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절 70주년] 대한민국 개헌의 역사

‘투쟁’과 ‘민주주의’ 역사와 함께한 ‘개헌’

김범준 기자 | 기사입력 2018/07/17 [09:26]

[제헌절 70주년] 대한민국 개헌의 역사

‘투쟁’과 ‘민주주의’ 역사와 함께한 ‘개헌’

김범준 기자 | 입력 : 2018/07/17 [09:26]

국가라는 정치적 공동체의 존재형태와 기본적 가치질서에 관한 국민적 합의를 규정하고 있는 기본법인 헌법은 한 국가에 근간이 되는 법이다.  이같은 헌법도 시간이 지나면서 가치질서가 바뀐다면 바꿀 필요가 생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개헌’이다. 우리나라도 지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임시헌장을 만든 이후, 지속적으로 개헌을 해왔다. 다만 대다수가 국민을 위한 개헌이 아닌 ‘독재자’ 필요에 의해 잦은 헌법 개정이 이뤄졌다.


임시정부서 만든 ‘임시헌장’ 시초…토대로 ‘제헌헌법’ 제작
장기집권 욕심 이승만이 저지른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
최고의 헌법파괴자 박정희…집권위한 최악 개헌 ‘유신헌법’
전두환 정권 호헌 반대해 얻어낸 진정한 민주헌법 9차개헌

 

▲ 대한민국임시헌장부터 9차 개헌까지의 헌법에는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가 녹아들어가 있다. <사진출처=SBS 뉴스 캡처>

 

헌법은 한 국가의 구성 원리와 이념, 기본 정신, 국민의 기본권을 규정한 한 국가의 최고 법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법률을 개정하듯이 쉽게 할 수가 없다. 현재 기준 대한민국헌법의 번호가 10호인데, 이 말은 초대헌법에서부터 헌법 개정이 9차례 있었다는 뜻이다. 실질적인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은 100여 년 전인 1917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이다.

 

태초의 헌법


임시헌장은 지난 1919년 4월11일 공포됐다. 이 헌법에는 우리나라의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치 체제를 ‘민주 공화제’로 한다고 명시했다. 또한 한일합병으로 없어진 조선 황실을 우대한다고 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대한제국을 계승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시하였다. 또한 유엔의 전신인 국제연맹에 가입한다고 하였다.


이 헌장의 내용 아래쪽에는 임시 의정원 의장 이동녕,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이라고 표기했다.


이 헌장의 반포일은 ‘대한민국 원년’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은 연호를 ‘대한민국 30년’으로 기산했는데, 이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된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보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을 ‘대한민국 30년’으로 표기한 것이다.


이같은 대한민국 임시 헌장은 총10개조로 이루어진 간략한 내용이었으나, 같은 해 9월11일 통합 임시 정부를 수립하면서 개정한 임시 헌법은 총8장 58조로 내용이 크게 늘어났다.


개정한 임시 헌법에는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하고,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국'으로 하며, ‘대통령제’를 채택하여 임시 대통령이 국가를 대표하고 정무를 총괄하며 법률을 공포하도록 했다. 제3조에 대한민국의 영토는 구한국의 판도로 한다고 명시하고, 제7조에 대한민국은 구 황실을 우대한다고 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대한제국을 계승함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그 이전에 ‘헌장’이라고 하던 것을 ‘헌법’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25년 4월7일 임시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를 도입하여, 국무령과 국무원으로 구성되는 국무회의의 결정으로 행정과 사법을 총괄하도록 하였다. 이 헌법 개정문은 1925년 4월 30일에 발간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 공보 42호에 실렸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한 후 제헌헌법이 만들어지게 된다. 제헌헌법은 헌법학자이자 문학자인 유진오 교수의 초안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여담이지만 당시 유진오 교수가 직접 작성했던 초안에는 현재 ‘국민’이라고 쓰여 있는 단어들이 모두 ‘인민’으로 써 있었는데,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사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산주의적 용어라며 비판당하면서 모두 ‘국민’으로 대체되게 되었다고 한다.


제헌헌법은 의원내각제 및 양원제를 기반으로 했으나 이승만의 강력한 주장으로 대통령제·단원제가 관철됐다.


이같이 만들어진 제헌헌법은 지난 1948년 7월12일 제헌 헌법의 성안이 완성된 후 7월17일에 공포되었다. 공포일인 7월17일은 당시 정부가 수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헌 국회의 국회의장이었던 이승만이 공포했다.


