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모이’ 히어로 유해진

“거북하지 않고 잘 녹아드는 배우로 남고 싶다”

정하경 기자 | 기사입력 2019/01/02 [13:40]

영화 ‘말모이’ 히어로 유해진

“거북하지 않고 잘 녹아드는 배우로 남고 싶다”

정하경 기자 | 입력 : 2019/01/02 [13:40]

2018년 10월 영화 <완벽한 타인>에서 가부장적이면서도 까칠한 변호사로 열연을 펼쳤던 유해진이 두 달 만에 ‘수더분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유해진이 배우 윤계상과 함께 투톱으로 출격한 영화 <말모이>가 신년벽두 스크린에 걸린다. <말모이>는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에 맞서 우리말을 지키려 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조선어학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인 <말모이>를 편찬하려 했던 실화를 재료로 한 작품으로, 유해진은 이 영화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홀아비로 살아가지만 의리가 남다른 까막눈 판수 역을 맡았다. 판수는 감옥소 동기이자 학회 어른인 조갑윤 선생(김홍파 분)의 소개로 조선어학회 심부름꾼으로 취직, 돈도 안 되는 말을 왜 목숨 걸고 모으나 했으나 사십 평생 처음으로 가나다라를 배우게 된 인물. 대중의 호감도가 높고 연기력도 보증된 배우 유해진은 2018년 12월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진행된 매체 라운드 인터뷰에서 개봉을 앞둔 소감과 영화 속 비하인드 에피소드를 전했다. 그 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

 


 

조선어학회 심부름꾼 홀아비 까막눈 역 맡아 능청·담백 연기
“감독이 나를 두고 시나리오 쓴 건 까막눈처럼 생겼기 때문?”

 

“영화에서 내가 드리는 웃음은 휴게소의 호두과자로 생각했으면”
“‘유해진 헛도는 것 아냐?’라는 말은 안 듣는 게 내 연기의 핵심”

 

▲ 전작 '완벽한 타인'서 가부장적이면서도 까칠한 변호사로 열연을 펼쳤던 유해진이 두 달 만에 ‘수더분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택시운전사> <1987>에 이어 또다시 <말모이>라는 시대극을 택했는데.
▲내게는 시대극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지는 편이다. 내가 그때 사람같기도 하고. 현대물보다 시대극 연기를 할 때 마음이 더 편하다.


-<말모이> 완성작을 극장에서 본 소감은.
▲아직 작품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없다. 스토리를 뻔히 아는 상태에서 봐서 시간이 좀더 흐른 후에 ‘이 영화는 어땠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촬영 현장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감독님, 촬영기사와도 좋았다.

 

“말모이는 떡국 같은 영화”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말모이>는 한 인물의 변화를 통해 한글의 중요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2019년 스크린에 걸리는 첫 영화인데, 순하게 출발하는 것 같아서 좋은 느낌이 들었다. 이번 작품은 떡국같기도, 순두부같기도 한 영화다.
유해진이 연기한 판수는 명문 중학교에 다니는 덕진과 어린 순희 남매를 키우는 홀아비로 까막눈이지만 말은 청산유수인 인물이다.


-극 속에서 아들딸로 나왔던 덕진·순희 남매를 보면 유해진 배우와 닮은 구석도 있는 것 같다.
▲순희(박예나 분)는 귀엽고 예쁜 아이다. 순희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로 목화솜, 솜사탕, 탈지면 등이 있었는데 오늘은 백설기가 생각난다. 아이가 때 묻지 않았으며 수줍음이 많다. 붙임성이 있는 편은 아닌데 외부 사람에게 낯 가리는 딸 같은 느낌이 특히 좋았다. 덕진(조현도 분) 역할을 한 아들도 너무 좋았다. 아역배우들은 연기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쁘고 착하면 더 정이 가는 법이다. 두 아이가 다 얼마나 예의가 바르고 착한지, 나도 모르게 정이 갔다.

 

▲ ‘말모이’는 조선어학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인 <말모이>를 편찬하려 했던 실화를 재료로 한 작품으로, 유해진은 이 영화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홀아비로 살아가지만 의리가 남다른 까막눈 판수 역을 맡았다.    


