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중스님 증언/세상을 발칵 뒤집은 사건 비하인드

88시간 인질극 ‘김희로 사건’ 전말 “김희로 풀려나지 않으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글/김성애(자유기고가) | 기사입력 2018/08/27 [11:32]

삼중스님 증언/세상을 발칵 뒤집은 사건 비하인드

88시간 인질극 ‘김희로 사건’ 전말 “김희로 풀려나지 않으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글/김성애(자유기고가) | 입력 : 2018/08/27 [11:32]

부산공항에서는 출국장을 정신없이 빠져나가는 사람에게 부산일보 사회부 부장은 머리까지 조아리는 것도 부족했던지 두 손으로 싹싹 빌기까지 했다. 이런 진풍경을 쳐다보느라 힐긋거리는 주변 시선들을 아랑곳하지 않은 신사는 붉으락푸르락 얼굴빛이 달라졌다. 간곡히 용서를 바라는 사람을 확 밀쳐내면서 내지르는 고함은 이미 이성의 한계선을 넘어선 상태였다. “만약에 너 때문에 김희로가 풀려나지 않는다면, 넌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일본의 백과사전에는 유독 한국인 ‘안중근’과 ‘김희로’라는 두 인물의 이름만이 적혀 있었다.



‘김희로’라는 반사회적 영웅 일본인 뇌리에 박혀

“언젠가 아드님 손잡고 조국 품으로 가겠습니다”

▲ 한국에 귀국했던 김희로.     ©(주)펜그리고자유

근세 들어서 더욱 유명한(?) 인물로는 ‘안중근’보다는 ‘김희로’라는 반사회적 영웅이 일본인들의 뇌리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68년 일본열도에서 조선인 한 명이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장본인으로 한·일 양국에서는 제각기 다른 시각에서 김희로를 기억했다. 부당한 민족차별을 배경 삼아 일본 야쿠자 두목 2명을 총으로 난사한 후 무려 88시간이나 인질극을 벌인 끝에 구속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김희로’ 라는 이름 석 자가 텔레비전 생중계로 튀어나오는 순간부터 30년이 넘는 세월은 흘러갔지만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도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구명운동은 통하지 않았다.

발설하는 순간 비밀은 없다!

삼중 스님 역시나 김희로에 대한 이름 석 자만 기억할 뿐 지인의 도움으로 겨우 비행기 표 값을 얻어서는 일본을 기웃거리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982년부터 십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의 어머니가 있는 양로원을 15번이나 왕래하는 끝에 마지막 떠나는 장례식장까지 찾아가서는 관 앞에서 삼중 스님은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제가 오늘까지 어머님을 16번째 찾아뵙니다. 어머님을 처음 뵙는 순간 아드님을 석방시키겠다는 약속을 오늘까지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아드님의 손을 잡고 조국의 품으로 꼭 데리고 가겠습니다.”

