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사망 7주기 계기...폐쇄적 왕국 재조명

냉철·잔혹 야심가…‘권력욕 끝이 없었다’

김범준 기자 | 기사입력 2018/12/19 [11:46]

김정일 사망 7주기 계기...폐쇄적 왕국 재조명

냉철·잔혹 야심가…‘권력욕 끝이 없었다’

김범준 기자 | 입력 : 2018/12/19 [11:46]

7년 전인 지난 2011년 12월17일 북한의 독재자 김정일이 세상을 떠났다. 김정일은 ‘권력유지’라는 면에서는 거의 천재적인 실력을 발휘하여, 민주주의가 대세인 현대 사회에서는 보기어려운 3대 세습이라는 ‘김씨 왕조’를 완성한 인물로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아들 김정은 정권에 대해 보수적인 전문가 및 언론들이 ‘조기 붕괴’를 확신했지만, 김정일 사후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굳건한 모습을 보이며 버텨오고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사실상 지금의 ‘폐쇄적이고 제왕적인’ 북한을 만든 김정일을 분석해본다.

 


 

북한 당·정·군 휘어잡은 김정일 권력 장악력 치밀

김정일, 계모 김성애와 이복동생 김평일 비리 김일성에 보고


집요한 정적 숙청…놀라울 정도로 단호한 라이벌 제거
인민 굶어가도 폐쇄정치 고수…세계 최빈국 대열 합류

 

김정일은 공식적으로는 북한의 제4대 국가원수이나, 사실상 그의 아버지 김일성에 이은 제2대째다. 전대 김일성에 못지않은 또한 능가하는 독재자로 유명하며 현재 북한의 열악한 상황을 만들어놓은 주역이다. 이러한 김정일이 북한 당·정·군에서 가지고 있는 공식 직함은 각각 조선노동당 총비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다.

 

▲ 김정일은 세계 여러 독재자들이 닮고 싶어 하는 ‘권력 사수의 전문가’였다. <사진출처=YTN 뉴스 캡처>    

 

아부·선동의 달인


이처럼 북한의 당·정·군을 모두 장악한 김정은의 권력 장악은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고 정교했다.
김정일은 성인이 되기 전부터 권력에 대한 욕망이 컸다고 알려진다. 김정일의 개인 교사 중 한 사람이었다는 황장엽의 증언에 따르면, 10대 시절에 아버지 김일성이 정치적으로 관심 있어하는 분야라는 이유로 황장엽을 데리고 소련의 농업 전람관을 직접 함께 방문해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 아주 세세하게 질문했다고 한다.


17살부터는 김일성의 공식 행사에 동석하면서 김일성의 경호원들을 다른 정치국원들 대신 자신이 직접 관리하며, 세부적인 사항까지 자신이 직접 검토하면서 과업 지시를 하고 또 보고를 받으며, 아버지의 공식적인 활동을 관리했다고 한다.


심지어 아버지를 수행할 때 자리에서 일으키고 신발을 신기고 부축해가는 쇼를 자신이 계획해 실행했다고 한다. 당시 김일성은 노친네도 아니고 40대 후반의 팔팔한 나이라 부축이나 수발 따위는 전혀 필요 없었지만, 이러한 김정일의 세세한 보살핌에 굉장히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 1980년대 권력을 사실상 장악한 김정일이 아버지 김일성과 함께 찍은 사진. 뒤에 앉은 사람은 주체사상을 설계한 황장엽이다.    


10대 시절에 이미 김일성과의 부자 관계를 자신의 정적들에게 과시하고 또한 아버지의 신임을 얻기 위해 심기를 관리하는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은, 훗날까지 이어지는 이미지 메이킹이나 권모술수에 관한 탁월한 재능을 일찌감치 보여주고 있었다. 황장엽은 성인이 되기 전의 김정일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삼촌 김영주를 쫓아내고 후계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했다고 한다.


1967년 숙청된 북한 정치권 내 최후의 김일성 반대 파벌이었던 박금철을 중심으로 한 갑산파가 박금철 부부의 항일투쟁을 찬양하는 <일편단심>이라는 영화를 제작했던 것을 통해 영화계에 갑산파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을 알게 된 김일성이 “영화예술 분야에서 반당 종파분자들의 여독을 완전 청산하라”는 지시를 내린 뒤 김정일은 영화광인 자신의 취미를 살려 24세의 나이에 당 선전선동부 문화예술과장의 자리를 맡게 됐다. 즉, 선동의 방법을 어렸을 때부터 깨달았던 것이다.


