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중스님 증언/세상을 발칵 뒤집은 사건 비하인드

군형무소장도 반한 사형수 이야기 "군인 아들 총살 당하는 날 아버지도 세상 뜨다"

글/김성애(자유기고가) | 기사입력 2018/08/21 [12:07]

삼중스님 증언/세상을 발칵 뒤집은 사건 비하인드

군형무소장도 반한 사형수 이야기 "군인 아들 총살 당하는 날 아버지도 세상 뜨다"

글/김성애(자유기고가) | 입력 : 2018/08/21 [12:07]


2010년도 OECD 국가 중에서 국제 자살률 순위가 불명예스럽게도 1위라는 자리를 대한민국은 차지했다. 2010년도 전체 사망에 따른 원인 중 자살 사망자는 무려 1만5566명(전체 사망률의 31.2%)으로 33분마다 1명꼴이라는 사실에 경악했다. 하루에도 42.6명씩이나 자살하는 근본원인을 찾아내는 최근 5년간 학술 연구에서 원인분석을 한 바에 의하면 지역적으로 특이한 분단국가라는 꼬리표는 절대로 빠질 수 없었다.


군 사건사고 ‘분단국가 때문’ 꼬리표 빠지지 않아

군대문화, 관행적으로 배어 있는 폐습들 대물림

▲ 삼중 스님.     © (주)펜그리고자유

매년 군인들이 70~80명씩이나 자살하는 수치는 5일 간격으로 1명꼴이라는 사실에 부모들은 걱정근심으로 밤잠을 설쳤다. 더욱 세분화하여 신분별로 파악해보면 장교 32명(9.2%), 준·부사관 72명(20.7%), 병 235명(67.5%), 군무원 9명(2.6%) 등으로 분석되었다. 군대 내에서 상습적으로 자행되어 온 기수열외, 구타, 욕설 등의 직간접적인 가혹행위들이 근본적인 자살원인을 제공했다. 어쩔 수 없는 분단국가라는 배경에서 종합적인 군대문화의 병영 폐습들이 자살률에 한몫했다는 학계의 발표는 신빙성을 더했다. 그러나 국방부는 ‘복무 부적응’으로 단지 장병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함으로서 관행에서 깨어 나오지 못하는 실정은 여전했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군대에 자식을 보낸 부모들은 뉴스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건사고들에 가슴을 졸였다. 이미 군대에 아들을 보낸 부모들이나 군 입대를 앞둔 부모들이 가슴 철렁 내려앉는 사건들은 군부대에서 연이어 터져 나왔다. 피 끓는 젊은 청년들이 자유를 박탈당한 채 강제성이 다분한 집단생활에서 총기난사 사건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부담감은 커져만갔다. 사건사고가 터져 나올 때마다 부모들은 자식이 소속된 군부대인지를 확인하면서 다시 한 번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다. 2010년도 전방지역에서 발생한 어처구니없는 총기난사로 아까운 자식들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기억이 생생한 가운데 2011년도에도 어김없이 6월과 12월에 총기사건들은 이어졌다. 분단국가라는 지역적인 특성에서 관행적으로 배어 있는 폐습들이 변함없이 대물림되면서 일부 지휘관들이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장병 인권에 대한 경시 풍토가 사라지는 날을 기대해보았다.

 

군대에서 왕따! 죽겠다!

학창시절에 수재 끼를 발휘하면서 무한정한 효도를 베풀었던 외아들이 군 입대를 하면서부터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를 날 없었다. 훈련소에서 배정받은 부대 내에서 왕따를 당하다면서 아들은 하루에 한 번씩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댔다. 그 옛날이라면 언감생시 꿈에서라도 허용되지 않은 공중전화의 자유로운 상용화가 어머니의 애간장을 타들어가게 했다. 전화 건너편에서 울부짖는 아들의 목소리에 어머니는 졸도해 버렸다. 상사들로부터 구타와 왕따를 당한다면서 죽어버리겠다는 울부짖음에 어머니를 대전 군부대까지 미친 듯이 달려갔다. 차 안에서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아들이 자살하지 않을까 노심초사 달려가기를 수십 번이었다. 미국에서도 명문대로 손꼽히는 시카코 대학교를 휴학한 후 군 입대를 한 대가로 부대 안에서는 ‘시카코’라는 별명으로 상사와 동료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야! 시카코! 너 영어 잘한다면서 좀 씨불여 봐라!”