입으로 내뱉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죽기 살기 식으로 여러 경로를 통해 구명운동을 쑤셔보았지만 물거품일 뿐이었다. 이런 와중에 얽혀 있던 실타래는 정해창 전 법무부 장관이 풀어내주었다. 현직에 있는 일본 법무대신과는 인연이 있다면서 삼중 스님에게 김희로와의 특별접견을 주선해 주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인으로서는 일본 형무소 출입을 시키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생각할 수 없었던 특혜인 셈이었다. 한 달에 한 번 면회실에서 삼중 스님과 김희로의 면담 내용들이 소상히 기록되면서 동시에 일본 법무성은 고민에 빠졌다. 삼중 스님이 양로원과 형무소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어머니와 아들의 애달픈 사랑을 전달하는 발길을 눈여겨보면서 일본 법무성은 골칫덩어리를 풀어내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아마도 시기적으로 잘 맞아떨어졌다는 전제를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법무성의 실세들은 삼중 스님을 점심식사에 초대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법무성을 대변하는 최고 책임자인 담당과장은 김희로의 교화에 많은 도움을 주는 삼중 스님에게 고마움을 전달했다. 사실상 일본에서는 의례적으로 10년을 복역한 무기수는 가석방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한국인 김희로만은 예외적인 대우를 받았다. 1968년부터 32년 동안 사회적인 불안감을 발산하면서 심지어 형무소 감방에서 시위하는 통에 김희로는 한마디로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어느 구석에다 초점이 맞춰졌는지 일본 법무성은 공식적인 조건들을 삼중 스님에게 극비리에 조율했다. 이상하게도 대한민국 대사관을 통하는 공식경로를 택하지 않았다. 그 바탕에는 김희로만이 피워댈 수 있는 지독스런 똥고집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어머니 이외에는 어느 누구의 말도 신임하지 않았던 김희로가 삼중 스님을 대하는 태도가 달리 보였기에 어렵게 내린 결정인 듯했다. 또한 시기적으로 두목을 사살 당한 야쿠자 조직에서는 김희로의 목숨을 32년 동안 호시탐탐 노리는 문젯거리 때문에 형무소 당국은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이런 위험 속에서도 형무소의 준칙이란 준칙은 하나도 지키지 않는 것은 물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김희로는 처지 곤란한 사고뭉치였다. 더군다나 감방 벽에 태극기를 버젓이 달아 놓으면서 지내는 통에 아예 살아있는 시한폭탄이라는 비유가 가장 적절했다. 어느 측면에서 해석하자면 일본 법무성이 32년 동안 껴안고 있던 무거운 짐을 삼중 스님에게 떠넘기는 꼴이었다.

김희로가 펼친 감방생활의 급수를 가석방 조건인 4급에서 2급으로 끌어올리는 조정 작업은 교도소측에서 도맡았다. 더군다나 가석방 때의 출구를 선택하는 신중한 작업은 그야말로 007 작전이라도 하듯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야밤을 이용하여 구마모도 교도소에서 도쿄에 있는 후쯔오 교도소로 이송하는 절차는 당사자 김희로에게도 알리지 않은 상태에서 속행되었다. 마지막으로 한국행 항공기를 태우기 위한 공항 선정까지도 야쿠자 조직이 절대로 끼어들 수 없도록 극비리에 조치했다. 주도면밀한 일본 법무성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교도소측과는 달리 삼중 스님의 동선에서 평상시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는지 기자들은 계속 삼중 스님을 따라다녔다. 워낙 촉수가 발달한 기자의 근성이 흥분 속에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삼중 스님 주변을 맴돌았다. 교도소장과 만나는 자리에서 교도소 담장 밖에서 서성거리던 MBC 방송 촬영팀들이 발각되었다는 보고에 삼중 스님의 흥분한 간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것으로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것인가?’라는 생각만으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나 이미 일본 법무성에서는 결정을 내렸다는 듯이 교도소장은 침착한 목소리로 삼중 스님에게 최종 통보를 했다.

“지금으로부터 10일 후 OO일, 9시 정각에 한국행 일본항공기 OOO편으로 출발합니다. 그러니 김희로의 항공기 운임을 지불해 주십시오. 일본에서 추방과 동시에 김희로는 반드시 한국국적을 취득해야 합니다. 이런 사실이 누설되는 순간 가석방은 취소됩니다. 그러니 철저한 보안 속에서 진행시켜 주십시오.”

