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사회학자 엄기호의 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

“이 따위 세상에서 고통스러워 도무지 못 살겠다고요?”

송경 기자 | 기사입력 2019/01/02 [14:12]

우리 시대 사회학자 엄기호의 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

“이 따위 세상에서 고통스러워 도무지 못 살겠다고요?”

송경 기자 | 입력 : 2019/01/02 [14:12]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을 억눌러 왔다. 고통은 부끄러운 것이고 고통을 말하는 것은 나약한 짓이라고 비난했다. 이 때문에 고통을 겪는 이들은 그것을 감추려고 했지 고통을 드러내며 이에 대한 언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고통을 겪는 이들은 ‘언어 없음’의 상황에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제 고통을 겪는 이들이 고통이 없는 것은 ‘정상 상태’가 아니라고, 고통은 늘 상존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기초 값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고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좋은 전환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모여 우리 사회가 고통을 외면하고 고통을 겪는 이를 억압하거나 사회적 공간에서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고통에 대해 듣고 응답할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잘 다뤄내고 있는 것일까.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사회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자신의 고통을 전시하면서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통을 겪는 이들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그들의 곁을 지키는 이들조차 함께 무너져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 사회 내부의 깊은 속살을 드러내왔던 사회학자 엄기호가 이번에는 켜켜이 쌓여 있는 고통의 지층을 한 겹씩 들여다보면서 발견하고 성찰해나간 우리 시대 고통의 지질학을 보여주는 책을 펴내 주목을 끌고 있다.

 


 

우리 사회는 고통 겪는 이를 억압하거나 사회적 공간에서 제거
‘비참’을 전시하고 관심 끌려는 ‘관종(關種)’들이 활개 치는 세상
사람을 발가벗김으로써 세상을 동물원 만들면서 신상털이 카니발


고통 겪는 이에게 ‘곁’이 존재한다면, 그건 희망의 근거가 되는 법
인간에 대한 혐오 벗어나려면 ‘신중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기술’ 절실

 

▲ 영화 ‘공동정범’에는 자신의 실존적 고통을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는 인물이 등장한다.    

 

남편과의 관계가 어그러진 선아는 집단 상담을 받으면서 흔들리는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 하지만 남편의 사업이 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다잡았던 그의 마음은 무너져버린다. 친정 부모에게조차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그녀는 혼자 끙끙 앓으면서 아이들을 건사하고 일을 하며 일상을 버텨내고 있다.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백혈병 진단을 받은 승우는 사람들이 자신을 문병하러 찾아오는 것이 귀찮으면서도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으면 외롭고 원망스러운 양가감정을 품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돈독한 이였지만, 그럼에도 하필이면 왜 자기에게 이런 시련이 닥쳤는지 알 길이 없다며 절망하고 있다.

 

고통의 지질학


젊은 시절 집안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자식들을 잘 키워냈고 사회 활동도 왕성하게 했던 재희 어머니에게는 일흔을 넘기면서 온갖 노인성 질환이 찾아들었다. 육체적 고통으로 인해 그는 가족에게 하소연과 비난을 반복하고 있다. “너넨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면서 병원을 전전한다.


대학 교수이자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덕룡 아버지는 노년에 사랑하는 아내와의 사별을 겪은 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그들과 이야기 나누는 게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덕룡 아버지는 동생을 통해 접하게 된 신흥종교에 기대 주문을 외우며 자신의 고립감을 떨쳐내고 있다.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당한 준석은 실연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말에서도 상처받았다. 자신을 위로하면서도 문제의 원인이 ‘순진한’ 자신에게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손대기 시작한 것은 식물이었다. 그에게는 말 못하는 식물이 오히려 사람보다 정직하게 느껴졌다.


영화 <공동정범>에 등장하는 이충연의 경우, 자신의 실존적 고통을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는다. 그는 고통의 실존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을 나눈 뒤, 후자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명망가들과 이야기하며 자신이 겪은 참사를 세상에 이야기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그를 차갑게 바라보기도 한다.


대안학교 교사인 태석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자신의 천직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학생들의 질긴 무기력을 깨트릴 수 없었고 자신의 좌절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이것이 결국 ‘신자유주의’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만,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전도사’가 된 태석과 점점 거리를 둔다.

 

▲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타인의 인격과 존엄을 파괴하고 그 비참을 전시하는 것을 통해 관심을 끌려고 하는 ‘관종(關種)’들이 활개 치는 세상이 아닌가.    