부대 내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장병들이 대다수였던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유학생 한 명을 재미 삼아 구석으로 내모는 데 열을 올렸다. 아예 사라져버린 자신의 이름은 물론 자존심마저 뭉개버려야 하는 모멸감에 울부짖는 아들의 절규는 부모의 가슴을 발기발기 찢어 놓기에 충분했다. 어떡해서든지 아들을 다른 부대로 보내고자 연줄을 헤매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하소연했다. 인맥의 끈이 짧았던지 자식을 살리기 위한 방책으로 부대 상사들의 집까지 찾아다니면서 아들을 대신해서 어머니는 울부짖었다. 20년 살이 인생에서 가장 치욕스런 모멸감으로 곤두박질치기 바로 직전에 남의 나라 전쟁터가 한 젊은이를 살리게 했다. 때마침 이라크 장병 지원정책에서 기회를 잡은 유학생 군인은 통역사라는 직분으로 이라크 전쟁터로 피신하면서 사건사고는 겨우 일단락 시킬 수 있었다.

젊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한 극한적인 상황에서 전혀 뒷감당을 염두에 두지 않은 젊은 피들은 섬뜩한 사건을 저지르곤 했다. 2011년 12월 전남 고흥군에 위치한 육군부대에서 부대 내 가혹행위를 암시하는 유서를 남겨 놓은 상병은 자신의 K2 소총으로 얼굴을 쏴버렸다. 병원으로 옮겼으나 현재까지 중태라는 뉴스를 들으면서 삼중 스님은 자신이 만났던 자식을 잃어버린 절절한 부모의 얼굴들을 떠올렸다.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서울대학교를 다니던 아들이 군대에서 총기를 난사하여 사형수로 전략해 버린 사건에서 새파랗게 죽어가는 어머니의 피눈물들은 굳어졌다. 20살 젊은 나이에 남편 없이 콩나물 장사를 하면서 바르게 성장하는 외아들 하나만 바라보면서 사는 어머니의 인생은 아들이 전부였다. 비록 시장 바닥에서 콩나물 장사를 하지만 서울대를 다니는 아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생도 달기만 했다. 여느 재벌가도 부럽지 않을 만큼 전 우주를 손안에 넣은 듯이 부지런히 아들의 학비를 벌었다. 아들 역시나 어머니의 고생을 하루빨리 보답하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했다. 외롭게 살아온 대학생 아들은 아주 순수하게 사랑을 키우던 중에 군 입대를 하게 되었다.

그 옛날 60년 70년대 군 문화는 그야말로 엉망인 시절이었다. 홀어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란 서울대생은 첫사랑에게 자신의 전부를 걸 만큼이나 푹 빠져 있었다. 사랑하는 애인에게서 온 편지마다 뜯어보면서 상사는 진한 편지의 내용을 공개적으로 까발리면서 자존심을 뭉개버렸다. 수신자가 자신의 부하라는 명목 하에 편지를 뜯어보는 재미에 삶을 살아가는 상사의 행동에 서울대생은 상부기관에 진정서를 내고 말았다. 감찰기관에서는 상사를 정식 조서로 훈방조치와 체형을 취했지만 사건은 더 부풀어졌다. 진정서를 제출한 신원이 새어나갔던지 상사는 공개적으로 서울대생을 원수 보듯 짐승 취급을 했다. 참고 또 참아내려 했지만 동료들 앞에서 발가벗겨 놓고서는 개 패듯이 구타당하는 수치감에서 서울대생은 이성을 잃어 버렸다. 나락으로 떨어진 모멸감을 감내할 수 없던 서울대생은 상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아무리 상사가 죽을 짓을 했어도 이성을 잃은 상황에서 총기난사를 한 장본인 자신도 자결하려 했다. 그렇지만 총알이 소맷자락만 스쳤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군법회의에서는 사건의 원인 제공을 상사가 제공했을지라도 군 형법상 선택 여지가 없는 총살형으로 마무리 지었다.