삼중 스님은 살면서 이 순간만큼이나 행복했던 순간은 없을 정도로 마냥 떠다녔다. 이런 꿀맛이 그동안 10여 년간 기울였던 모든 노력에 대한 보답이라는 생각에 젖어서 너무나도 달콤했다. 더욱이 김희로를 위해 지불했던 항공 운임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값어치 있게 사용한 돈이었다. 교도소장에게 항공료까지 지불한 마당에 이미 일은 성사된 셈이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10여 년 동안 그리도 꿈꾸었던 막연한 영상이 무지개 찬란한 하늘이 아니라 눈앞에서 둥실둥실 떠다녔다. 일본 형무소에서 32년 동안 갇혀 있던 김희로의 손을 꼭 부여잡고서는 고국 땅으로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형연할 수 없는 기쁨에 온몸이 떨려왔다. 교도소장은 자신을 비롯하여 법무부 장관 그리고 삼중 스님, 오직 세 사람만이 알고 있으니 한국 땅을 도착하는 순간까지 극비로 해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만약이라도 사전에 비밀이 새어나가는 순간 교도소 정문 앞에서나 공항에서 야쿠자들에 의해서 살상극이 일어날 수 있다는 배경을 강조하면서 거듭 당부했다.

삼중 스님은 부산에 도착해서도 주체할 수 없는 흥분으로 어린아이들이나 읽어야 하는 동화책을 생각해 냈다. 산중에 들어가서라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요!’라고 마음껏 외치고 싶었다. 근질근질하는 입을 주체하지 못할 판인데 아주 절친하게 지내는 부산일보 사회부 부장이 저녁식사를 하자는 전화를 했다. 기자 신분으로 형무소에 잡혀 있을 때 삼중 스님이 면회를 와주었다는 고마움을 잊지 못하는 사회부장은 참 좋은 지인이었다. 그러니 기자라는 신분을 떠나서 삼중 스님과는 친 형제 이상으로 잘 지냈다. 가장 좋아하고 믿을 만한 사람과 함께 김희로의 가석방에 대한 이야기를 풀면서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물론 가석방되어서 나오는 날까지 절대로 기사화하지 않겠다는 약조 끝에 말이 입밖으로 새어나가는 순간 이미 비밀은 아니었다.

“스님! 어쩌다 그런 큰 실수를 하셨어요. 일본 법무성에서 긴급회의에 들어갔다 하네요. 석방이 불투명해질 것 같습니다.”

한순간에 대한민국 대사관까지도 난장판이 되었던지 담당국장은 삼중 스님에게 하소연했다.

“스님이 서울로 가신다기에 기사를 터뜨리러 가는 줄 알고, 내가 먼저 특종을 잡으려는 욕심에서….”

“너 이 새끼! 그 늙은이가 형무소에서 못나오기라도 하면 너 어떡할래? 만약에 너 때문에 풀려나지 못한다면, 넌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꽝하는 천둥소리가 귀 고막에서 터져버리는 동시에 삼중 스님 입에서는 괴상한 말들이 쏟아졌다. 삼중 스님에게 양복을 입고 오라는 일본 법무성의 지시고 뭐고 다 터져서 난리 통이라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 개망신을 당하면서도 김희로라는 인물은 목숨을 걸 만큼 분명한 가치가 있다는 마음에서 행동에 돌입했다.

믿어서는 안 되는 부류들

가석방으로 나오는 날에 기사화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린 기자의 근성이란 참 믿을 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김희로에 대한 기사를 줄창 써왔던 연합신문의 종교담당 기자를 통해서 커다랗게 1면을 장식해 버렸다. 연합뉴스에서는 곧바로 받아서 외신부로 터뜨리니 일본 외무성과 한국 법무부는 벌컥 뒤집혔다. 비행기 편명까지 밝혀 낸 기막힌 기사내용을 보자마자 일본 법무성을 출입하는 기자들은 법무대신에게 따져들었다.

“김희로가 일본 형무소에 있습니까? 한국 형무소에 있습니까? 이런 가석방 정보가 어떻게 외신으로 돌아서 들어온 경유부터 밝혀주십시오. 자국 내에서 세계적인 특종을 빼앗기는 이런 개망신은 어느 나라에 있습니까?”

