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내십니까?" 신계륜 전 의원 인터뷰

“미력한 힘이지만 한반도 통일에 보태고 싶다”

인터뷰어/김충열(정치전문 기자) | 기사입력 2018/09/12 [09:41]

"어떻게 지내십니까?" 신계륜 전 의원 인터뷰

“미력한 힘이지만 한반도 통일에 보태고 싶다”

인터뷰어/김충열(정치전문 기자) | 입력 : 2018/09/12 [09:41]

1980년 서울의 봄!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타도를 외치며 서울역으로 진군할 때 주도적 역할을 했던 신계륜(64) 전 의원은 “만약 그때 서울역 회군을 하지 않았다면 그래도 5·18광주항쟁이 발발했을까?”라고 물었다. 당시 서울역 회군을 반대했던 것이 신 전 의원에게는 통한으로 남아 있다. 일찍이 노동운동으로 잔뼈가 굵은 그는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의 중책을 맡아 활동했다. 하지만 세월호 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그리고 윤이상평화재단이사장, 대한배드민턴협회 회장을 맡는 동안 ‘독버섯처럼 자란 DJ·노무현 정부 인사들’ 중 한 사람으로 낙인 찍히고 블랙리스트에까지 올라 일명 ‘입법 로비 사건’에 걸려 정치적 꿈이 산산이 부서졌다. 브레이크뉴스는 최근 영어의 몸에서 풀려난 신계륜 전 의원과 지난 3일 (사)신정치문화원 사무실(성북구 소재)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입법 로비 사건은 박근혜 청와대 작품이며 공안정국 신호탄”
“김기춘 비서실장, DJ·노무현 정부 인사들에 대한 사정 지시”
“윤이상 음악 들을수록 매력…세계적인 음악가로 재평가되어야”
“배드민턴으로, 걷기 대행진으로 남북 평화기류 조성 힘 보탤 것”

 

-4선 의원까지 했는데 정치권에는 어떻게 입문했는가?
▲정권교체가 지상과제였다. 1992년 내가 처음 출마한 총선에서 김대중 총재의 강력한 지원과 독려가 기본적인 힘이 되었다. 그리고 허인회·이인영·김영배 등이 조직한 대학생 자원봉사 활동은 하루에 수백~수천 명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독재정권의 폭력과 금력에 맞서는 물리력이 되었고, 당시 선거자원봉사단의 모범적인 전형이 되었다.

 

▲ 신계륜 전 의원은 “내 인생 마지막까지 정치 경제적 화두는 남북관계 개선과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구축, 통일기반 조성에 미력한 힘이지만 보태는 것이다”라고 담담히 말했다.    

 

“죽을 때까지 성북 안 떠날 것”


-정치권 입문 후 업적을 소개한다면.
▲노동청년위원회를 이끌며 김대중 정부의 수평적 정권교체에 도움이 된 것을 보람으로 느끼고 있다. 또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의 비서실장 겸 후보 단일화 추진단장을 맡아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에 성공하여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일조를 했다. 하지만 그 일과 관련하여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기소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그 불운은 깊고도 넓었다.


-처음 당선된 성북구는 신 의원에게 어떤 곳인가?
▲1992년부터 나를 정치권에 입문하게 한 성북구는 뼈를 묻을 곳이라고 생각했다. 단 한 번도 철새처럼 왔다 철새처럼 가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성북은 제2의 고향이며 정치적 고향이다. 죽을 때까지 성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입법 로비 사건은 신 의원에게 불명예를 안겨줬는데, 문제가 된 ‘근로자 직업능력 개발법’은 어떤 법인가?
▲노동운동을 해온 노동 전문가로서 국회에서 환경노동위위원장의 중책을 맡아 활동했다. 직업훈련을 도맡은 직업훈련원은 공공기관과 민간이 힘을 합쳐 국제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휩쓸어 국위선양은 물론 근대화·산업화에 큰 역할을 했다.
민간 직업훈련 시설의 명칭 사용에 있어서 과거에는 ‘직업훈련’이라는 명칭을 의무적으로 넣도록 강제했다. 하지만 내가 대표 발의한 ‘근로자직업능력개발법’ 개정안은 민간직업훈련시설의 이름도 공공직업훈련시설과 같이 ‘직업훈련’이라는 명칭을 의무적으로 넣지 않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재량권을 시설 측에 준 것으로 ‘직업훈련’이 줄 수 있는 거부감을 없애고, 현대에 이르러 변화한 청소년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 법률 개정안은 2014년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위원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 국회 본회의 순서로 정상적으로 통과되어 지금 많은 민간직업훈련시설이 ‘직업훈련’이라는 딱딱한 이름을 버리고 그 시설의 특성에 맞는 새로운 이름으로 평가받고 있다.
 