 

고통의 언어학


한국 사회 내부의 깊은 속살을 드러내왔던 사회학자 엄기호는 최근 펴낸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나무연필)에서 먼저 고통을 겪는 이들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어찌 보면 우리의 일상에서 종종 접하게 되는, 자극적이랄 것 없는 모습들이다.
“한 번의 고통으로 자기에 대한 앎에 이르고 그 앎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누린다면, 고통은 견딜 만한 것이고 겪어볼 만한 것이 된다. 그러나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고통은 이제 겨우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다시 반복된다.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더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 찾아온다. 그렇게 고통을 통해 도달한 기쁨은 흔적도 없이 무너지며 내가 도달한 앎이 앎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자기에 대한 앎이란 문제를 그런 방식으로 겪는 자기를 알고 자기를 다루는 과정이지 고통의 원인을 알고 제거해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에 대한 앎은 고통의 이유를 원인으로 착각하여 마치 자기를 통제하는 것을 통해 고통의 원인을 없앨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상태에서 고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만 채근하며 원인을 더 키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제거되지 않은 원인은 대개의 경우 더 악화되고 더 감당할 수 없는 형태로 닥쳐온다. 그럴 때 자기에 대한 앎은 무력하게 무너진다.”


엄기호가 묘사하고 드러내는 고통의 풍경은 고통을 겪는 이들의 언어가 어떻게 응답을 기대하지 않고 응답을 할 수 없는지, 그리하여 곁을 파국으로 몰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자신의 고통에 갇힌 이들은 타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운다. 물론 고통을 겪는 이에게는 주문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종교에 ‘주문’이 있는 이유는, 그것이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견디게 하는 ‘방편’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문이 방편을 넘어서서 실체가 되면 ‘곁’은 걷잡을 수 없이 파괴된다. 잠시의 고통을 잊게 해줄지 모르지만 결국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문의 노예가 되게 한다. 고통에 말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방해한다. 극심한 고통을 겪는 이들의 곁을 지키는 이들에게 감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문을 함께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게 만든다.


내면적 언어나 사회적 언어에 기대더라도 고통의 모든 것을 명료하게 말할 순 없다. 고통은 그렇게 하나의 언어로 ‘봉합’되지 않는다. 고통을 겪는 이에게 이는 절망이다. 어떻게 말하더라도 온전히 그것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타인을 이해시킬 수 없다는 사실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것일까.
“고통에 대한 언어는 고통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처절한 자각으로부터 나온다. 말할 수 없기에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하고 분할하게 된다.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도 말할 수 있게 된다. 언어에는 신비로운 힘이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표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그 앞에서 침묵하게 하고 그가 당한 고통의 절대성에 예의를 갖추고 존중하게 한다.”


고통에 찬 사람들은 그 무의미함으로 인해 울부짖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언어의 가능성을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다. 모든 언어가 결국 허무하기에 시도조차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고통을 통해서는 세계의 파국만이 있고 새로운 구축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런 언어의 가능성에 대한 파국적 결론은 ‘주문’의 기만과 짝패를 이룰 뿐이다.


엄기호는 “당사자가 고통을 명료하게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기만을 경계하되 고통을 말할 필요가 없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장벽과도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불가능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능과 대면하고 싸움으로써 이를 기록하고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고통은 절대적이기에 소통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절대성은 보편적이다. 그렇기에 고통은 사람을 나‘만’의 세계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그 절대성이 바로 나‘만’을 나‘만’에게만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한다. 내가 외로운 만큼 너도 외롭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서로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다. 고통 자체는 절대적이라서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지만, 바로 그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이 ‘공통의 것’임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게 된다. 고통의 절대성 자체가 ‘공통의 것’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고통에 관해 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고통의 절대성이 만드는 외로움에 대해, 그 외로움을 마주 대하고 넘어서려고 했던 자신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외로움이 세계를 파괴하고 사람을 고립시켰지만, 바로 그 외로움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외로움은 통하게 된다. 지금 몸부림치는 다른 이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자기의 몸부림에 대해서 말이다. 고통(苦痛)이 고통(孤通)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고통이 외롭다(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서로 교감하고 소통(通)하게 된다.”

 

고통의 사회학


이후 사회학자 엄기호가 살펴보는 지점은 고통의 사회학적 측면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오로지 고통의 비참함에만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그 비참의 전시를 통해서만 사회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잊힌 존재가 되어버린다. 고통을 겪으면서도 존재감이 전혀 없는 유령이 되어 이 사회를 배회하게 된다. 이 유령들이 죽었을 때만 오로지 그 존재를 눈치 채는 잔인한 사회다. 그렇기에 유령이 되지 않으려면 고통의 참담함과 비참함을 강조하고 전시해야 한다. 고통을 당하고서 그것을 보여주는 사람으로서만 겨우 사회적으로 가시화될 수 있다. 이게 이 사회의 정치이자 경제가 되었다.


더구나 이것이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 더욱 불길하다. 사회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자기의 고통을 전시하며 주문을 외우는 동안 곁은 빠르게 파괴된다. 대신 고통의 곁에 선 이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가만히 있어주기를 기대한다. 심지어 이것은 “비를 맞는 이에게 가장 좋은 사람은 같이 비를 맞는 사람”이라는 말로 윤리화되고 미학화되어 있다.


