바로 ‘햇볕정책’이다. 공식적인 명칭은 대북화해협력정책(Engagement Policy)으로, 김대중 정부에서 내세웠던 갈라진 남북의 화해와 교류, 협력 증대를 추구한 ‘대북 유화’를 목적으로 시도한 정책이다.


이같은 명칭은 이솝 우화 ‘북풍과 해’에서 착안, “행인의 외투를 벗게 한 것은 북풍이 아니라 햇볕이므로 우리도 북한을 몰아칠 것이 아니라 따스하게 햇볕을 쬐어서 마음을 열게 만들어야 한다”라는 것이 요점. 독일이 분단국가였던 시절 서독이 동독을 지원했던 동방정책을 많이 참조했다고 여겨진다.


다만 당시 집권여당 국민회의는 자민련과의 연합정부 등으로 당장 유화정책을 주장할 수는 없었고, 북한 역시 이 정책을 남한의 흡수통일 전략으로 간주하고 이를 경계했다. 그러나 지난 2000년 3월 베를린 선언을 하면서 순식간에 남북화해와 정상회담이 정치문제 전면에 나타나게 됐다. 그 뒤를 이은 노무현 정부에서도 이러한 기조에 따라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등의 사업을 계속하고 개성관광 등 새로운 사업도 추가로 시행한다.


이같은 햇볕정책은 대북 화해협력정책은 튼튼한 안보태세에 바탕을 두고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을 실현하여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정책적 노선이다. 이 정책은 안보와 대화라는 이중적 프로그램을 동시에 작동 포용정책하려는 것으로서, 남북관계를 특징짓는 현재의 분단 상태를 평화적으로 관리하되 평화정착을 실현하여 통일로 나아가겠다는 이중적인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려는 것이었다.


대북화해협력정책은 평화, 화해, 협력이라는 3가지 개념으로서 첫째, 과거의 긴장과 대결, 그리고 항상적 갈등 대신에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정책이었다. 북한의 정치·군사적 긴장을 해결하기 위해 채택한 방식은 이른바 ‘포괄적 접근(comprehensive approach)’이었다. 둘째, 대북 화해협력정책은 남과 북이 상호 상승적으로 강화시켜왔던 불신과 대결 대신에 화해를 정착시키려는 것이었다. 남북관계에 현실로 존재하는 ‘적성(敵性)’과 미래를 지향하는 ‘동포성’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한다는 특수성을 감안하여 엄격한 타산에 입각한 거래식 상호주의가 아니라 적성을 완화하면서 동포성을 확대시키기 위한 포괄적 상호주의를 채용했다.


셋째, 대북 화해협력정책은 50여 년간의 소모적 경쟁 대신에 남북한 상호공영의 협력을 강화하려는 정책이었다. 남북한 협력을 위해 ‘정경분리’ 원칙을 견지하였고 정치·군사적 갈등과 별개로 남북경협을 스스로 기업적 방식과 경제원리에 의해 작동되는 자율적 영역으로 간주하였다.


햇볕정책의 3대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북측의 무력 도발을 허용하지 않는다. 두 번째, 남측은 흡수 통일을 시도하지 않는다. 세 번째, 남측은 화해와 협력을 추진한다.


햇볕정책의 6대 정책기조는 ▲보다 많은 접촉·대화·협력의 추구 ▲정경분리 원칙에 입각한 경제교류의 활성화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동포의 식량난 해결 지원 ▲남북이산가족 문제의 조속한 해결 노력 ▲남북대화를 통한 상호주의적 협력과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 ▲군사적 긴장완화와 신뢰구축을 통한 군비통제의 실현 노력을 말한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총괄했던 당시 임동원 통일부 장관은 중국에게 햇볕정책을 설명하기 위해서 4개의 사자성어를 활용했는데, 햇볕정책의 기조를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선경후정(先經後政): 경제 먼저, 정치 나중에 ▲선이후난(先易後難): 쉬운 것 먼저, 어려운 것 나중에 ▲선민후관(先民後官): 민간 먼저, 관(官)은 나중에 ▲선공후득(先供後得): 주는 것 먼저, 받는 것 나중에.


간단히 말해서 북한으로의 시장경제의 확대를 통해 민간에서 시작한 협력관계를 정치적으로 발전시켜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나아가 통일을 이룩하겠다는 것이었다.

 

▲ 남북정상회담 합의문 발표 후 기뻐하는 김대중·김정일 <사진출처=e영상역사관>

 

남북정상회담


이같은 햇볕정책의 시작은 어느정도의 과시적인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세계적인 지명도를 바탕으로 미국, 중국, 일본 등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대북외교의 운신의 폭을 넓혀왔다.


이같은 그의 노력은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을 앞세워 남북 민간 교류의 물꼬를 트는 데 성공했다. 특히 1998년 6월, 83살의 정주영 회장이 500마리의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육로로 강원도의 고향까지 간 일은 당시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이 드디어 남북 간에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같은해 11월18일부터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면서 남북관계는 급진전 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해빙무드에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과의 만남을 추진했다. 애초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1998년 2월 대통령취임사에서 “북한이 원한다면 정상회담을 개최할 용의가 있다”고 표명한 이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북정상회담’과 ‘특사 교환’을 촉구했다.