혹독한 질문공세로 일본 법무성을 대표하는 법무대신조차도 개망신을 톡톡히 당해야만 했다. 가석방을 약속했던 날에 양복을 입고 오라는 일본 법무성의 지시에 따라 삼중 스님은 장삼을 벗어 던진 채 일본으로 줄행랑을 쳤다. 10여 년 동안 공들였던 탑이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입에 담지 말아야 하는 욕도 할 판이었다. 공항까지 달려 나온 사회부 부장에게 일갈을 단단히 갈겨 놓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여전했다. 정말로 신의도 없는 사회부 부장 때문에 가석방 조치라도 취소된다면 무슨 짓이라도 푸닥거리를 해야만 될 심정이었다. 교도소 문 앞에 도착하는 순간까지도 걱정에 걱정을 더하면서 정문 앞에 서있자니 들어가라는 신호에 안도감이 들었다. 소장실에서 교도소장의 얼굴을 보자마자 삼중 스님은 무릎을 꿇었다.

“내가 잘못했다. 용서해 달라.”

“스님은 약속을 어겼지만 우리는 약속을 지킨다.”

김희로의 가석방 소식은 일본과 한국 전역을 뒤흔들었다.

가석방으로 터져 나오는 기쁨은 두서 달 동안이나 이어졌다. 정몽준 국회의원이 준비해 준다던 아파트는 김희로가 상상했던 호화스런 맨션이 아니었던지 불같은 기운을 삼중 스님에게 쏟아냈다. 삼중 스님이 약속했던 중고 체어맨 차량을 벤츠 같은 외제차로 착각했던지 실물 차량을 보면서부터 더욱더 불기둥은 높아졌다. 주변 정황은 어찌 변해가던지 기쁜 여운에 감싸인 삼중 스님은 다시 만난 부산일보 김규일(가명) 사회부장이 죽는 시늉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했지만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사회부장은 그리도 믿었던 사람에게 자신이 직접 당했던 사건과 연관 지으면서 직업 근성을 숨길 수 없다는 식으로 은근 슬쩍 넘어가려는 듯 헛웃음을 날렸다. 기자라는 근성에서 철통처럼 믿었던 신의를 저버린 행동으로 타인에게 큰 불이익을 끼쳤다는 죄의식은 그때뿐인 모양이었다.

검찰과 경찰서 출입으로 핑핑 날아다녔던 사회부 민완 기자로 한창 잘나간 시절에 경찰서에 구속된 김 기자의 사건을 삼중 스님은 잊지 않았다. 부산지방 경찰청장과는 형 동생 하는 사이로 친한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경찰서에 구속되었으니 억울해서 죽을 지경이라며 큰 소리를 냈다.

 

기자가 벼슬인 줄 착각하는 기자에 경찰 ‘곤조’도 맛보여

기자·경찰관 얼마나 악랄한지 당한 사람만 알 수 있어

 

“내가 여기 떠날 때까지 내 얼굴이나 잘 기억해 둬. 형님이 만류해서 감방에 그냥 있는 거야. 니들 두고 보라지 내 죽을 때까지 씹을 테니!”

사건의 발단은 삼중 스님과도 잘 어울려 다니던 순진한 문화부 기자가 경찰에 구속될 판이라면서 잘나가는 사회부 기자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시작되었다. 5000원짜리 전화카드가 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팡팡 날아다녔던 민완 기자를 구속까지 시켜 버렸다. 가게에서 전화카드를 구매한 후 공중 전화기에서 사용할 수 없는 불량 카드를 교환해 달라는 요청을 하던 중에 가게 주인과 싸움이 커졌다. 가게 주인의 입장에서는 교환을 요청하는 돼먹지 않은 손님들에게 더 이상 속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경찰을 출동시키면서까지 일을 만들었다. 경찰서에서 문화부 기자는 기자증을 내보이는 행동이 경찰 주임의 비위를 건드렸던지 직업적인 사기꾼으로 몰아붙였다.

“너 가짜 기자잖아! 여기가 어디라고 이런 수법을 써!”

농촌에서 자란 순진한 문화부 기자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친구인 사회부 기자를 끌어들였다.

“김 기자, 날 좀 도와줘! 오천 원짜리 전화카드 한 장을 사기 쳤다면서 날 직결에 처넣으려 해! 빨리 와 줘!”