입법 로비 사건은 ‘이재만 기획’


-생각하기도 싫겠지만 ‘입법 로비’ 사건의 배경은?
▲서울종합예술학교 김민성(본명 김석규) 이사장이 지난 2014년 6월 학교공금 횡령사건으로 조사를 받았다. 그 후 2016년 2심에서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 사건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 야당 탄압을 위해 김민성 이사장을 활용했다.


당에서는 그 사건을 세월호 참사로 궁지에 몰린(잇단 총리 내정자의 낙마 등) 박근혜 정부가 야당의 공세를 차단하고 되치기를 하려는 생각으로 만든 기획수사이며 공안정국의 신호탄으로 규정했다. 당과 당대책위원회는 전례 없이 신속하고 강력하게 움직이며 대책 마련에 전념했고, 박영선 당시 원내대표는 일시 비난 여론이 있더라도 임시국회를 소집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2014년 8월21일 열린 영장실질심사에서 검찰이 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나에게 청구한 구속영장이 기각되었다. 당시 세월호 사건으로 여야 간의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나의 이른바 ‘입법 로비’ 사건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고 여야가 한목소리를 낸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법안소위 소속 의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당적에 상관없이 같은 취지의 사실 확인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김재윤 전 의원이 ‘입법 로비’ 사건은 ‘청와대 이재만 전 비서관이 기획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김재윤 전 의원이 구속 수감된 후 청와대 문서 유출사건이 발생하고 당시 청와대에 근무하던 박관천 경정이 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들어왔다. 김재윤 의원이 우연히 박 경정을 만나 이 입법 로비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박 경정은 “입법 로비 사건은 청와대 이재만 비서관이 기획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김재윤 의원이 나에 대한 2심 심리가 진행 중이었던 법정에서 분명한 목소리로 용기있게 증언했다.


당시 입회한 검사는 “김재윤 의원의 마지막 발언(청와대 이재만 비서관 기획)은 없었던 것으로 해달라”는 발언을 했다. 내 귀에는 그 말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따로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말로 들렸다. 부장판사가 “김재윤 의원의 발언은 속기록에서 삭제하겠다”고 말했다. 김재윤 의원의 발언은 입법 로비 사건이 청와대 작품이며 공안정국의 신호탄이라는 애초의 민주당 주장과 같은 것이었다.


-입법 로비 사건이 공안정국 신호탄이라는 증거는 있는가?
▲김영한의 업무노트는 그가 청와대 민정수석이 된 2014년 6월부터 그만둔 2015년 1월까지 참석한 공식·비공식의 청와대 비서관 회의 내용을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이 노트에는 처음부터 세월호 참사 대책에 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하며, 특히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세월호의 실소유주 유병언의 소재 파악에 집중하는 듯한 모습을 잘 기록하고 있었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독버섯처럼 자란 DJ·노무현 정부 인사들’에 대한 사정 지시는 확실한가?
▲나는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4선 현역의원이며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인 나를 정권적 차원에서 관리하는 블랙리스트에 올렸다는 것을 상상을 하지 못했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독버섯’처럼 자란 DJ·노무현 정부 인사들에 대한 아주 특별한 그리고 공식적인 사정 지시(2014년 7월4일) 이전부터,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은밀한 표적 사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만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 정부의 은밀한 반민주적 불법행위를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김 전 비서실장이 2014년 7월 이른바 ‘독버섯’ 소탕령을 내린 지 2년이 넘은 2016년 말에 이르러서야 당시 민정수석 김영한의 죽음으로 그의 비망록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블랙리스트도 함께.