이런 미학과 윤리학에서 그 곁에 선 이는 그저 ‘현존’하는 존재여야 한다. 현존이란 그저 눈앞에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응답을 기대하지 않는 말을 들어야 하고, 응답을 기대하지 않고 응답해야 한다. 고통을 겪는 이가 고통을 전시하는 것을 통해 겨우 유령을 면하고 그나마 사회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그 곁에 선 이는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그저 유령으로만 존재해야 한다. 현존은 기쁨이 아니라 고통이 된다. 이렇게 곁에 현존을 강요함으로써 ‘아직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음’에서 ‘모든 것이 끝장남’이라는 파국을 맞이한다.


이 파국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사회’라는 말로 기대했던 것은 반대였다. 고통을 겪는 이를 지원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그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고통의 곁에 선 이가 감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만약 버틸 수 없을 때 안전하게 물러날 수 있어야 한다. 물러남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지 않도록 고통을 겪는 이를 돌볼 수 있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 곁에 선 이가 ‘독박’을 쓰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의 삶이 파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게 사회의 역할이다.


그러나 지금 사회는 어떠한가. 타인의 인격과 존엄을 파괴하고 그 비참을 전시하는 것을 통해 관심을 끌려고 하는 ‘관종(關種)’들이 활개 치는 세상이 아닌가. 이들이 사람들을 발가벗김으로써 세상을 동물원으로 만들면서 신상털이 카니발을 벌이는 시대가 아닌가. 이런 일을 더해질수록 관종들의 명망은 더더욱 올라가고, 심지어 피해자조차 관종으로 만드는 선정적 플랫폼이 일상으로 자리 잡은 사회가 아닌가.


엄기호는 이를 로마 시대의 콜로세움에 빗대어 설명한다. 한편에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끌고 와 사자 밥이 되게 하는 노예 상인, 즉 관종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비참과 고통을 밀쳐내며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는 검투사, 즉 고통을 겪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를 관람하는 관객들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콜로세움을 유지하고 지속시키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팝콘을 들고 와 가장 안전한 자리에서 이 모든 것을 구경하고 소비한다. 때로는 값싼 동정을 보내지만, 이들의 관심은 곧 새로운 구경거리로 넘어간다. 이 시대의 공론장은 해상도 높은 언어를 통해 세상을 좀더 세밀하게 읽고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뒤바뀌어버린 것이다.


이 콜로세움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혐오다. 모두가 모두를 혐오하는 이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 길은 하나밖에 없다. 콜로세움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관종의 먹이가 되지 않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객석에 있으면서 고통의 당사자들이 펼치는 참혹함을 소비하지 않기 위해,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과 인간에 대한 연민을 지키기 위해 ‘사라짐’을 택하는 것이다.

 

고통의 윤리학


엄기호가 마지막으로 짚어보는 지점은 이러한 사회에서 고통을 어떻게 다뤄내야 할지의 윤리적 문제다. 이때 그가 주목하는 것은 고통을 겪는 당사자가 아니라 그들의 옆에 있는 고통의 ‘곁’이다. 이상적으로 말한다면 곁의 역할은 고통을 겪는 이가 자기 고통에서 빠져나와 그 곁에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고통을 겪는 이는 대체로 바깥은 붕괴하고 자기에게 함몰되어 있는 상태다. 이러한 당사자에게 필요한 것은 고통을 매개하는 간극과 시야다. 지금 당장 자신의 고통을 타인과 소통하겠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야가 생긴다. 또한 자신의 고통을 말할 수 없다는 그 외로움을 통해서 비로소 타인과 소통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고통을 겪는 이에게 곁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희망의 근거가 된다. 이 곁의 존재를 보며 고통을 겪는 이는 드문드문 주문에서 벗어나 자기에게 돌아갈 자리가 있고 그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비록 그것이 산발적인 찰나일지라도 말이다. 일이 잘 진행된다면 곁이라는 존재를 통해 자기가 그 함몰된 구덩이에서 나와 스스로 자기의 곁에 설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전시하고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곁이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곁의 현존을 착취하고 소비하지 말아야 한다. 고통의 곁이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아니라 바로 고통에 관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자리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언어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고 또 만들어지는 곳이 바로 이 자리다. 또한 고통이 머무는 ‘그라운드 제로’의 자리 옆에 있는 고통의 곁에게도 또 다른 곁이 필요하다. 그럴 때 고통의 곁에 있는 이는 고통받는 이의 옆에서 기약 없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엄기호가 묻는 지점은 고통의 콜로세움이 펼쳐지는 세상에서 그것을 드러내는 윤리적 방법에 대한 것이다. 굳건한 콜로세움의 메커니즘을 경계하며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 그렇게 사라져버리는 것은 과연 정당한지 되묻는 것이다. 엄기호는 타인의 주목을 끌기 위한 경쟁과 인간에 대한 혐오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사라짐의 기술’을 대체해야 할 것은 세상을 보좌하기 위해 ‘신중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기술’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지극히 개인적일 수도 있는 ‘고통’의 문제가 사회 속에서 고민되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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