경찰청장과도 형님이라 부르는 출중한 친구이다 보니 이런 조그마한 사건은 손쉽게 마무리 지을 것으로 믿었다. 김 기자는 전화를 받자마자 쫓아와서는 경찰서에서 부산일보 기자증을 내밀었더니 웬걸 손목에다가 수갑을 채워버렸다. 그러니 물불을 가르지 않는 불같은 성격에 다짜고짜 수갑부터 채우는 경찰의 거친 행동을 몸으로 달려들었다. 온몸으로 부딪치고 발로 차는 것도 모자라서 경찰서 집기들을 때려 부수면서 고함을 질러댔다.

“날 어떻게 보고 수갑을 채워!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면 니들은 당장 영창감이야! 경찰청장에게 전화해 봐! 당장 해!”

경찰서 집기를 초토화를 순식간에 만들어 버리더니 경찰총장에게 전화를 걸라는 호통을 하는 통에 경찰 주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경찰총장에게 전화를 넣었다.

“총장님! 사기꾼이 하도 총장님 성함을 대면서 바꿔달라기에….”

기자증에 기재된 ‘김규일’이라는 이름 석 자를 밝히는 경찰주임은 당사자를 바꿔 달라는 총장의 지시가 있었던지 김 기자에게 전화기를 넘겼다.

“형님! 납니다. 기자증 내밀었다는 죄목으로 이놈들이 수갑을 채우고는 구속시킨다 하네.”

몇 마디도 하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경찰총장은 담당 주임을 바꾸라는 말에 김 기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담당 주임은 경찰서 정황을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연방 고개를 조아렸다. 옆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김 기자는 오늘 저녁 약속 장소에 문화부 기자를 데려가서 회포나 풀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여유로운 표정까지 지었다. 그런데 상황은 이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문화부 기자에게는 수갑을 풀어주는 동시에 훈방조치를 하는 반면에 김 기자는 수갑을 그대로 채운 채 유치장으로 몰아붙였다.

“네놈이 저질러 놓은 짓거리를 대장한테 보고했더니 당장에 구속시키라 했다. 됐냐? 공무집행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너 한 번 잘 걸렸다. 이 못된 놈의 기자야! 기자가 무슨 벼슬인 줄 착각하고 살고 있는데 우리 잡새들 곤조도 한 번 맛봐야 쓴맛도 아는 거야! 처넣어!”

경찰서의 정황을 보고받은 경찰총장은 부하 직원에게 단지 소신껏 밀고 나가라는 지시를 내려야만 했다. 사실상 경찰서의 집기를 때려 부쉈다는 사실은 명백한 공무집행죄에 해당되었기에 아무리 사회에서는 동생으로 여기는 사람일지라도 다른 방도를 꺼내놓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가기만 해봐라! 이놈의 경찰 새끼들! 내 가만두지 않을 테야!”

유치장에 김 기자가 구속되어 있다는 소식을 문화부 기자에게 전해 들은 삼중 스님은 저 멀리 유치장에서부터 부드득 부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다행히 집행유예로 풀려나온 김 기자는 그날로부터 경찰관련 기사만 눈에 들어왔다 하면 쌍심지를 켠 채 약발을 쳤다. 심지어 다른 사회부 기자들이 경찰관련 상황을 기사화하려하면 총대를 메면서까지 다른 기자들의 일감을 도맡아하느라 밤샘 작업까지 할 정도였다.

자신의 직분에 따라 일을 처리했던 경찰총장이나 김 기자 역시나 똑같았다. 절대로 기사화하지 않겠다는 약속마저 저버린 채 국제적인 문제를 야기한 직업적인 근성에서 기자나 경찰관이나 누가 더 악랄했는지는 당한 사람만이 판가름할 수 있었다.

“만약에 김희로가 다행스럽게 가석방되어서 못된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로는 기자라는 신분은 그리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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