정권과 대통령에게 도전하는 세력에게는 두려움을 갖도록 강력한 사정을 하고, 그 구체적인 대상은 ‘독버섯’처럼 자란 DJ·노무현 정부 인사들이었다.


김기춘 전 실장은 영호남 지역감정을 조장하며 우리 사회에 치명적인 상처를 낸 “우리가 남이가”라는 원조 지역감정의 선동자(1992년 대선 때 초원복집 사건)였다. 그는 민주주의 발전에 암적 요소로 작용한 유신헌법 제정의 지식 기술자로서 불사조처럼 살아나 권력의 최정점인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불법적으로 야당 탄압을 지시한 것이다. 나는 문서를 확인하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지난 정권의 유령처럼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등장한 그는 지난 시대의 유물인 블랙리스트를 다시 작성하고, 정권과 대통령에 도전하는 세력에게 두려움을 주는 사정을 지시했다.

 

김기춘發 사정 지금도 ‘애통’


-블랙리스트, 세월호 사건과 맞물려 엮인 입법 로비 사건은 결국 20대 총선에도 출마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가장 억울한 점은 무엇인가?
▲검찰이 기소한 5000만 원 중 4000만원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그동안 내 가슴을 억누르고 있던 ‘애통한’ 일, ‘받지도 않은 1000만 원에 대한 유죄 판결’에 대해서도, 2심 때 천대엽 부장판사가 판결문 낭독에 앞서 ‘직접 증거가 없어 판단하기 어려운 사건의 경우에도 어떻든 판단을 해야 하는 직업이 판사’라는 취지의 말을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7월4일 지시 이후인 7월7일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에서 약 20일째 학교 공금횡령 혐의로 조사받고 있던 서울종합예술직업전문학교 이사장 김민성은 갑자기 나에게 돈을 주었다는 A4 용지 한두 장짜리 진술서를 써냈다.


김 전 실장이 지시한 대로 두려움을 갖게 하는 경고(Warning) 효과로 나타났다. 그해 7월10일 김영한의 업무노트에는 “사정→여1, 야1, 특수”라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검찰은 2014년 8월 초 이 사건을 발표할 때 여야의 의원 비율을 1대1로 맞추었다.


심지어 2014년 8월24일자(영장청구가 기각된 2014년 8월21일 밤 이틀 후) 업무노트에는 나에 대한 영장 기각에 대해 김기춘 전 실장이 ‘믿을 만한 부서’를 통해 ‘상응’한 조치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어, 법원의 판결에도 관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요즘 뜨겁게 부상하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청와대와의 추악한 재판거래는 역사 앞에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윤이상 평화재단 이사장 취임은 어떻게 해서 맡게 됐나?
▲윤이상평화재단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음악을 올바로 평가하고 윤 선생이 추구하는 정신과 음악세계의 가치를 공유하려는 목적으로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3월 각계 인사 800여 명을 발기인으로 하여 창립된 재단법인이다. 초대 이사장은 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이 맡았으며,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등이 중심이 되었고 실무는 주로 장용철 안양대 교수가 도맡아 창립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장용철 교수의 안내로 초기에는 이사로 참여했다.

 

▲ 신 전 의원은 “박근혜 정부가 나를 블랙리스트에 올려 윤이상평화재단과 윤이상 선생의 유족에게 도움은커녕 불편과 고통만 주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에 매우 가슴 아팠다”고 털어놓았다.    


윤이상평화재단은 창립되자마자 윤 선생의 음악이 가지는 세계적 지위와 명성 그리고 오래전부터 윤이상음악연구소를 운영해오던 북한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 역사적으로 의미 있고 보람찬 사업들을 추진할 수 있었다. 북한은 이미 1984년 9월27일 윤이상음악연구소를 설립하고 이어 윤이상관현악단을 창단하고, 1992년에는 600석 규모의 윤이상음악당을 개관하고, 1996년에는 윤이상박물관까지 개관했다.


