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도서관 전쟁, 세기의 ‘서적 수집 경쟁’

알렉산드로스·페르가몬…“아리스토텔레스 책 찾아라”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7/01 [15:56]

기원전 도서관 전쟁, 세기의 ‘서적 수집 경쟁’

알렉산드로스·페르가몬…“아리스토텔레스 책 찾아라”

이일영 칼럼니스트 | 입력 : 2018/07/01 [15:56]

플라톤(BC 427~BC 347)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플라톤 아카데미가 플라톤의 조카 스페우시푸스(Speusippus)에게 승계되는 상황을 미리 알게 된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 아카데미를 떠날 것을 결심합니다. 여기에 여러 기록이 엇갈리지만, 당시 플라톤도 사랑하는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감지하였으며 이에 제자이었던 테오프라스토스(Theoph Rastos)에게 향후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할 것을 지시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플라톤 곁 떠난 아리스토텔레스…‘아소스’ 찍고 ‘마케도니아’로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2세의 초청으로 ‘알렉산더’ 개인교사역할
대왕 사후 광활한 영역 ‘사분오열’…‘로마’의 무서운 세력 확장
희귀문헌 빼내는 등의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도서와 문헌 수집

 

▲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2세 왕과 알렉산더 대왕 전투 모자이크작품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사진출처=https://alchetron.com / https://en.wikipedia.org>

 

BC 347년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미 승계에 대하여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플라톤의 제자 제노크라테스(Xenocrates, BC 396~BC 314)와 그리고 테오프라스토스와 동행하여 여행길에 오르게 됩니다. 목적지는 소아시아이었던 에게 해 해안의 터키 아나톨리아반도의 아타르네우스(Atarneus)왕국의 지배지역인 아소스(Assos)이었습니다.

 

알렉산더와 철학도서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실은 아타르네우스(Atarneus)의 통치자인 헤르미아스(Hermias)가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함께 공부하며 절친한 인연이 있었던 사유로 알려졌습니다. 나아가 여행 지역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 아리스토텔레스가 이곳 수도원에서 생활하였던 깊은 연고가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아소스’ 행에 동행하였던 제노크라테스는 수학자이며 철학자로 조각과 회화에 대한 선구적 비평을 하였을 만큼 여러 학문에 깊은 학자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알파벳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글자의 음절 수에 관한 오랜 연구가 있었다는 기록과 함께 정수론에 대한 깊은 헤아림이 있었던 수학에도 정통한 인물로 전해집니다,


이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아소스’ 체류에 대한 부분은 많은 논란과 이야기가 중복되어 있어 필자는 안톤 헤르만 크러스트 박사(Anton-Hermann Chroust, 1907~1982)가 1972년 독일의 ‘프란츠 슈타이너사가 간행하는 역사 저널에 발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아소스 체류(Aristotle's Sojourn in Assos)’의 내용에 긍정적인 공감을 두어 이 부분에 필자의 의견을 보태려 합니다. 박사는 노트르담 대학에서 공부한 독일계 미국 법학자로 철학에 조예가 깊은 역사가로도 잘 알려진 인물로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연구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소스를 가게 된 이유에는 플라톤 아카데미의 후계 승계 문제 이외에도 당시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2세 왕(Philip II, BC 382~BC 336)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이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아타르네우스(Atarneus) 왕국이 페르시아 제국의 혼란기에 독립하여 ‘헤르미아스’가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시기에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이후 분할된 왕국을 통일하여 지속적으로 작은 왕국들을 흡수하며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2세 왕은 당시 강력한 제국이었던 페르시아를 넘어 중앙아시아로의 진출에 대한 꿈을 가지고 전략적 거점인 아타르네우스와의 동맹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에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헤르미아스’와 함께 공부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를 요청하여 ‘아소스’에 가게 되었던 배경입니다.