이같은 ‘베를린선언’이 나온 직후 북한은 비공개적으로 다양한 경로를 통해 남한 측에 특사접촉을 제의하고 이 접촉에서 ‘남북정상회담’의 개최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전달해 왔다.


이에 김대중 대통령은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을 특사로 임명·파견하였으며, 북한에서는 송호경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특사로 나와 비공개접촉이 이루어졌다.


지난 2000년 3월17일 중국 상하이에서 1차 특사접촉이 이루어졌으며, 3월 23일 중국 베이징에서의 2차 접촉에 이어 4월 8일 3차 접촉에서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서’가 채택되고 지난 4월10일 서울과 평양에서 그 합의서가 동시에 발표되었다.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서’의 발표 이후 그 합의서에 따른 ‘남북정상회담’의 절차문제를 위한 남·북한간의 준비접촉이 판문점에서 2000년 4월22일부터 5월18일까지 5차에 걸쳐 개최되었다.


그리고 지난 2000년 4월10일  박지원 장관이 남북정상회담의 예정을 발표했다. 원래 발표된 일정은 6월12일부터 14일까지였지만, 북한 측이 준비가 덜 되었다는 이유로 하루 연기를 통보하고 남측도 이걸 받아들이면서 6월13일로 조정됐다.


지난 2000년 6월13일부터 15일까지 김대중 대통령 내외분을 비롯한 수행원 130명(공식수행원 11명, 특별수행원 24명, 일반수행원 95명), 기자단 50명이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지난 1948년 한반도가 분단된 이후로, 두 당국의 대표가 처음으로 만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6월13일 11시 45분부터 12시 12분까지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에서 상견례를 겸한 1차 정상회의를 개최하고, 민족의 화해와 협력을 도모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또한 양측 정상은 다음날인 6월14일 오후 3시부터 5시 20분까지 백화원 영빈관에서 2차 정상회의를 갖고 남북 간 화해와 통일문제, 이산가족문제, 경제·사회·문화 등 여러분야의 교류협력문제, 합의사항 이행을 위한 당국간 대화개최 등 남북관계 개선방안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했다.


그리고 두 정상은 오후 6시 5분부터 6시 50분까지 3차 정상회의를 진행하여 ‘남북공동선언문’안의 골격에 대해 합의했으며, 이후 양측 관계자간 문안을 다듬는 작업을 거쳐 11시 20분 ‘남북공동선언’에 합의했다.

 

▲ 남북 해빙의 상징이 됐던 개성공단. 현재는 가동 정지 상태다. <사진출처=KBS 뉴스 갈무리>

 

남북공동선언


이같은 남북공동선언의 합의한 양 정상은 다음날인 6월15일 평양에서 공동 선언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6·15 남북공동선언문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사이에 작성된 선언문으로서 남북이 평화통일이 되었음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중 5개 문항은 다음과 같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위의 네 개항의 합의 사항을 구체적으로 이행하기 위해 남과 북의 당국이 빠른 시일 안에 관련 부서들의 후속 대화를 규정하여 합의 내용의 조속한 이행을 약속했다.


이같은 남북공동선언은 합의안 두 번째 안에서 보듯 남측의 연합 단계와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안이 공통점이 있다며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하기로 합의했다.


남한 정부의 3단계 통일방안 중 1단계인 ‘남북연합’은 남과 북이 독립국가로서 협력기구를 제도화하는 것이 골자다. 남북연합 정상회의, 남북연합회의(국회), 남북연합 각료회의 등을 통해 교류를 넓혀 가는 단계를 말하며, 국방 및 외교권은 남북이 각각 소유하는 ‘1민족 2국가 2체제 2정부’를 뜻하는 것이다.


반면에 북조선은 ‘느슨한 연방제’를 주창하며 ‘완전한 고려연방제’달성 앞서서 잠정적으로 지역 정부에 국방과 외교권 등까지 부여하는 것으로 북한의 연방제는 ‘1민족 2체제 2정부’는 같으나 ‘1국가’를 표방하고 있다. 이 안은 남북한의 체제공존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북연합과 일정부분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은 남북한관계사의 이정표로 남을 6.15 남북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한반도 평화 조성과 햇볕정책의 결실과도 같은 이 회담은, 김 전 대통령의 생애 전반에 걸친 한국 민주화 운동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것에 영향을 미쳤다.


정상 회담 이후 남북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북한의 남한 주최 스포츠 경기 행사 참가 등 민간 교류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남북 당국간 회담이 지속됐으며, 북한은 일본, 미국과도 화해 분위기를 유지하며 국교 정상화 교섭에 나섰다.


특히 개성공단 조성은 6.15공동선언 이후 급변한 시대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좋은 예다. 정주영 회장을 중심으로 현대아산과 그 외의 여러 중소기업들로 조성된 공업단지인 개성공단은 지난 1998년 11월17일에 시작된 금강산 관광에 이어 개성공단의 추진이 2000년대에 전개되었고 2005년에 업체들의 입주가 시작됐다.


결국 김대중 정부에서 이뤄진 남북정상회담의 의의는 무엇보다 분단 반세기만에 최초의 남북정상간 만남을 통해 불신과 반목의 남북관계를 화해와 협력의 관계로 바꾸는데 큰 이정표를 남겼다는 데 있다.

 

penfre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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