이때 자신의 지휘 하에 북한 내에서 혁명적 대작으로 꼽히는 김일성 우상화 영화를 제작하게 된다. <유격대 5형제>, <한 자위 단원의 운명>, <피바다>, <꽃 파는 처녀>, <밀림아 이야기하라>와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특히 <피바다>는 직접 관람한 혁명원로들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며 김일성은 ‘예술성과 사상성이 결합된 우리식 가극을 창작하였다’라고 극찬했다. 이를 통해 이전까지 김일성의 유력한 후계자로 점쳐진 자신의 삼촌 김영주와 벌인 충성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과로 김정일은 김일성의 신임을 얻었고 당 비서국 조직 및 선전담당 비서의 자리에 올라 자신의 권력 입지를 강화하게 되었다.


또한 1972년에는 마오쩌둥의 홍위병을 모방해 국가경제기관 종사원, 대학생, 대학교원, 공장·기업소의 기술자와 과학자 등의 직업을 가진 젊은 미혼 남녀를 대상으로 ‘3대혁명소조’라는 사조직을 만들었다.


이 소조들은 전국 각지의 공장과 협동 농장, 행정기관, 문화예술기관, 각급 학교에서 간부들의 보수주의, 경험주의, 요령주의, 기관 본위주의, 관료주의 등의 악습을 개조하기 위한 사상 투쟁을 한다는 명분으로 곳곳에 배치되었고 광범위한 분야에서 통제/조정/감독권을 행사하는 막강한 권한을 주고 주요 정보를 김정일 자신에게 직접 감시, 보고하도록 했다.


김정일은 이 소조 활동으로 자신이 권력의 말단에서부터 주요 기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 세밀하게 직접 감시, 지시할 수 있는 지휘 계통을 갖췄고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권력장악의 시작


김정일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직전인 1960년 대의 북한 사회는 꽤 리버럴한 사회였다. 갑산파를 비롯한 김일성의 견제 정치세력도 존재했고 주말만 되면 북한의 젊은이들은 소련, 헝가리, 폴란드에서 나온 영화를 보며 나들이를 했고, 동유럽과 소련의 민요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불야성의 파티를 벌였다.

 

▲ 북한 김씨 정권의 붕괴를 확신하던 박근혜 정부는 탄핵으로 무너졌지만, 김정일 사후의 북한은 여전히 ‘김씨 왕조’ 손아귀에 놓여있다.    


하지만 김정일의 3대 혁명 이후로 서방은 물론 동구권의 문물도 외국 것이니 나쁘다는 이유로 금지되었고, 상호 감시, 보고, 비판 체계는 북한 사회를 극도로 경직되게 만들었다. 물론 꽤 자유롭던 분위기를 김정일 혼자 없앤 것은 아니고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비판하면서 탈스탈린주의를 표방한 이후로 차차 악화되던 북한-소련 관계와 해방 이후부터 슬슬 태동되던 북한의 민족주의가 나날이 강성해진 것이 이 때에 이르러 결실을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기조는 1980년대에 가면서 일부 외국 문물을 차용하면서 사그라든다.


김정일의 권력 확대 시도로 김영주는 1980년대까지 권력에서 동떨어진 채 은둔 생활을 해야 했다. 김일성의 셋째 아내인 김성애가 전국의 여성동맹사무실에 김정일의 생모이자 김일성의 둘째 부인인 김정숙 사진을 팽개쳐버리고 자신과 김일성의 생모의 사진을 걸어놓자 격분한 김정일은 계모를 치기 위해 여동생 김경희의 남편 장성택을 시켜 김성애 일가가 부화방탕한 행동을 했는지 비밀리에 조사하라고 했다.


하지만 김일성과 사이가 돈독한 김성애를 섣불리 공격하는 일은 오히려 자신의 입지를 축소하는 일이었고, 김정일은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게다가 이시기에 그는 12살 어린 이복동생 김평일의 도전에 매우 고전하고 있었는데, 김평일은 키가 180cm에 달하는 장신에다가 아버지를 닮아 원로들의 호감을 샀고, 카리스마와 지도력이 대단하여 대학 재학 시절부터 온 대학생들을 자신의 수하로 휘어잡았던 인물이었다. 이에 온 이북이 "다음 수령은 김평일이가 되겠다!"하고 수군거릴 정도였다.