필리포스 2세 왕의 전략적 협력안을 가지고 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요청을 ‘헤르미아스’ 는 흔쾌히 받아들였으며 지배국 '아소스'에 아리스토텔레스가 후진을 양성할 수 있는 철학 학교를 설립하는데 많은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이시기에 ‘헤르미아스왕’의 양녀인 피티아스(Pythias)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러나 BC 343년 페르시아 제국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Artaxerxes III)가 에게 해 연안의 나라들을 차례로 침략하여 왔습니다. 이에 응당 와야 할 마케도니아 동맹군이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그 배경은 마케도니아 일부 세력들이 아타르네우스와 페르시아가 협력하여 공격해올 수 있는 치명적인 문제를 거론하면서 마케도니아 동맹군 출정을 저지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페르시아에서 휴전을 거론하며 ‘헤르미아스’의 방문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는 마케도니아의 용병대장이었던 그리스 장군을 체포하여 사전에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마케도니아의 페르시아 침공 계획에 대하여 ‘헤르미아스’ 를 고문하려는 준비된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동맹국과의 비밀 서약에 대한 충성심과 친구 아르스토텔레스와의 우정을 앞세워 끝까지 비밀을 지켜 결국 BC 342년 죽음을 맞았습니다. 헤르미아스(Hermias)는 죽음을 맞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친구에게 전해 달라! 나는 철학의 가치를 모르는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훗날 아폴론 신전이 있는 델포이(Delphi)에 헤르미아스의 기념물을 세워 시를 바치며 뜨거운 우정을 삼킨 친구를 추모하였습니다.


당시 마케도니아는 발칸반도에 스키타이인들을 물리치고 그리스 침공의 배후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내용입니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2세 왕의 초청으로 BC 343년 마케도니아로 이주하여 필리포스 2세 왕의 아들이며 훗날 대 제국의 주인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개인교수가 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ros the Great. BC 356~BC 323) 이외에도 마케도니아 귀족의 아들로 훗날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제1대 왕이 되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Ptolemaios I, BC 367~BC 283)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이었던 안티파토루스(Antipater, BC 397~BC 319) 아들로 훗날 마케도니아 왕이 되었던 카산드로스(Cassander, BC 354~BC 297)도 함께 가르쳤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후 BC 339년 제노크라테스는 플라톤 아카데미에 돌아와 교장직 선거에서 플라톤의 조카 스페우시푸스와의 교장 선출 선거에서 가까스로 승리하여 플라톤 아카데미 교장에 취임하였습니다. 다음 해 BC 338년 마케도니아는 그리스를 정복하였고 2년 후인 BC 336년 필리포스 2세 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른 이듬해 BC 335년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 동부 아폴론 신전 부근 숲속에 아카데미 리시움(Lyceum)을 설립합니다. 당시 체육관 시설 형태로 시작된 학교의 특성으로 산책길 강의라는 페리파토스(Peripatos-소요학파)가 생겨난 배경입니다. 이때 아리스토텔레스와 제자 테오프라스토스가 BC 347년 플라톤 아카데미를 떠나면서 극비리에 소장하였던 서적과 원고들이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도서관이 설립되었습니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는 리시움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폭적인 후원과 지지로 후진 양성과 함께 수많은 연구와 저술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BC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33살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다음 해 BC 322년 아리스토텔레스가 연이어 죽음을 맞게 되면서 역사는 격랑의 태풍 속으로 빠져들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원고와 소장도서를 둘러싼 일대 격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 아테네 아카데미 앞 플라톤 동상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진출처=http://carpediem101.com / https://mediaethicsmorning.wordpress.com>

 

