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린 포드’가 예리하게 진단...북한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그들의 핵무장은 강함 아니라 약함 나타내는 신호”

김혜연 기자 | 기사입력 2018/12/05 [10:05]

‘글린 포드’가 예리하게 진단...북한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그들의 핵무장은 강함 아니라 약함 나타내는 신호”

김혜연 기자 | 입력 : 2018/12/05 [10:05]

북한의 20세기는 격변의 시기였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에 점령됐던 한반도는 제2 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과 미국의 합의에 따라 편의상 지도에 임의로 그은 선에 의해 분단됐다. 북한도 남한도 반쪽에 만족하지 않았다. 둘 다 한반도 전체를 원했기 때문이다. 남한은 민족 통일을, 북한은 민족 해방을 원했다. 이는 한국전쟁(1950-53년)이란 결과를 낳았고, 곧 세계 초강대국 두 나라와 매카시즘에 사로잡힌 미국이 주도하는 반(反) 공산주의 십자군 사이의 대리전으로 변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북한과 남한은 비무장지대(이하 DMZ) 너머로 정보원과 스파이, 테러리스트를 계속 보내 해를 입혔지만, 냉전 파트너가 사라지자 남북한은 서로에게만 위협이 되는 존재로 변해 버렸다.

 


 

북한의 핵 억지력에는 ‘정권 안전+군대 해방’ 두 가지 의도
군에 쓰던 노동력과 자원, 산업과 경제 발전 투입하려고 해

 

그래도 김정은은 ‘북한 역사상 가장 시장 친화적인 지도자’
‘매대 장사꾼’ 평양 길거리 등장…TV·하이힐·스마트폰 판매

 

북한에는 의지할 만한 민주주의 역사가 없었다. 또한 북한의 정치 구조는 소련의 ‘인민민주주의 패러다임’에 따라 구축됐다. 1956년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총리가 스탈린과 스탈린주의를 비난하자 김일성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위협을 느끼게 됐다. 김일성은 우선 자신을 위협하는 인물들을 당에서 숙청한 다음 주체사상을 기치로 걸고 빨치산 동료들과 함께 나라의 중심을 스탈린주의에서 자급자족 민족주의로 옮겼다.


중요한 점은 찰스 암스트롱이 <북한 혁명>이란 책에서 지적했듯이 김일성이 소련의 사회주의를 한국의 토착 전통 및 문화와 융합해 서양의 모든 예측보다 더 오래 살아남은  가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다. 소련과 중국은 동시에 북한에 구애했으며 중공업을 바탕으로 한 북한의 전후 경제는 호황을 누렸다. 북한은 전 세계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국가가 됐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부터 경제는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중공업에서 경공업으로의 전환과 소비재 생산 증가가 계획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1970년대 초반에 수십억 달러를 빌렸지만, 1973년 석유 위기가 세계경제를 불황으로 몰아넣으면서 그가 투자한 대규모 사업들은 실패를 보기 시작했다. 한때 세계 34위의 경제 규모였던 북한은 1980년대 내내 곤두박질쳤으며 소련의 붕괴로 상황은 더 악화됐다 소련의 원조가 끊기고 중국의 원조에는 브레이크가 걸렸다. 방치된 북한은 핵 억지력을 구축하려 했지만, 경제가 급격히 붕괴했으며 사람들은 기아에 허덕이게 됐다 수백만 명이 사망했고 김일성도 마찬가지였다.


김일성은 생물학적 이유로 죽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정책 실패와 자연재해의 피해자였다. 사망자들은 20세기의 마지막 25년 사이에 벌어진 최악의 인도주의적 비극 속에서 이름 없는 희생자가 됐다. 미국 정부도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북한 사람들의 어려움을 전 세계 TV 화면에 띄워줄 자선 콘서트는 열리지 않았다. 북한 사람들은 침묵 속에서 서서히 굶주려갔다.


