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의원이 남기고 간 ‘빛과 그림자’의 자취

“문화 예술의 대한 노회찬의 철학이 그립다”

강행원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8/04 [12:54]

노회찬 의원이 남기고 간 ‘빛과 그림자’의 자취

“문화 예술의 대한 노회찬의 철학이 그립다”

강행원 칼럼니스트 | 입력 : 2018/08/04 [12:54]

노회찬 의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수많은 대중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고 있다. 비록 ‘불법 정치자금’에 연루되어 안타까운 선택을 했지만, 일관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위해 살아온 그의 삶을 존중하는 국민들이 많은 것이다. 이와더불어 노회찬 의원은 그 누구보다 문화예술을 사랑한 정치인으로 기억된다. 본인의 장기가 어렸을때부터 익혀온 ‘첼로’였고, 특유의 촌철살인 발언에서도 시적 은유가 느껴지는 등 그의 문화 철학은 다른 정치인과 남달랐다. <편집자 주>


문화혼의 살아있는 지식을 갖춘 진보의 외길을 연 노회찬
문화정책에 대한 국가의 빈곤한 인식 꿰고 있었던 정치인
도덕성 무장한 정치인이 지닌 양심의 무게로 선택된 자살
소수정당에게는 불리한 정치자금법 시급한 수정이 필요해

 

▲ 노회찬 의원의 영결식이 치러진 여의도 국회의 모습. <김상문 기자>

 

현대인들은 종교적인 계율이나 도덕률에 따른 숭고함보다는 여론이라는 무명의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정치인들은 말할 것도 없이 아예 여론을 먹고 산다. 논어의 태백편에 나온 공자의 말씀은 (邦無道貧且賤焉恥也/邦有道富且貴焉恥也) 정의가 행해지는 나라에 살면서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정의가 실종된 불의가 통하는 나라에서 부자가 되고 지위가 높이 오른다면 그것은 더더욱 부끄러운 일이라는 가르침이 있다. 불의가 성하면 여론도 조작될 수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세상은 멀어지고, 사회를 지탱하는 문화혼도 의미를 잃게 된다.

 

문화혼 생각한 정치인


문화혼이란 국민적인 삶을 지탱하는 신앙적인 지계나 도덕적인 숭고한 정신이 바로 선 무형의 힘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정의와 불의 중 어디를 부정할 수 있는가. 없다면 공존하는 것이며 따라서 문화혼도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건강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경제(국력)적으로는 살만한 위치에 오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빈부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것은 문화혼이 건강하지 못한 탓이다. 그것은 예술문화에 이르기까지 흉내는 내고 있지만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 이를 잘 지적한 정치인 노회찬은 빈민, 노동자들의 권리회복을 돕기 위해 현장의 고통을 온몸으로 채득하여 얻은 문화혼의 살아있는 지식을 갖춘 진보의 외길을 연 인물이다.


그는 진보정당의 국회의원 신분으로 2008년 11월 19일 CGT(프랑스노총)에서 강연회를 갖게 된다. 그 강연을 경청한 한 유학생이 문화정책에 대한 노의원의 생각을 물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 요지가 필자에게도 오래토록 반향이 컸던 문제였기에 그 내용을 다시 돌이켜 보고자 한다.