권력분할과 이전


20세의 나이로 왕권을 이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30세의 나이에 동북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서북부 인도에 이르기까지 대제국의 위업을 달성하였습니다. BC 323년 33세로 후계가 없는 가운데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으며 다음 해 BC 322년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도’ 62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마케도니아 권력은 광활한 통치 영역을 놓고 사분오열로 물고 뜯는 이전투구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1세기에 걸친 치열한 권력투쟁이 마무리되면서 나라마다 2세 3세로 이어진 왕권의 강화와 나라의 위상을 세우려는 다양한 노력이 시도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마케도니아 권력의 분할 과정을 통하여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매우 중요한 내용이 살펴집니다. 이는 인류사에서 가장 찬연한 역사를 자랑한 로마제국이 마케도니아의 권력분할 과정을 통한 세력의 약화가 없었다면 훗날 로마제국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요약하면 BC 390년경 쇠퇴한 로마왕국이 세노네스족(Senones)이 주축을 이룬 갈리아인과 운명의 전투를 벌였던 알리아 강 전투를 기억해야 합니다. 당시 로마의 군인들은 긴 창과 방패를 들고 헐떡이는 팔랑크스(Phalanx)로 불리는 중무장 전투병이었습니다. 이에 갈리아족의 기병과 보병이 빠른 기동성으로 취약점인 대열을 흩트리며 맞붙은 전투에서 무참하게 패배하여 로마는 지옥처럼 불타고 말았습니다. 이에 참혹한 약탈로 로마왕국 역사의 기록이 불타고 유실되어 훗날 로마제국의 빛나는 역사에서 달아나버린 치아처럼 늘 빈자리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볼 때 마케도니아의 1세기에 이르는 권력의 분할과정이 낳은 세력의 약화와 시간적 공백은 로마에는 하늘이 내린 기회이었습니다. 이렇게 기사회생한 로마가 왕정 시대를 마감하고 공화정 시대를 열면서 무서운 기세로 세력화를 시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감추어진 사자의 발톱이 자라나는 즈음 마케도니아 권력을 나눈 후계 국을 뜻하는 디아도코이(Diadokki) 세력의 2세 3세들은 지배국의 관습과 문화를 유지하면서도 그리스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경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나라마다 지배권에 있는 도시국가들을 통치의 효율성을 위하여 재정비하면서 대도시(cosmopolis)국가를 추구하였습니다. 이에 새로운 건축물이 경쟁적으로 건설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중동 그리고 서아시아에 이르는 마케도니아의 광활한 지배권의 교류가 2세기에 이르는 세월을 지나면서 그리스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을 그리스 유적과 고미술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독일의 미술 고고학자 요한 빙켈만(Johann J. Winckelmann, 1717~1768)의 그리스 예술의 평가와 분석을 바탕으로 독일의 철학자 헤겔(Hegel, G.W.F.1707~1831)이 자신의 저서 ‘미학’의 조각론을 구성하였습니다. 이러한 헤겔의 영향을 받은 독일의 정치가이며 역사가인 요한 드로이젠(Johann G. Droysen, 1808~1884)이 그리스 사람을 뜻하는 헬레네(Hellene)를 어원으로 헬레니즘(Hellenism)이라는 시대적 경향을 정의한 것입니다.


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기에서부터 변화된 문화의 흐름을 표현한 것으로 이후 각 분야에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스쳐 가는 생각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2 전제 1 결론으로 완성된 삼단논법이 사고와 존재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헤겔에 의하여 전신을 드러낸 사실 또한 역사의 바람은 언제나 일깨움이라는 것입니다.


마케도니아 후예의 나라들은 이와 같은 문화의 흐름을 혁신의 바탕으로 삼아 국가적 위상을 정립해가면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진 역사적인 학문의 정신성을 공유하는 방법을 묵시적으로 교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라는 국가에 정신성을 두어 지중해 연안의 크고 작은 도시국가들이 이를 수호하는 체제가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테네의 오랜 전통을 통하여 접해온 인재양성의 바탕인 교육에 중요성을 일깨우면서 당시 시대 상황에서 보물과 같았던 서적에 대한 소중함이 치열한 국가적 소유의 경쟁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당시 이집트를 통치하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BC 220년 대규모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세웠으며 페르가몬 왕국의 에우메네스 2세가 뒤를 이어 경쟁적으로 페르가몬 도서관을 건립하였습니다.


대왕이 세계를 정복하는 시기에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는 BC 335년 아테네에 세운 리시움에서 12년 동안 학문의 연구와 인재양성에 정진하면서 저술활동에 전념하였습니다. BC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상을 떠난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 ‘테오프라스토스’에게 학교를 맡기고 칼시(Carlis)로 이동하여 다음 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학문을 교과용 교재와 일반적 저술로 분류하여 후세에 남겼습니다.