매주 편지를 보내던 아들에게서 몇 주가 지나도 편지 한통이 없자 어머니는 군부대를 찾아갔다. 비극적인 사건의 배경을 처음부터 알고 있던 군 동료는 안타까운 심정에서 극비 사항을 어머니에게 발설했다. 착하디착한 아들이 총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말에 어머니는 자지러지면서 믿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한 번도 아니 반 번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어머니는 묻고 다시 물었다.

 

“시카코! 너 영어 잘한다면서 좀 씨부려 봐!” 왕따

서울대생, 발가벗겨 놓고 개 패듯이 구타당하기도

 

“우리 영호는 절대로 그럴 애가 아닌데요. 그럴 리가 없지! 다른 사람을 착각해서 우리 아들한테 덮어씌우려 하는 거죠! 홀로 자라면서 절대 남한테 욕 한 번도 하지 않은 내 아들인데 거짓말하지 마시오.”

아들 하나 보면서 한평생을 살아왔던 어머니는 가슴팍을 열어보이면서까지 자식을 두둔했다. 군대가 애지중지 순한 아들을 버려놓았다면서 어머니는 미친 듯이 통곡했다. 어머니의 통곡소리가 기자들에게 노출되면서 전국 뉴스에서는 크게 다루었다. 콩나물 장사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서울대생이 군대에서 사형수로 전락했다는 사연에 사람들은 남의 일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동창을 위해 서울대 학생들을 시작으로 탄원서는 줄줄이 제출했다. 서울대 졸업생 수만 명, 더불어 사회 각계각층에서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수십만 명에 해당하는 탄원서들이 높이 쌓여만 갈 뿐 단 한 사람에게 예외적인 특혜를 줄 리 만무했다.

“어머니의 건강이 걱정스럽습니다. 못난 자식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다 받치시면서 사셨습니다. 고마운 어머님의 뜻에 보답하지 못한 채 사형수로 죽는 이 죄 많은 자식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나를 위해 애써 준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내가 저지른 무서운 죄 값을 달게 받아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땅에 민주적인 군대로 자리 잡아서 나 같은 사형수가 다시는 나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 죽음을 통해서 더 이상 비극이 이 땅에서 사라지길 마지막 유언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신문과 뉴스에서는 사건이 종료되는 집행 일정은 대단한 관심거리였다. 총살형으로 비극의 주인공이 떠났다는 뉴스에 주인공과 어머니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수많은 서울대생들은 대포 집에서는 막걸리에 흠뻑 취했다. 개판 오 분 전인 폐습적인 군대 내 관행들을 잘근잘근 안주삼아 씹어대면서 그 시절 유행가로 잘나가던 ‘마포종점’을 목청껏 불렀다.

“영호야~ 영호야~”

밤새도록 애절하게 아들을 부르는 어머니의 한 맺힌 목소리를 마포 나루터에 사는 주민들은 기억했다. 다음 날 새벽 가지런히 낡은 신발 두 짝을 벗어놓은 채 어머니는 한강물에 투신했다는 뉴스에 다시 한 번 전 국민은 눈시울을 적셨다.

 

전·현직 군형무소장의 부탁

군 형무소에서 법문을 막 끝내고 나온 삼중 스님을 소장실에서 맞이하는 육군 형무소장은 간곡한 부탁 하나를 했다.

“우리 형무소에 사형수 한 명이 있는데 스님께서 한번 만나주시면 좋겠는데요.”