3년의 유훈통치 기간이 지나자 김정일은 공식적으로 김일성의 자리를 세습 받았다. 김정일은 개혁에 대한 아버지의 선천적 불신을 그대로 이어받았지만, 북한의 생존은 침체한 경기를 부양하는 데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정일의 개혁은 부분적이었으며 항상 성공을 거두지도 못했지만, 2010년 이후의 더 광범위한 변화에 초석이 됐고, 정당성도 제공했다. 김정일 통치하에서는 ‘매대 장사꾼’이 거리에 등장했고, 일본의 자이 바쓰나 남한의 재벌같이 다른 아시아 국가의 경제를 일으키는 데 도움을 준 모델인 다부문 복합기업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평양에서는 국가가 운영하는 상점에 부강 대성, 승리, 능라88 같은 회사에서 만든 의약품과 오토바이 광고가 등장했다. 고려항공은 택시와 통조림 사업을 시작했다. 라선경제특구와 그 이후의 (더 성공한) 개성산업공단은 미래를 위한 모델과 현금을 북한에 들여왔다.


미국 정부가 목표로 삼았던 다른 지도자들과 나라들의 운명은 북한 정권의 뇌리 깊숙이 새겨져 있다.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의 문제는 대량 살상무기의 보유가 아니라 부재 때문이었음을 북한은 잘 알고 있다. 2003년 리비아가 공식적으로 핵개발 포기를 선언했을 때도 회의적인 북한은 핵 야심을 버리고 리비아 정부처럼 국제사회의 품에 안기라는 제안을 거절했다. 2011년 김정은이 김정일의 자리를 이어받기 한 달 전쯤 무아마르 카다피의 죽음을 담은 잔인한 동영상이 공개됐다. 북한의 시각에서 이 동영상은 국제사회를 믿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려주는 증거였다.


북한 지도부는 미국의 적대행위가 계속되는 한 정권 생존을 위해서는 독자적인 핵우산과 경제 성장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서로에게 방해가 된다. 첫 번째가 두 번째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핵 방어에는 다른 동기도 존재한다. 산업과 경제가 성장하려면 노동력이 필요하다. 중국과 달리 북한에는 공장에 유입되기를 기다리는 소작인 노동력이 많지 않다. 대신 노동자들은 북한의 100만 군대에 예속되어 있다. 이 노동 예비군을 제대시켜야 한다. 군 규모 축소와 핵무장은 강함이 아니라 약함을 나타내는 신호다. 북한은 재래식 무기 경쟁에서 패한 지 오래다. 북한은 GDP 중 4분의 1을 국방비로 지출하지만, 이 비용은 북한 경제의 50배 가 넘는 경제 규모를 가진 남한이 지출하는 국방비의 5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논란이 되는 북한과 남한 사이의 해양경계선인 북방한계선(NLL) 근처에서 남북한 해군이 충돌할 때마다 양측의 사상자 숫자가 다른 것은 이런 간극을 잘 보여준다.


북한의 국방비를 미국, 일본, 남한의 국방비를 모두 합친 수치와 비교하면 그 격차는 엄청나게 커진다. 북한의 국방비는 한미일 총액의 겨우 2% 정도다. 그래서 북한의 핵 억지력에는 두 가지 의도가 담겨 있다. 정권의 안전을 확실히 하고 노동력과 자원을 군대에서 해방해 산업과 경제 발전에 투입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경제제재에 의해 무의미해졌다.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의 경제 개혁과 군 개혁을 강화하고 더 확실하게 했다, 2013년 초반, 권력을 확실히 한 김정은은 경제 발전과 핵 억지력 구축을 동시에 진행하는 병진노선을 당이 채택하게 했다. 경제가 서서히 개방되고 최초의 핵실험이 진행된 것은 김정 일의 통치 아래에서였지만, 그 두 가지의 속도와 심도를 더한 사람은 김정은이다. 과정이 힘들었어도 정상에 도달한다면 모든 것이 가치 있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이제 문제는 김정은이 완성된 핵 억지력을 평화 합의와 안전보장, 제재 해제, 경제 발전 패키지 와 교환할 수 있을지다. 북한은 거의 70년 동안 관심국가였다. 처음에 북한은 수많은 공산주의 위성국가 중 하나였다. 지금은 이들 중 5개국을 제외한 모두가 붕괴하고 불탄 상태다.