이러한 원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학교를 떠난 이후 유언으로 그 소유권을 제자 ‘테오프라스토스(BC 381~287)’에게 남긴 것으로 필자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에 제자 ‘테오프라스토스’는 리시움 아카데미 교장으로 35년간 재직하면서 이를 관리하였습니다.


당시 ‘테오프라스토스’는 BC 315년 리시움 체육관 인근의 땅을 도서관설립을 위한 명목으로 사들인 기록이 존재하는 사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과 자신의 저술을 합하여 도서관 설립을 계획하였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세상을 떠나기 전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유언을 통하여 받았던 소장도서와 저술원고를 포함하여 자신의 원고와 도서를 스승과 자신의 제자인 스켑스(Scepsis)의 넬레우스(Neleus)에게 유언으로 증여하였습니다.


이는 BC 347년 아리스토텔레스가 제노크라테스와 ‘테오프라스토스’와 동행하여 아소스에 갔을 때 근처인 스켑시스(Skepsis)를 함께 간 사실이 있었습니다. 이는 플라톤아카데미에서 함께 공부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친구 코리스쿠스(Coriscus)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들 넬레우스(Neleus)가 리시움 학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에게 공부한 제자로 당시 리시움 학교에 교수직을 수행하며 도서를 관장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와 자신의 학문을 공부하여 일가를 이루었던 ‘넬레우스’에게 후계를 물려줄 의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학교의 주요 세력들은 당시 이집트 왕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Ⅰ세의 은밀한 후원 속에서 스트라토(Strato,BC335~269)를 후계로 선정하였습니다. 이는 스트라토가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Ⅰ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II 세(BC 367~BC 283)의 가정교사를 맡았었던 내용과 무관하지 않으며 당시 각 나라의 경쟁적인 학자의 교섭과 도서의 수집에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트라토’가 리시움 교장에 취임한 이후 넬레우스는 ‘테오프라스토스’의 유언에 따라 모든 도서와 원고를 가지고 고향 스켑스로 낙향하였습니다. 이후 1만 점의 파피루스 목록과 정리를 요청한 스승의 유언을 실현하지 못하고 ‘넬레우스’는 소장도서를 스켑스의 비밀스러운 지하 수장고에 보관하여 후손에게 물려주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이어 페르가몬 왕국에 설립된 페르가몬 도서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장 도서와 원고를 찾으려는 경쟁이 치열하였으며 페르가몬 왕국은 이를 압수하려는 수색작업이 집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지하 수장고에 은닉된 도서는 몇 세기가 지나도록 숨어있습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도서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로마제국에 의하여 그리스가 정복되었던 BC 146년 이후 기원전 마지막 세기의 역사에서 터키지역 ‘테오스’(Teos) 출신인 서적 수집가 ‘에펠레콘’(Apellicon, ?~BC 84)이 설립한 도서관이었습니다.


도서수집가 ‘에펠레콘’은 리시움 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상속받은 재력을 바탕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적 수집에서부터 시작하여 혼란의 시대에 희귀도서와 문헌 수집에 열중하여 자신의 도서관을 설립한 인물입니다.

 

▲ 아테네 전경(Athens) <사진출처=http://greeceathenstours.com>

 

로마의 문헌수집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당시 아테네의 부패한 로마 통치자와 결탁하여 도시치안 자문위원 신분을 가지고 아테네 메트론(Metroon)사원에 보관된 희귀 문헌을 빼내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서와 문헌들을 수집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가 넬레우스의 후손에게 사들인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의 서적은 수세기가 지나도록 지하 수장고에 보관 방치되어 오면서 손상이 심하여 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오류가 빚어지고 말았습니다.


‘넬레우스’ 후손이 소장된 도서 일부를 나누어 팔았던 사실 또한 훗날 알렉산드로스 도서관이 공개한 도서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연을 가진 에펠레콘 도서관의 도서들은 BC 86년 로마제국이 아테네를 정복하였을 때 장군이었던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BC 138~BC 78)에게 약탈당하여 로마로 옮겨가 이탈리아 나폴리 외곽의 포츠올리(Pozzuoli)에 도서관을 만들어 소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도서관은 격랑의 역사 속에서 사라졌고 이후 소장도서들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penfre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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