그런데 1972년 김일성의 회갑 잔치에서 빨치산 원로들에게 김일성이 “내 아들이 두셋 있는데 누가 다음으로 좋겠나?”하고 물었다. 근데 원로들은 김평일을 점찍고 있었지만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는데, 김일성의 바로 왼편에 앉았던 최현이 “수령님, 당연히 수령님 장손이 해야죠. 장남이 하지 누가 합니까?”라고 외치자 김일성이 “그래요? 다른 의견 없습니까?”라고하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빨치산 최고 원로인 최현의 강경한 발언에 아무도 김평일을 지지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이렇게 원로는 김정일을 벌써 낙인찍고 있었다.


결국 1972년 4월 김일성은 만경대 생가를 방문하여 “우리 집안, 우리 만경대 집안의 혈통은 김정숙 혈통입니다. 김정숙 혈통만이 백두산에서 시작된 우리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완수할 수 있습니다”라고 교시를 내림으로 김평일을 내치고 김정일을 후계자로 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73년 여름, 김성애의 아들들을 나락으로 몰아내는 사건이 터진다. 김일성이 해방 직후부터 아껴두고 또 아꼈던 인민대학습당을 건설하려던 부지를 김일성이 방문했는데, 호화로운 저택이 지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김일성이 놀라서 “뭐야. 이게? 누구네 집이야?”라고 묻자 저택을 지키던 보초가 “해군사령부 정치위원 당비서, 김성갑 동지의 집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곧 ‘인민대학습당 사저 신축 사건’으로 번졌다. 김일성은 대노했고 “뭐? 김성갑이가 여기 살아? 언제부터?”라고 외치고는 김성갑을 불러서 매우 혹독하게 비판하고 질책했다.


그날 밤 지친 김일성이 관저로 돌아가서 김성애에게 “밥이나 먹자”라고 하자, 한 성격했던 김성애는 김일성을 구슬러도 모자랄 판에 “밥이 뭐요? 낮에 자기 처남을 그렇게 핀잔주고 비판하고 남들 앞에서 그렇게 깎아내리고, 밥이 넘어가겠소?”라고 바가지를 긁었고, “당신 장모님이 그런 집에서 한번 살면 당신 뭐 잘못 되는 거 있어?”라고 소리지르며 밥상을 뒤엎었다.


난데없이 뜨거운 국과 밥을 다 뒤집어 쓴 김일성은 폭발했고, 그날 밤 둘이서 미친듯이 싸웠다고 한다. 이틈을 놓치지 않고 김정일은 김성애와 그녀의 친족들, 친지들, 그리고 김성애의 아들인 김평일의 비리를 김일성에게 낱낱이 보고했고, 다시 강도 높은 검열과 사상 검증을 실시했다. 그 결과로 이들 대부분은 숙청되어 권력의 변두리로 밀려나거나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


이후에도 김성애의 권세는 유지되어 1974년 1월1일 김일성이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과 신년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의자가 준비되었는데, 김일성을 위한 황금의자 옆에 김성애를 위한 황금의자가 나란히 놓여, 그것을 본 김정일이 김성애가 당간부도 아닌데 왜 황금의자를 두냐고 길길이 날뛰다가 김성애가 나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공손하게 맞이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김성애의 권력은 날이 갈수록 축소되었고, 80년대엔 북한에서 “김정일의 최고 업적이 중앙여맹비서를 제친 것”이라는 농담이 돌 정도였다.

 

고도의 권모술수


여러 정치 공작의 결과, 김정일은 마침내 1974년 당중앙 위원회 제5기 전원회의에서 ‘유일한 후계자’로 공식 선출되었다.


이후 김영주를 철직시킨 뒤 일가족을 량강도로 보내버렸고 특히 사저신축 사건으로 몰락한 김평일은 1979년에 유고슬라비아 주재 북한 대사관의 대사로 파견된 이래 아버지 김일성의 장례식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동유럽의 해외 대사로만 근무하며 북한 땅에 발 붙이지 못하는 야인 신세를 지금도 면치 못하고 있다.


그의 동생인 김영일도 운명은 비슷했고 그는 2000년에 사망했다. 김성애는 완전히 정치적 폐인이 된 채로 지내다가 지미 카터 방북 시에 잠깐 빛을 보곤 은거하다가 2014년 들어서 사망설이 돌고 있다. 그래도 90까진 살았다.