-윤계상의 인터뷰를 보니 “유해진 선배 때문에 <말모이>에 출연했다”고 하고, “유해진이란 배우의 연기를 보고 많이 배웠다”고 하던데.
▲윤계상이 그런 이야기를 하도 자주 해서 민망할 정도다. 그런데 그 말이 사실이든,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이든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윤계상과는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인데 세월을 잘 묻히고 가는 배우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윤계상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나이가 잘 들어가는 것 같다. 연기에도 깊이가 생긴 것 같다. 사실 내가 가장 안타까워했던 부분이기도 한데, 예전에는 윤계상의 연기에서 약간 겉도는 게 느껴졌다. 자신을 사실적으로 열어 놓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그런데 이제는 연기가 더 깊어졌고, 더욱 반가운 건 술을 잘 마신다는 점이었다. 술 한잔 하면서 자기를 더 열고 이야기도 많이 하고 소통을 하려고 많이 노력하는 게 보였다.


영화 <소수의견> 이후 3년 만에 다시 만나보니 인간적으로나 배우로나 더 좋아지고 있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윤계상은 스스로 불안해하는 타입이다. 주변에서 아무리 연기가 좋다고, 잘했다고 해도 불안해한다. 그런 부분 때문에 연기가 더 발전하는 것 같다. 최근에는 예능 프로그램 촬영을 위해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다고 들었는데 잘한 일인 것 같다.


-윤계상의 귀띔에 따르면 “유해진 배우는 한 장면을 위해서 굉장히 많은 준비를 해온다”고 하던데.
▲모든 장면을 여러 번 찍는 건 아니고 애매한 차이가 있을 때만 그런다. 보통 감독님이 먼저 제안을 하는데, 배우가 먼저 이야기 할 때도 있다. ‘완전히 파란 게 좋아? 희끄무레한 파란 게 좋아?’처럼 차이가 있을 때가 있지 않나. 감정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스러울 때 여러 가지 버전으로 찍기도 한다.

 

 

“엄유나 감독과 스토리 끌려”


-<말모이> 출연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아무래도 엄유나 감독에 대한 믿음이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엄유나 감독과는 영화 <택시운전사>를 함께한 연도 있다. 그런데 엄 감독이 나를 모델로 삼아 시나리오를 썼다며 이번 영화 출연을 제안했다. 그래서 관심있게 읽었는데, 다소 교육적인 스토리였지만 그래도 연기를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엄유나 감독은 <국경의 남쪽> 연출부 출신이다. 한동안 못 보다가 다시 만났는데 <택시운전사> 시나리오를 썼다고 하더라. 정말 놀랐다. <추격자> 때도 스크립터를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정말 뚝심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연’만으로는 영화를 함께할 수 없는 법이다. 이번 영화는 이야기가 참 재미있었다. 까막눈에서 변화하는 판수라는 인물도 재미있었고, 교육적인 면도 있지만 극적인 재미도 커서 작품에 끌렸다.


-엄유나 감독이 유해진 배우를 모델로 삼아 시나리오를 쓴 이유는 알고 있는가.
▲듣자 하니 ‘말맛’을 잘 살릴 것 같은 배우라고 했다더라. 말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나를 떠올린 것 같다. 내가 극 속에서 까막눈이라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 ‘에?’라며 당황스러워하지는 않는다.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지 않나. 아무래도 내가 그렇게 생겼기 때문 아니겠나.


<말모이>는 <택시운전사> 시나리오를 쓴 엄유나 작가의 연출 데뷔작이다.


-<말모이>를 두고 엄유나 감독이 관여한 <택시운전사>와 플롯과 구성이 비슷하다는 지적도 있는데.
▲나 또한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영화가 끝날 때쯤 조선어학회 이야기를 우리가 다시 한 번 떠올릴 수 있게 만든다. <택시운전사>와 구성이 비슷하다는 것은 장점이라기보다 단점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후반부를 두고 ‘신파’라는 평도 있던데.
▲‘신파’라는 개념을 관객들을 울리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바라봤을 때,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장면이나 시도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흘러가고 그 이야기의 흐름상 눈물이 나오는 장면을 신파라고 정의 내리는 것은 애매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반대 개념이 뭘까. 웃기기 위해 만들어진 장면을 ‘구파’라고 부른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영화에서 웃기는 장면이 나왔다고 해서 ‘그 영화 구파야!’라고 폄훼하진 않을 것이다.


물론 이야기와 맥락에 맞지 않게 쥐어짜고 쥐어짜고 해서 관객의 눈물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있지만 이야기가 흘러가다 보니 저절로 눈물이 나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좀더 효과적이라면, ‘신파’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왕의 남자 대본 보며 오열”


-엄유나 감독과 작업을 함께한 소감은.
▲엄 감독은 무엇보다도 듬직함이 있다. 자신을 낮추고 열려 있는 사람이다. 영화를 찍는 동안 나를 잘 받아줬고 내 얘기를 많이 들어줬다. 무엇보다 <타짜> <전우치> 등을 함께한 최영환 촬영 감독과 엄유나 감독의 궁합이 좋았다.