제헌헌법에 특이점 중 하나는 일부상황에 대해 소급입법을 허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친일 청산 문제였다. 친일파 청산은 분명한 소급입법이었고, 정부 수립 이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제헌국회에서도 이 부분이 문제시 됐다. 일개 법률로 처리하면 소급입법에 금지되기 때문에. 그래서 제헌헌법 부칙에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서기 1945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문구를 넣었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법률이 반민족행위처벌특별법이고 이 법률에 따라 활동한 것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다. 참고로 헌법이 아닌 법률(일반법)제1호는 정부조직법이고 법률제3호가 바로 반민특별법이다. 이와별개로 제헌헌법에는 통일관련 언급이 없다는 게 논란점으로 꼽히기도 한다.

 

▲ 헌법에 서명하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 <사진=대한민국 국회>

 

발췌 및 사사오입


광복이후 제헌헌법으로 이끌어져 온 우리나라에 첫 개헌은 6.25전쟁이 한창인 지난 1952년 7월7일 날 공포된 1차 개헌안으로 소위 ‘발췌개헌’으로 불리는 것이다.


당시 부산으로 피난 가 있던 정부는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위해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하였으나 부결되었고, 국회에서는 내각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위기를 느낀 정부는 국회의원이 탄 출근버스를 견인하여 국제공산당의 지령을 받은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감금하는 등 강수를 두던 끝에 정부제출안과 국회제출안을 발췌하여 양원제, 대통령 직선제, 국회의 국무의원 불신임을 골자로 하는 개정안을 내놓기에 이른다.


이때 국회의사당은 군인과 경찰에게 포위되어 있었고, 투표는 기립 투표로 진행되어 국회의 표결권을 침해하였다. 개헌 과정 자체도 위헌이었다.


이같은 1차 개헌에 얽힌 일련의 과정을 부산정치파동이라 한다. 개헌 목적이 당시 대통령인 이승만의 연임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 그나마 발췌개헌의 의미다. 발췌개헌은 자유토론을 억압했고, 헌법의 체계정당성 무시, 기립투표식 표결, 계엄 및 위협분위기 속 강제통과, 전시 헌법개헌, 그리고 헌법 정하는 공고절차 생략 등 수많은 문제가 있는 반헌법적인 개헌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더욱 충격적인 개헌은 종전 후 얼마 안 되어서 나온다. 바로 지난 1954년 11월27일 공포된 2차 개헌안으로서 소위 ‘사사오입 개헌’고 불리는 것이다.


당시 장기집권을 위한 이승만 정부의 야욕은 끝이 없었고, 결국 3선을 위해, 당시 중임까지만 가능하던 대통령 연임 제한을 초대 대통령에 한해 제외하도록 헌법을 개정하기에 이른다.


이 때 제적의원 203명 중 2/3인 135.333...명의 찬성이 필요했으나, 찬성표가 135표가 나와 0.333...표 모자라 부결됐다. 그러나 다음날 203의 2/3은 135.333...이므로 사람은 0.333이 있을 수 없으니 개헌정족수는 136표가 아니라 사사오입하여 135표라서 가결되었다고 선포했다. 정족수 논란은 물론 부결된 안건은 동일 회기에 다시 처리하지 못한다는 원칙도 무시한 위법적인 처사였다.


법안을 살펴보면 권력 제도 측면에서 국무총리제를 폐지했고 대통령 궐위 시 부통령이 지위를 승계하도록 명문화했으며, 특별 법원(군법 회의)의 헌법적 근거를 신설하기도 했다. 즉, 전형적인 이승만과 그 부역자들을 위한 개헌이었다.
3차 개헌은 이승만 정권이 4.19 혁명으로 무너진 지난 1960년 6월15일 공포됐다. 신정권은 6월7일부터 기존의 헌법에 대한 개정을 논의하였고 6월11일 개정된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때 국회법이 개정되어 앞으로 헌법 투표때는 기명투표로 하기로 정해졌으며 6월15일 표결 결과 찬성 208표 반대 3표로 가결되었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이뤄진 개헌이라는 의미가 있다.


새로운 헌법에서는 정치체제를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 내각제로 전환하였고 민의원과 참의원의 양원 체제가 정립되었다. 자유권을 제한할 수 있도록 한 유보조항을 삭제했으며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사전허가 또는 검열제를 금지해 기본권이 강화되었다. 이승만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진보당’을 공보처장관의 처분으로 등록취소한 것을 교훈으로 삼아 정당해산의 근거조항을 헌법에 마련하여 헌법에 정해진 엄격한 절차를 통해서만 정당해산이 가능하도록 했다.