“비행기가 한 대도 오가지 않는 공항을 수천억씩 들여서 짓고 또 짓는 이 나라가, 예술은 가난 속에서 나온다고 굳건히 믿고, 예술에는 단호히 지갑을 열지 않는다. 문제는 산업적 가치를 입증하던 하지 않던, 문화와 예술에 대해서 사회는 일정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며, 예술이 건강하게 사회에서 싹트게 하는 것은 국가의 역할이다. 국가만큼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체계는 없다. 국가는 예술의 내용에 대해서 권력을 행사하지 말아야 할 뿐, 예술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이는 우리의 문화정책에 대한 빈곤한 문제를 송곳처럼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이란’이 세계영화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갖게 된 까닭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음을 부연하고 있다. 그것은 호메이니 시절 미국과 국교를 단절하면서까지 영화수입 금지 조치를 내리고, 대신 영화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결과라는 명쾌한 답이다. 노회찬 의원은 문화의 공공성에 대해서도 노동현장 못지않게 예술계의 방향을 꿰뚫고 있는 다방면에 소양을 갖춘 지식인이었다. 잠자는 우리의 문화혼을 일깨우기 위한 정부의 과감한 지속적인 투자가 절대적이라는 뜻을 시사한 정치인의 발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의 절실성은 이명박근혜 정부를 거처 8년이 흐르는 동안 전무했으며, 박근혜 정부에선 ‘문화예술융성위원회’라는 거창한 이름만 나부낄 뿐이었다. 오히려 예술인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편협한 차등 대우를 일삼는데 그쳤다. 하지만 문화한류의 중요성은 정부도 정치인들도 입으로는 인식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문화적 가치실현을 위한 필요한 조치가 머리와 행동으로도 절실하기를 바라왔다. 필자는 며칠 전 초복 날 교회 장로친구 추천으로 기독교 실업인들 조찬강연회에 연사로 초대되어 ‘예술세계에 담긴 문화혼의 정체성’이란 주제로 강연을 했다. 거기서 노의원의 문화정책 성향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내심은 대중들까지도 관심을 유발할 수 있도록 계몽선도를 가장 잘할 수 있는 종교 실업인들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따라야 함을 의식해서였다. 호텔의 조찬을 마치고 시민들의 출근길에 뒤엉켜 돌아온 아틀리에의 평상적인 일과가 시작 되었다. 컴퓨터를 켜고 기사검색 중에 “노회찬의원 투신사망”이라는 비보를 보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필이면 그가 세계의 문화중심 파리에서 외쳤던 문화정책을 내 강연에 붙여 극찬했던 날 무슨 인연이기에 그의 활동이 여기서 멈추다니 참으로 허무했다. 무엇이 그를 죽음에 이르도록 했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 노회찬 의원이 다른 정치인과의 큰 차별점이 있었던 지점은, 대한민국 문화예술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진출처=KBS 영상 캡처>

 

엉뚱한 과녁


‘드루킹’에 얽힌 진실 게임의 초점이 엉뚱한 과녁을 뚫게 된 것은 아닌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적폐들의 소행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땅에 진보의 씨앗을 뿌린 참으로 소중한 정치인을 잃은 아픔은 더 이상 말문이 막혔다. 유서내용의 윤곽이 드러난 그의 진실하고도 청렴한 도덕성은 아직도 불의가 만연하고 있는 우리사회의 질서를 가늠케 한 제시였다. 앞에서 인용한 공자의 말씀처럼 우리사회는 불의와 타협한 졸부들과 벼슬을 탐하는 소인배들이 적지 않다. 한 인간이 사회를 지탱하게 하는 도덕성으로 무장한 노 의원이 지닌 양심의 무게, 정직한 판단의 결단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였다.


모든 미디어에 밝혀진 바, 그는 “2016년 3월 두루킹의 ‘경공모’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모두 4000만원을 받았음을 시인했다. 이는 어떠한 청탁도 대가의 약속도 없었던 후원금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후원 절차를 정상적으로 밟지 않은 것에 대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며 “(자신의 잘못이)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칠흑 같은 번민의 몇 밤을 지새웠을 고뇌, 그것은 목숨과 바꿔야 했던 자신과의 싸움에서 한 치도 용서치 않았던 도덕적인 숙고의 대의를 택한 희대의 정치인이었다.


물론 그 기저에 분연한 대의는 지금껏 변함없이 지켜왔던 법적 도덕적 양심과 신념에 대한 자존을 강타당한 모멸감이 가장 큰 아픔이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의 목숨보다 더 아꼈던 지금까지 정치적 신뢰를 쌓아온 정의당을 위한 유언이 있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는 한국정치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소망함이었다. 목숨과 바꾼 그 분연한 신념은 당원들의 가슴에 영원한 큰 울림으로 찬연할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수억을 농단하고도 뻔뻔한 자들에 비해 기껏 떡값에 지나지 않는 애매한 실수를 용납하지 않고 비보를 남긴 어처구니없는 기막힌 일이다.