대령 직급인 소장은 일부러 법문을 군 형무소에 요청할 정도로 자신의 관할 형무소에 있는 사형수에게 반해 있었다. 일반 형무소이든 군 형무소이든지 간에 사연이 깊은 사형수를 만나기만 하면 애틋한 마음에서 힘든 일만 생긴다는 경험에서 삼중 스님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보나마나 형무소장까지 반한 사형수라면 억울한 사연들로 도배했을 게 분명한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없다는 판단 하에서 뒷걸음쳤다. 더불어 억울한 사형수에게 삼중 스님 자신마저 반하는 마음을 만들지 않겠다는 각오로 거절하면서도 가슴은 시려왔다. ‘얼마나 억울한 사형수였으면 저리 소장까지 나설 수 있나?’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반해버린 사형수의 사연을 털어 놓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삼중 스님은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그런데 몇 주 후에 삼중 스님에게 이름이 생소한 헌병대령이 보낸 편지 한통이 배달되었다. 삼중 스님은 참으로 인간적인 냄새가 풍기는 아름다운 편지 내용에 감동했다. 삼중 스님이 법문했던 육군 형무소에서 바로 전임 소장으로 재직했다는 자신의 소개를 서두에 밝혔다. 현재는 다른 부대에 소속되어 있는 헌병대령으로 삼중 스님이 육군 형무소에서 법문을 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는 배경까지도 밝혔다. 현직에 있는 형무소장도 만나주기를 권했던 같은 사형수에 대한 사연인 즉은 억울한 사연에서 사형수가 되었으니 인간적으로 꼭 살리고 싶다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신분을 밝히는 까닭은 소속된 현직대령으로서 적극적으로 구명운동에 나설 수 없는 위치에서 삼중 스님이 대신해서 구명운동을 나서달라는 부탁이었다. 우발적으로 상황이 전개되면서 총기난사 사건은 발생했지만 인간이 된 면면에 반하여 무례하게 삼중 스님에게 부탁드린다 했다. 여러 억울한 사형수들의 목숨을 삼중 스님이 살려 내셨다는 현실에서 이런 부탁을 부족한 글로나마 올렸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이 군 형무소의 소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그 사형수에게 반해버려 이런 젊은이는 반드시 살려 내야한다는 각오로 손을 써보았지만 무산되었다는 사정까지도 자세히 설명했다. 삼중 스님은 한 생명에 대해 헌병대령이 걱정하는 마음이 참으로 멋져보였다.

현직 소장에 이어 전직 소장 모두가 힘을 합쳐서 군인 사형수를 살리고 싶다는 사연에는 억울한 사고였다는 게 눈에 그려졌다. 그렇지만 제아무리 여러 명의 사형수들을 살려낸 삼중 스님일지라도 특수한 군 형무소를 절대로 뚫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상 군 형무소에서 사형으로 실형을 내려졌다면 총기사고일 게 분명했다. 총기를 소지한 싸움인지라 방아쇠를 당기는 사건을 처벌하는 군 형무소의 특수한 환경에서는 삼중 스님은 마음만 움직일 뿐 구명운동은 꿈을 꿀 수 없었다.

헌병대장의 편지가 삼중 스님에게 보냈다는 소식이 사형수에게 전달되었던지 삼중 스님을 만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은 사형수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엄청 컸던 모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법문을 하는 장소까지 중년 남자 한 분이 삼중 스님을 찾아왔다. 찾아온 이유를 들어보니 바로 최 일병의 아버지였다. 대부분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어머니가 죽기 살기 식으로 매달리는데 이번에는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매달렸다. 비록 삼중 스님이 아들을 만나지 않는 상황에서도 지푸라기라도 잡을 요량으로 찾은 발걸음이었다. 형무소 내부에서는 어찌 잘못된 바람들이 날렸던지 억울한 사형수는 삼중 스님에게 매달리기만 하면 살아날 수 있다는 난감한 소문들로 난처한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니 순진한 아버지는 삼중 스님을 쳐다보면서 제발 자식 놈을 위해 구명운동에 나서달라는 애절한 눈초리에 눈물을 가득 담아냈다.

“애처로우니 생각해 보겠습니다.”

삼중 스님은 그렇게 밖에 말할 도리가 없었다. 자식의 생명 앞에서 저리 피눈물을 흘리는 아버지를 차마 내칠 수는 없었다. 몇 달이 지난 후 아버지는 다시 삼중 스님을 찾아와서는 매달렸다.