-영화의 손편지 장면에 등장하는 글씨를 직접 썼다고 하던데.
▲내용은 대본에 있는 것이었고 글씨는 직접 썼다. 감정신이고 중요한 장면이라서 미술팀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썼다 지웠다 한 게 고스란히 담겨 있다. 편지를 쓸 때도 그랬는데 그 장면을 찍을 때도 많이 짠했다. 해당 장면은 청계천에 있는 극장에서 찍었는데, 내레이션이 들어갈 동안의 이미지가 많이 떠올라서 눈시울을 붉히며 촬영했다.
영화 속에서 흥얼거리는 노래도 내가 직접 작사·작곡을 했다. ‘노다지를 캐며는 황소를 사고 노다지를 캐며는 술을 사먹자~’ 같은 내용이었는데 시대에 어울릴 법하게 만들었다. 그 장면을 촬영하면서 모두가 배꼽을 잡았다. 그런 걸 어디서 갖고 왔냐며 많이 웃었다.


-윤계상은 유해진의 현장 통찰력에 감탄을 하던데.
▲내가 윤계상보다 이쪽 밥을 오래 먹어 계상이가 그렇게 봤을 수는 있겠지만, 그런 모습을 봤다면 다행인 것 같다. 사실 나도 어떤 의견을 강요하지는 못하고, ‘그럴 것’이라는 추측을 할 뿐이다. 연기를 할 때 실수를 적게 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그것마저 게을리 한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겠는가? 스스로 개인에게 덜 미안하려고 하는 것도 있고,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다행히 지금까지 연기를 하고 있는데 나이가 더 들어서 이때를 얼마나 그리워할까를 많이 생각하게 된다. ‘화양연화’같다고 생각한다. 멀리 지나서 돌이켜본다면 지금을 참 그리워할 것 같다. 그렇기에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영화 속에서 판수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소설을 읽으며 오열을 하는 장면을 보며 관객들이 크게 웃던데.
▲사실 판수가 오열을 터뜨리는 장면을 보면서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그 장면은 판수가 책을 읽느라 밤을 하얗게 새는 설정이었는데, 그런 게 영화 속에서는 제대로 표현되지 않은 것 같아 아쉬웠다.


-영화 속 판수처럼 책을 보면서 오열을 해본 적이 있는지.
▲예전에 <왕의 남자> 시나리오를 보면서 그렇게 운 적이 있다. 그때는 너무 울어서 시나리오를 넘기지도 못할 정도였다.

 

“잘 녹아드는 배우 되고파”


-상당수의 관객들은 ‘유해진’하면 웃기는 연기를 떠올릴 것 같은데.
▲웃기는 연기만 기억해서 그렇지, 나는 코미디 연기만 한 배우는 아니다. 최신작 <완벽한 타인>도 코미디가 아니라 드라마라고 생각하고 연기를 했다. 어떤 목적지까지 가는 여정 속에서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호두과자도 사먹고 창 밖을 구경하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과정을 모두 절제하고 도착지에서만 즐겁자고 하는 건 좀 재미없지 않나? 그래야 나중에 도착지에 가서 여정을 돌아볼 때 추억할 거리가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작품은 코미디인데, 선배님을 보고 썼어요’라고 한다면 난 그 작품을 안할 것 같다. 과하게 웃기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영화가 흘러가는 과정에서 씩 웃게 되는 정도가 좋고, 그런 느낌의 영화를 좋아한다. 나는 지금까지 모든 영화들을 드라마라 생각하고 연기했다. 내가 드리는 웃음은 휴게소의 호두과자 정도로 생각하면 좋겠다.


-그간 보여줬던 것과 다른 캐릭터를 선보여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지는 못했는지.
▲이미 보여줄 것은 다 보여준 것 같다. 내게서 무엇이 더 나오겠나, 그러므로 작품을 할 때마다 작품에 충실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카멜레온도 아니니 나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보다 거북하지 않게 작품에 녹아드는 게 제일 중요하다 생각했다.


이미 대한민국 관객들이 나의 연기를 많이 봐왔고 내 모습에 익숙하지 않겠나. 색다른 모습이라기보다는 ‘이 이야기가 재밌구나’ 하는 게 중요하다. ‘유해진이 헛도는 것 아냐?’라는 말은 안 들으려고 노력했다. 잘 녹아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게 내 연기의 핵심 같다.


솔직히 말해 이제 새로울 건 없는 것 같다. 좋은 선배들, 배우들이 많이 있지만 매일 새로운 걸 보여주는 배우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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