하지만 1976년 김정일에게도 위기가 닥친다. 그가 지휘한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북한을 멸망의 위기로 몰고 가자 정권 내에서 김정일 반대파들이 대거 들고일어난 것이다. 김일성은 김정일을 좌천시키고 당중앙이란 호칭도 더 쓰지 못하게 했다.


이에 신이 난 김정일의 반대파들이 앞을 다투어 김정일을 성토했는데, 사실 이게 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작전이었다는 설이 존재한다.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때문에 당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김정일을 위해 김일성이 짐짓 김정일을 내칠듯 쑈를 한 것이었다. 덕분에 커밍아웃을 한 김정일 반대파들은 모조리 숙청되고 만다.


이렇게 고도의 권모술수로 자신의 정적을 모두 제거한 뒤 1983년에 열린 최고인민위원회 제7기 2차 회의에서는 당 정치국 상무위원, 당 비서, 군사위원을 겸직하게 되면서 마침내 군 지도부까지 장악했고 김일성 이외에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서열 2위의 권력자가 되었다.


1992년에는 군 통수권까지 가지게 되면서 김일성은 김정일을 거치지 않고서는 어떤 보고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김일성은 정치적으로 장님에 귀머거리인 꼭두각시 수준으로 전락했고 황장엽의 주장에 따르면 ‘최고 고문’의 역할로 사실상 밀려났다. 심지어 김일성은 말년에 자신의 생일에 김정일에게 아첨하는 송시 ‘광명성 찬가’를 바치는 안습한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바치다시피 한 찬양글.    


공산주의 국가 최강독재자인 스탈린과 마오쩌둥도 안 한 권력을 부자 세습하는 현대 역사상 유례없는 사례를 만들어 북한을 사회주의 국가에서 전제군주제로 바꿔버렸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북한만의 현상은 아닌 것이 3대 세습을 먼저 달성한 니카과라의 소모사 가문의 전례가 있으며 장제스, 리콴유, 알아사드는 2대 세습에 성공했고 후세인, 카다피, 차우셰스쿠도 따라 하려고 했다. 다만 북한은 명색이 ‘사회주의’ 국가가 세습을 했다는 것에 전세계는 경악에 빠진 것이다.

 

중국과는 다른 길


이처럼 권력을 장악했던 김정일은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 내외의 처형 장면을 비디오로 구해오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비디오는, 김씨 일가와 북한의 몇몇 고위층들이 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정일의 요리사로 유명한 후지모토 겐지도 동석했는데 김정일은 차우셰스쿠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순간 하얗게 질리더니 “우리도 반동들을 때려잡지 않으면 저 꼴이 된다”고 외쳤다고 한다.


이에 반해 중국의 지도자였던 덩샤오핑도 역시 차우셰스쿠 처형 광경을 녹화한 비디오를 입수하여 중국 지도부와 같이 보았다고 한다. 덩샤오핑은 한참 만에 중국 공산당 간부들에게 “어쩌다 저 꼴이 되었는가?”라고 물었고, 어느 한 공산당 간부가 “반동들을 때려잡지 않아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덩샤오핑은 “틀렸다. 우리도 개혁하지 않고 인민들에게 베풀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라고 대답하면서 그 간부를 질책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덩샤오핑은 자신이 직접 주도아래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면서 본격적으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중국은 최고의 자본주의 시장으로 경제성장을 하게 되었다. 물론 ‘천안문 사태’라는 씻을 수 없는 학살극을 벌이긴 했지만, 그래도 김정일보다 덩샤오핑이 인민들에게 많이 베풀은 것은 사실이니까 거짓말은 하지 않은 셈이다.


이처럼 김정일과 덩샤오핑은 처형 비디오를 보고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이 반응의 차이는 두 나라의 미래를 완전히 정반대로 바꿔놓게 된다.


김정일과 덩샤오핑의 관련된 일화로는, 덩샤오핑이 ‘흑묘백묘론’을 주장하면서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실행시키자 김정일은 공산주의 혁명을 포기한 누가 누구에게 포기한다는 거야? 중국은 곧 나락에 빠질 것이라는 논문을 작성하여 발표하였고 논문 내용은 덩샤오핑의 개혁정책비판과 덩샤오핑을 비웃는 내용을 주로 이루었다.


그러나 20년 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은 중국이 미국과 같이 G2 국가로 미국과 대등한 강대국으로 성장한 것에 비해, 폐쇄적인 자력갱생을 주장한 북한은 현재 최빈국 중의 하나로 몰락했다.

 

penfre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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