헌법재판소, 완전한 지방자치제 등 지금 현재 정치에서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는 요소들이 이때 처음으로 등장했다. 또한 대법원장 및 대법관 또한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법관의 자격이 있는 자들로 구성된 선거인단에서 선출하도록 했다. 대통령은 임기 5년에 1회 중임 가능하고, 국회 양원 합동회의에서 선출했다.


그리고 5개월 후인 11월29일에는 헌법을 부분개정시킨 4차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지난 10월10일 민주반역자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학생시위대가 국회를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이승만 정권 시절 권력에 영합하여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한 인물들을 처벌하기 위한 제도 마련이 논의되기 시작해 만들어졌다.


법의 제정을 통해 3.15 선거에서 부정행위를 저지른 자들과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하기 이전에 공직에 있으면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반민주적 행위를 하거나 재산을 축적한 자들에 대해 처벌을 내릴 수 있게 되었고, 이를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의 설치를 허가했다.


이 개헌은 개헌 당시부터 포퓰리즘적 법안 입법이 아니냐는 문제로 많은 논란을 빚었다. 무엇보다 법안을 개정하기 전에 발생한 문제를 법안 개정을 통해 처벌할 수 없도록 한 형법불소급의 원칙에 예외를 둔 것이라 더욱 더 많은 논란이 있었다.

 

▲ 박정희 종신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을 발표하는 김종필. <사진=e영상역사관>

 

헌법파괴자 박정희


이같은 이승만 체제를 청산하고 새시대를 열겠다는 의지는 박정희의 61년 5.16군사 쿠데타로 무산이 되고 군부에 의한 새로운 ‘5차 개헌’이 추진된다.


개헌 논의 시작부터 문제였던 것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가 군사혁명위원회(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를 조직하여 전국에 비상 계엄을 선포하면서, 국회도 해산시켜버린 상황에서 국회 의결 없이 바로 개헌안을 국민투표로 확정해버려 개헌 과정에 하자를 남겼기 때문이다. 헌법 전문을 개정했는데 4.19 의거의 이념을 지향한다고 하면서, 5.16 군사정변도 끼워 넣었다.


권력제도 측면에서는 대통령제와 단원제를 골자로 하며 헌법재판소를 폐지해버렸다. 국회의원이 탈당하거나 정당이 해산하면 국회의원직을 잃도록 하였는데, 이는 정당 국가화 경향을 강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박정희 군부는 7년 후인 1969년 9월14일 6차 개헌안을 공포했다. 이 개헌은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과 똑같은 목적으로서 3선으로 정권 연장을 노렸다. 이를 위해 새벽 2시에 국회 제3별관에서 기습적으로 통과시켜버렸고,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더욱 힘들도록 만들었다. 사사오입 개헌과 마찬가지로 주 목적이 정권 연장을 위한 부분개헌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헌법사상 가장 부끄러운 개헌이 지난 1972년 12월27일 공포된 7차개헌 ‘유신헌법’이다. 이 헌법은 10월17일에 전국에 비상 계엄을 선포하고한 박정희가 아무런 합법적 근거도 없이 국회를 해산하고, 국회의 권한을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로 가져와버렸다.


그리고 비상국무회의의 개정안이 계엄령하의 공포분위기 속 국민투표로 통과된다.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7.4 남북 공동선언으로 통일 분위기를 연출하며 이루어졌으며 동시에 북한에서도 72년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됐다.


기본권 측면을 보면, 자백의 증거 능력을 제한하는 규정을 삭제해버렸고 언론·출판에 대해 허가와 사전 검열제를 허용하였으며, 군인이나 군속, 경찰공무원 등은 공무 집행 중 발생한 피해를 국가에 사적 주체로서 민법상 배상 청구를 하지 못하게 했다.


통치구조에 관한 조항은 더욱 비 민주적이다.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설치해서 여기서 대통령을 간접선거하고 국회의원 3분의1을 선출하는데, 그 국회의원도 박정희가 명단을 내리면 그 명단 하나를 가지고 찬/반을 결정하는 식이었다. 헌법개정안도 여기서 확정한다. 물론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의원은 구조적으로 박정희 지지자임이 검증된 자만이 될 수 있었기에 사실상 박정희 자신이 자신을 대통령으로 뽑고 국회의원 1/3을 대통령이 임명하며 헌법개정도 자신이 최종 도장을 찍는 셈이다.