“제가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군에 관련된 사건은 제 힘으로는 힘듭니다. 헌병대장에게서 편지를 받은 적이 있지만 어렵습니다. 제 힘으로는 도와드릴 수 없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삼중 스님은 아버지에게 더 이상 기대하지 못하도록 대못을 밖아 버렸다. 사실상 군 형법상 사형수를 살려내기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어떤 기대치도 주지 않는 것이 사형수와 가족에게 더 편안한 마무리를 시키는 게 낮다는 생각에서였다. 상사를 총살한 사건들은 군 형법상 확고한 질서를 지켜내려는 의지에서 아무리 억울한 사연이 깔려있더라도 절대로 허용치를 남겨 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능한 일이 있고 가능하지 않는 일이 있는데요, 이제는 아버님께서 준비를 하시지요.”

“어떻게 준비를 하면 되나요. 스님!”

아버지는 마무리 준비를 하라는 말을 듣자마자 잔뜩 기대했던 마음이 폭삭 무너져 내렸는지 황망한 눈에서는 눈물만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글세, 포기할 것은 포기하셔야 됩니다.”

삼중 스님은 쓰라린 가슴팍에 사정없이 굵은 소금을 뿌려버렸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최선책이라는 생각에서 행동하는 삼중 스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신도 한 사람은 불쑥 옆에서 끼어들었다.

“바쁜 스님한테 그런 문제를 가지고 와서 곤란하게 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시는 게 아녜요!”

“아비 마음이라 이럽니다. 압니다. 저도 아들 놈 목숨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스님! 딱 한 가지만 가르쳐 주세요. 언제쯤이나 아들애가 총살당하는지 알려주세요.”

덜덜 떨리는 손을 합장하는 아버지는 집행일에 목을 매었다. 교도소네 주요 요직에 있는 소장과 보직 교도관들만이 상부로부터 집행일 하루 전에 직접 통보받는 관례로 일반 교도관들조차도 당일에나 알 수 있는 현실이었다. 그러니 삼중 스님은 종교 담당 교화위원으로서 언제 집행당하는지는 사전에 알 수 없었다.

“극비리에 하는 집행일은 내부 일반 교무관 들도 당일 아침에나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저야 외부인 신분으로 집행 일자를 사전에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르신이 집행일을 사전에 아시면 뭐가 도움이 되시는지요?”

아버지가 쏟아내는 눈물 앞에서 삼중 스님은 안타까운 궁금증이 일었다.

“내일 내 아들이 집행 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 오늘 내가 먼저 자결하려 합니다. 누구보다도 착한 놈이었는데 그 놈 죽는 순간까지 제가 버틸 수 없어서 그럽니다. 우리 애 죽는 꼴을 두 눈 뜬세상에서 볼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자식 앞에 제가 가려 합니다.”

삼중 스님은 군인 사형수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에 감동해 버렸다. 저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 역시나 순진무구한 마음을 가진 젊은이라는 생각에 아버지의 두 손을 꽉 잡아주었다. 인간적으로 애닮은 사연을 못 본 척한 삼중 스님은 아버지의 마음을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뒤 삼중 스님은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지만 아마도 아들의 집행에 뒤이어 떠나갔을 것이라는 생각에 젖었다.

사형제도는 본인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의 문제들이 빼곡히 남아있다. 행위를 처벌하는 사형제도는 행위자를 다시는 교화할 필요성이 없다는 판단 하에 국가가 개인의 생명을 포기시키는 행위라고 말 할 수 있다. 전혀 가능성 없기 때문에 행위자를 우리 조직에서 도태시키는 제도이지만 그 서울대생 어머니, 그리고 최 일병의 아버지는 제도 밖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얼마나 성실히 일평생을 산 부모들은 아들이 총살을 당하는 날 이 세상을 떠났다. 사실상의 범인은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를 뜯어본 상사이거나 정신병자처럼 부하 직원을 갈구는 상사인 셈이었다. 총기사건을 정당화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그리 빨리 총살형을 시킴으로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생명까지 뺏어야 하느냐에 초점을 맞췄다. 지금도 이런 사건과 비슷한 일화가 있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사형집행제도를 미루고 있는 현 정부에게 다시 한 번 폐지운동을 권장하고자 삼중 스님은 합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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