그래서 윤이상평화재단은 자연스럽게 윤이상음악을 통한 국제적 교류(특히 북한과의 교류)를 수준 높게 추진했다. 2007년부터 2013년까지 격년제로 실시되어 많은 성과를 올린 윤이상국제작곡상은 윤이상평화재단이 윤 선생의 수준 높은 음악을 세계에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내가 이사장으로 있던 윤이상평화재단을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윤이상 국제작곡상에 필요한 경비 지원을 중단하여 윤이상국제작곡상도 2013년을 마지막으로 종료되는 아픔을 겪었다.

 

윤이상재단 이사장 맡자 박해


-윤이상평화재단 이사장의 입장에서 바라본 윤이상 작곡가는 어떤 인물인가?
▲1972년 뮌헨올림픽 빌리 다우메 조직위원장은 “세계가 한데 어우러지는 자리에 동서양을 아우를 수 있는 이는 윤이상 당신입니다”라고 윤 선생에게 역사적인 뮌헨올림픽 개막공연을 부탁했다. 그러나 뮌헨올림픽 개막공연이 윤 선생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기억하는 우리 국민은 많지 않다. 


박정희 쿠데타에 항거했다가 1964년 간첩으로 몰려(동백림 사건) 국외로 추방되어 독일에 머무르던 윤 선생이 1980년 전두환 군사 쿠데타에 항거하는 광주시민의 피어린 항쟁 소식을 독일에서 듣고, 피가 끓는 심장으로 쓴 곡 ‘광주여 영원히’를 기억하는 우리 국민도 역시 많지 않다. 윤 선생은 1995년 그렇게도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이국에서 세상을 떠나 베를린에 묻혔다. 분단으로 발생된 가슴 아픈 일이다.


독일에서는 윤 선생을 베토벤·슈베르트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박정희 정권에서 동백림 사건으로 정치인 윤이상으로 기억되지만 음악가 윤이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 선생의 음악적 매력은 신기하게도 들으면 들을수록 싫증이 나지 않는다. 선생은 세계적인 음악가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윤이상평화재단 이사장을 맡으면서 온갖 박해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 광풍은 나와 윤이상평화재단 그리고 윤이상 선생의 유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피해를 안겨주었다. 윤이상평화재단 이사장이라는 직책을 맡은 나를 블랙리스트에 올려 윤이상평화재단과 윤이상 선생 유족에게 도움은커녕 불편과 고통만 주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에 매우 가슴 아팠다(이 대목에서 신 의원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골프 말고 배드민턴 치는 의원


-‘배드민턴 치는 국회의원’으로도 유명한데 어떻게 해서 베드민턴을 사랑하게 되었나?
▲배드민턴을 1996년 처음 시작했다. 그 해 봄 총선을 앞두고 재선에 자신을 갖고 패기 충만한 혈기로 선거운동을 하다가 장위성당(성북구 장위동) 앞길에서 함세웅 주임 신부님을 만났다. 함 신부는 나에게 도와줄 일이 없겠는지 물었고, 나는 아무 걱정 마시라고 했다(그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 대답이었는지 그 당시는 물론 그 이후 한참 지나서도 모르다가 다시 함 신부를 만나고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날 월곡산을 내려와 입구에 있는 성북체육관에 들렀다가 새벽부터 땀을 흘리고 있는 40~50명의 동호인을 보았다. 그때 비로소 내가 총선에서 왜 낙선했는지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전국 어디를 가든 배드민턴 동호회는 있다. 클럽회원들은 ‘골프를 치지 않는 국회의원’을 보고 ‘배드민턴을 치는 국회의원’과 한 게임 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대한배드민턴협회 회장을 맡으며 남북교류에도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알고 있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 대한체육회 산하의 대한배드민턴협회 회장을 맡게 되었다. 그때는 배드민턴을 너무 좋아하고 또 22년 넘게 생활체육 배드민턴 동호인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엘리트, 생활체육이 함께 나를 회장으로 추천했을 때 즐거운 마음으로 수락했다. 그러나 나를 윤이상평화재단 일 등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려놓고 정권이 들여다보고 있던 차에 이제는 대한배드민턴협회까지 맡게 되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하기도 하다.