더해서 대통령이 국회 해산권도 가질 뿐만 아니라 대법원장을 비롯한 모든 법관을 대통령이 임명, 파면할 수 있도록 했다. 국가배상법 위헌판결로 찍힌 대법원은 위헌법률심판권을 빼앗겼고, 대신 헌법위원회가 설치되었으나, 제9차 개헌으로 헌법재판소가 설치될 때까지 헌법위원회가 위헌결정을 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게다가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을 부여하여, 대통령이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을 정지시킬 수 있고 정부와 법원의 권한도 맘대로 바꿀 수 있었다. 국회는 긴급조치의 해제를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을 뿐이었고, 심지어 긴급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헌법에 명시해 놓기까지 했다.


즉, 권력분립이나 기본권 보장 따위는 완전히 무시한 채 각하의 반영구적 원맨쇼만을 위해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흑역사다.

 

투쟁의 결과물


이같은 한국 헌정사 최악의 개헌인 유신헌법은 79년 10월26일 김재규의 총탄으로 끝나게 됐지만, 민주헌법에 대한 염원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깨지게 되고 그 결과물이 바로 지난 1980년 10월27일 공포된 8차 개헌 제5공화국 헌법이다.


79년 12.12 군사 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이듬해 5월17일에 전국에 비상 계엄을 확대하고 다음날 5.18 민주화운동이 유혈 진압한다. 이후 5월31일 설치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개헌안 초안을 만들어 개헌하게 된다.


이처럼 무식하게 까지 보이는 군사 쿠데타를 밀어붙였던 전두환도 최악의 헌법인 유신헌법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8차 개헌을 하면서 대통령 간선제를 제외한 대부분을 날려버린다.


살펴보면 기본권 보장 조항은 크게 회복됐다. 행복 추구권을 신설하고 형사 피고인의 무죄 추정의 원칙을 신설하였으며 연좌제를 금지함과 동시에 환경권도 신설하였다. 적정임금을 보장해야 한다는 규정이 신설됐다.


또한 권력 제도 측면에서 긴급조치권도 폐지되고 헌법 개정은 개정 ‘당시’의 대통령에게만은 효력이 없다는 규정이 신설된 점이 특기할 사항이다. 이건 앞의 개헌들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장기 집권을 위한 수단으로 헌법에 장난질을 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예 개헌을 통한 장기 집권을 못하도록 헌법 조항에 쐐기를 박아놓은 것이다. 그리고 법관의 임명권이 대법원장에게 돌아가서 사법부의 독립성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하지만 결국 전두환의 독재 야욕은 지속됐고, 전국민적 반발이 높아져 결국 지난 1987년 10월29일 9차 개헌인 제6공화국 헌법이 공포된다. 6월항쟁으로 인해 개정된 헌법으로서 일명 87년 체재라고도 불리는 ‘현행 헌법’이다. 이는 전두환의 ‘호헌 선언’을 불복한 국민들의 승리였다.


9차 개헌으로 비로소 제대로 된 민주적 헌법을 합법적 절차로 개헌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행 헌법재판소 운영에 이르기까지 사회에 큰 영향과 발전을 가져온다. 헌법 전문에서는 최초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을 명시하였고 권력 제도 측면에서 대통령의 국회 해산권이 드디어 사라졌다. 임시정부를 언급한 것은 다름아닌 한국 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준엽 선생의 각고의 노력 때문.


아울러 대통령은 임기 5년 직선제 단임이 되었으며 국회는 국정감사권을 다시 가지게 되었고 헌법재판소가 부활되었으며 법관의 임명권이 대법원장 독단으로 행해지지 못하도록 대법관 회의의 동의라는 견제 장치가 마련된다.


기본권 측면에서는 자유를 다시 폭넓게 보장하기 위해 적법절차 조항과 체포·구속 시 고지 및 가족에게 통지할 것을 명문화하고 언론·출판·집회·결사에 대한 허가 및 검열을 다시 금지하였다. 이 조항 덕분에 90년대 중반까지 존재했던 음반과 영화에 대한 사전심의가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을 받았고, 음반은 사후심의로, 영화는 등급분류로 전환됐다. 또한 복지의 측면에서도 최저임금제를 도입했다.

 

penfre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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