 

2001년 9·11 테러와 그에 따른 ‘테러와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미국의 외교 정책은 강경하고 일방적인 성격을 띠게 됐다. 북한은 부시 행정부가 세계 평화에 대해 명백하게 현존하는 위험으로 규정하고 이름 붙인 ‘악의 축’ ‘깡패국가’ ‘폭정의 전초기지’ 중 하나가 됐다. 북한의 테러 활동은 1980년대에 멈췄지만, 미국은 2008년까지도 여전히 북한을 테러 지원국가로 분류했다.


이후 테러국가 지정은 버락 오바마가 해제했지만 2017년 도널드 트럼프는 신경가스를 사용 한 말레이시아 김정남 암살 사건을 들어 부활시켰다. 김정일은 북한의 에너지와 원자재가 고갈되면서 필요에 의해 계획한 경제 자유화를 도입했다.

 

하지만 그 계획을 단칼에 날려 버린 사람은 그 아들이었다. 필요 때문이 아니라 야망 때문이었다. 김정은은 모든 기업이 국가계획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경영 활동을 펼치는 사회주의 기업 책임관리제를 원했다. 2014년 김 정은은 공장 관리자들이 임금을 정하고 고용과 해고를 하며 예비품과 원자재를 시장에서 구할 수 있도록 하는 개혁안을 도입했다. 하지만 이는 완벽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불규칙한 에너지 공급에 따른 병목현상이 일어났고 원자재 부족은 개혁의 긍정적 효과를 제한했기 때문이다.


안드레이 란코프에 따르면, 그래도 김정은은 ‘북한 역사상 가장 시장 친화적인 지도자’다. 지난 세기말의 기근으로 촉발된 경제적·사회적 변화는 김정은이 통치하면서 가속도가 붙었다. 국민을 먹이고 입히는 중앙배급 체계는 여전히 공식적으로 평양에 존재하지만, 기능이 축소됐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시장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제한된 형태로 가끔씩만 기능한다.

 

평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발전 양상은 ’매대 장사꾼‘이 길거리마다 등장했다는 점과 시계, 하이힐, TV, 스마트폰 같은 소비재들을 구할 수 있는 정식 시장이 증가했다는 점이다. 평양은 기념 석주, 기념비, 김일성에게 경의를 표하는 기념관. 기념물들이 들어선 북한의 놀이공원이자 군사 퍼레이드와 인민 결의대회가 열리는 부대다. 김정은이 집권한 후 북한 주민들은 새로운 사회 계약에 따라 노동에 따른 보상을 받게 됐다.

 

어두운 북한의 야경을 보여주던 위성사진의 시대는 가고 이제 평양은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밝은 빛을 내고 있다. 신호등 때문에 자리를 잃지 않았다면 지금쯤 평양의 멋진 여자 교통경찰들은 실제로 정리가 필요할 정도의 교통을 지휘하고 있었을 것이다. 휴대폰의 통화 시간 재충전하는 비용보다 새로 하나 사는 것이 더 싸서 휴대폰이 두 대인 사람이 많지만, 북한의 이동통신 가입자는 300만 명을 넘어섰다. 심지어 셀카봉 문화도 확실히 자리 잡았다.

 

북한의 2016년 성장률은 거의 5%였다. 제조보다는 무역에 의한 것이다. 당원 자격에는 여전히 프리미엄이 있지만 당보다는 기업이 미래의 열쇠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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