대한배드민턴협회 차원의 남북교류를 추진하기 위해 협회 내에 남북교류추진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위원장에 윤이상평화재단 일로 나하고 남북관계 사업 경험이 많은 장용철 교수를 위촉했다. 심양에서 북측 관계자와의 첫 만남에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평양에서 한 게임 합시다”라고 제안했다. 북한의 고위 관계자를 포함한 3인과 우리들 3인은 우호적인 협의를 거치면서 북측은 내가 제안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고, 그 자리에서 우선 평양에서(그다음에 서울) 남북 배드민턴대회를 개최하기로 전격 합의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심양에서 남과 북이 합의한 배드민턴 교류전을 꼭 재추진하여 평양대회가 열리게 되면 김정은 위원장에게 “나랑 한 게임 합시다”라고 제안하고 싶다.


-사단법인 신정치문화원(이사장 신계륜)에서 ‘걸어서 평화 만들기’를 추진한 것으로 알고 있다. 휴전선을 통과해 백두산에 오르는 목표는 여전히 유효한가?
▲2008년 11월11일, 당시 민주당 젊은이들과 함께 의논하여 사단법인 신정치문화원을 출범하는 창립식을 가졌다. 당시 임박한 남북 간, 북미 간의 긴장을 해소할 방안으로 국토대장정을 제안하여 한반도의 남단 제주도에서 북단 백두산까지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국토대행진을 기획하고 그 이름을 ‘걸어서 평화 만들기’로 결정했다.


2009년 4월8일 제주도 한라산 관음사 야영지에서 전야제를 열었으며 일행 100여 명은 다음날 관음사 야영지를 출발하여 꽃피는 삼천리 금수강산을 걷기 시작했다. 걷다가 한반도 평화에 관한 좌담회·토론회·강연회 등을 열거나 참여하기도 했고, 지나가다 지역신문·방송과의 인터뷰에도 응하면서, 때로는 수백 명이 합세하기도 하고 때로는 10여 명이 빗속을 걷기도 했다. 남한의 마지막 지점인 임진각까지 총 60일 동안 650km를 걷고 또 걸었다.


‘걸어서 평화 만들기’ 행진은 아름다운 금수강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하나의 통일된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평화였다. 멀리 동학농민전쟁에서부터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그리고 4·3, 6·25, 5·18 등 전쟁과 학살의 기록이야말로 평화의 소중함을 절절히 일깨워주었다.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정신은 맑았다.


걸으면서 우리는 38선을 넘는 문제와 북한 땅을 걷는 문제 등을 협의하기 위해 실무회담을 갖자고 북한에 제의했다. 북한은 우리의 제안에 즉시 반응하여 개성공단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하지만 정작 이명박 정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북한 실무진은 개성공단에서 기다렸지만 우리는 개성공단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통한의 순간이었다.


일단 중국을 통해 백두산에 들어가 1차 국토대행진을 마무리하기로 하고 한라산 백록담에서 가져온 물 중에서 절반은 보관하고 절반은 배낭에 담아 중국을 통해 백두산에 올랐다. 2009년 6월15일 우리는 조촐하게 한라산 백록담 물과 백두산 천지 물을 하나로 섞는 합수식을 거행하여 63일(국내 60일+백두산 3일)의 1차 국토대행진을 마무리했다.


2009년 1차 국토대장정 이후 우리는 별도로 계획을 세워 하의도(김대중 대통령 고향)에서 봉하(노무현 대통령 고향)까지 걷기도 했다.
우리가 걸어서 휴전선을 넘고 북녘 땅을 지나 백두산에 오를 때까지 걸어서 평화 만들기는 계속될 것이다. 65년 이상 허리가 잘려 있는 한반도의 38선을 걸어서 넘어 북녁땅을 밟고 백두산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한 이 프로젝트를 통일부에 신청해 놨다. 민간인 최초로 걸어서 38선을 넘어 백두산까지 걸어서 오르고, 북한 측에서도 걸어서 한라산까지 올랐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 인생 마지막까지 집중할 정치적·경제적 화두는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것이다.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구축과 통일기반 조성을 하는 데 미력한 힘이지만 보태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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