특히 홍준표의 막말인 “노회찬 자살 미화되는 세상 정상 아니다.”는 비아냥거림은 마음은 상하지만 상대해줄 가치는 없다. 정치판의 바닥을 기는 낙오자의 발악일 뿐이다. 그의 야비함은 국회특수 활동비도 법적인 하자 없음을 알고 집에 생활비와 자녀 유학자금으로 썼던 비도덕적인 논란도 철면피를 두르고 좌충우돌한 뻔뻔한 자였다. 세상을 정말 빛나게 하는 것은 명예나 훈장이 아니다. 자신의 작은 실수라도 용납할 수 없는 진실된 양심이다. 어느 누가 아니 홍준표가 이 작은 실수를 목숨과 바꿀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 매사가 이빨은 까기 쉬워도 결코 행동은 쉽지 않다.


또한 특검의 칼날은 엉뚱한 진보의 과녁을 향해 시위를 당겨 어떤 요리를 만들어 시민의 식탁에 올리려 했던 것이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특검의 팩트는 ‘두루킹’이 선거에 개입한 여론몰이 댓글조작의 진상을 밝혀내는 일이다. 본질과는 다른 엉뚱한 곳에 시위를 당겨 초점을 맞추는 것 또한 고의적인 적폐가 아닐 수 없다. 굳이 노의원의 희생을 따진다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활시위에 대한 방패역할이 생을 초월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추상같은 법일지라도 그 흔적의 진실은 그림자 허상일 수도, 또는 그림자를 숨긴 그늘일 수 도 있다. 그렇더라도 그가 지닌 청렴성의 진실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음이 만인 앞에 값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또 다른 빛의 존재가 된 것이다.
 
우리사회의 ‘불의’


그 빛은 미래의 소망을 이끌 한국정치를 아니, 한국사회를 위한 모든 불의를 일소코자 살신성인의 길을 택한 것이라고 의미하고 싶다.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수 있는 그 사명은 한국정치가 정치다운 길을 가도록 노회찬을 배우라는 채찍이기도 하며, 새 길을 제시한 한국정치사의 찬연한 빛과 그림자를 선현이 남긴 자취이다. 지금 무명으로 점철된 우리사회의 불의에 대한 적폐들의 명분이 있을 리 없지만 시비는 남아있기 마련이다. 노 의원의 목숨을 앗아간 소수정당에게 불리한 정치자금법부터 당장 국회에 새로운 입법재정을 촉구한다.


특히 한국의 정치인들 모두가 도덕성과는 무관한 자들이 태반이지만 법망에는 잘 걸려들지 않았다. 하지만 노 의원은 법망을 피하지 못한 작은 실수의 도덕성을 감당하지 못하고 비보를 남긴 것이다. 노회찬의원이 버린 초개한 목숨의 한스러운 애도를 그의 소속정당에서는 정의당장을 치르기로 발표하여 장례절차를 수습 중에 있었다. 하지만 그 장례식을 굳이 국회장으로 승화하여 바뀌게 된 명분은 그가 지닌 진보의 청렴한 도덕성에 값하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가슴절인 한국정치인들이 빠짐없이 다투어 애도를 했고, 국민적인 애도물결 또한 8만에 이른 인파로 그의 영전에 줄서기로 한없이 북적였다.


필자는 노회찬을 떠나보내지 못한 발걸음들과 그 울음들 틈새를 끼어들지 못했다. 늦었지만 그가 떠난 한주일의 자취를 새기며, 그 삼오제일을 기해 천도의 예를 올린다. 노회찬 영가여! 낳고 죽음이 없는 극락국토 그 곳에서 영원히 행복하시오.


끝으로 여론을 먹고사는 분들께 묻는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야당의 비대위 행색이나, 집권당의 노장들이 올라온 대표경선 꼬락서니를 보면서 기득권 소유욕에 환멸을 느낀다. 자신들이 버리지 못한 과거의 습은 적패가 아닌가를? 만약 현역의원들이 노회찬을 배워야 한다면 살아남을 자가 몇 명이나 될까를? 이 땅의 어떤 정치기가 어떤 종교지도자가 아니 어떤 분야의 그 누가 자신의 양심을 책임질 도덕성과 목숨을 바꿀 자가 있는가를…

 

yoonsan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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