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고 라이벌① ‘코카콜라 vs 펩시콜라’

세기의 맞수, 코카콜라 ‘환경’ vs 펩시 ‘건강’ 승부

이동림 기자 | 기사입력 2015/10/27 [17:51]

역대 최고 라이벌① ‘코카콜라 vs 펩시콜라’

세기의 맞수, 코카콜라 ‘환경’ vs 펩시 ‘건강’ 승부

이동림 기자 | 입력 : 2015/10/27 [17:51]

 

식음료 부문서 단연코 대중문화 주도한 ‘코카콜라’

2차 세계대전 발발후 미군이 코카 독점 공급 ‘흥행’

 

‘만년 2인자’ 펩시콜라 건강식 음료 전략으로 선회

‘펩시 챌린지’ 공전의 히트 기록하면서 시장점유율↑

 

[사건의내막=이동림 기자] 세계 콜라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코카콜라컴퍼니와 펩시콜라는 기업 간 경쟁의 역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경쟁사다. 코카콜라는 1886년, 펩시콜라는 1898년 탄생했으니 둘 다 100살을 훌쩍 넘긴 장수 브랜드다. 양사는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라디오, TV, 인터넷 등 매체를 넘나들며 살벌한 광고 경쟁을 벌였다.

 

100년 장수 브랜드

 

장수 브랜드 이 과정에서 스포츠 마케팅, 비교광고, 감성 마케팅 같은 새 광고기법을 선구적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콜라를 대중화한 주역은 역시 코카콜라다. 코카콜라는 1886년 5월8일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의 존 팸퍼트 박사의 손에서 태어났다. 약제사였던 그는 코카콜라 시럽을 생산해 ‘제이콥 약국’에서 5센트에 판매했다.

 

팸퍼튼 박사가 그저 ‘맛있는 음료’라며 만들어낸 이 탄산음료에 이름을 붙인 것은 제이콥 약국의 경리 사원이던 프랭크 로빈슨이다. 그는 코카콜라라는 이름을 짓고 두개의 대문자 ‘C’를 멋들어지게 흘려 쓴 스펜서체의 코카콜라 브랜드 로고까지 만들었다. 코카콜라라는 기막힌 제품을 만든 팸퍼튼 박사는 생전에 이 음료의 성장 가능성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188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여러 파트너에게 사업지분을 쪼개 팔았고 그중 한 사람이 아사 캔들러였다. 아사 캔들러는 1889년 애틀랜타 저널에 전면광고를 싣고 본격적인 마케팅에 나섰다. 그는 팸퍼튼 박사의 전 동업자인 프랭크 로빈슨 등과 함께 자본금 10만 달러를 들여 코카콜라 컴퍼니라는 회사도 세웠다. 1893년에는 코카콜라 상표를 미국 특허청에 등록했고, 같은 해 주주들에게 첫 배당금으로 주당 20달러를 나눠줬다.

 

더구나 당시 이 지역에선 금주법이 통과된 직후였기 때문에 강장제나 흥분제로도 쓰이는 코카잎 성분을 담은 코카콜라는 술의 대체재로 인식되기도 했다. 1890년대 초반 음료시장에 수많은 유사품이 생겨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초창기 약국에서 원액과 탄산수를 직접 섞어 만드는 방식으로 판매하던 코카콜라는 지역별로 보틀러(병입 제조업자)와 계약을 맺고 대량 생산하는 협업 체제를 구축한 뒤 빠르게 성장했다.

 

공교롭게도 펩시콜라를 만든 사람도 약사였다. 그는 자신이 만든 음료를 처음에는 ‘브래드의 음료수(Brad′s Drink)’라고 판매하다가 1898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약국을 하던 칼랩 브래드햄은 콜라 열매와 바닐라 등을 원료로 소화불량 치료약의 일종인 ‘브래드의 음료’를 제조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펩시콜라라는 이름도 소화효소의 일종인 ‘펩신’에서 따온 것. 펩시콜라가 브랜드 이름으로 굳어진 것은 펩시콜라 컴퍼니가 설립된 해(1898년)로부터도 5년이 지난 1903년 6월16일이다.

 

펩시콜라 컴퍼니가 펩시코라는 이름을 쓰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인 1965년 프리토 레이와 합병하면서부터다. 이후 코카콜라보다 12년 늦게 등장한 펩시콜라는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미국 25개 주에 보틀링 공장을 두는 등 시장에 안착하는 듯했지만 1920년 선물계약을 통해 고가에 매입한 설탕 현물시세가 폭락하면서 엄청난 손실을 보고 도산 위기에 처했다. 브래드햄은 1922년 코카콜라에 인수를 제안했다. 하지만, 코카콜라는 빈사상태인 이 매물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1923년 파산한 펩시콜라는 다른 투자자들에게 경영권이 넘어갔고, 1931년 또다시 코카콜라에 매각을 제의했지만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던 펩시콜라는 ‘반값 작전’을 들고 나왔다. 1934년 12온스들이 펩시를 6온스짜리 코카콜라와 같은 가격인 5센트에 판 것. 이 같은 마케팅은 소비자들의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내 펩시콜라 점유율을 단숨에 14%로 끌어올렸다. 당시 코카콜라 점유율은 46% 수준으로 압도적이었지만 펩시는 2위 사업자로 자리매김하는 모멘텀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콜라는 식음료 부문에서 단연코 대중문화의 상징이다. 미국의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위대한 점은 가장 부유한 사람이건 가장 가난한 사람이건 똑같은 물건을 소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나 엘리자베스 테일러뿐만 아니라 바로 당신도 코카콜라를 즐길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코카콜라는 동일한 맛이고, 돈이 많다고 해서 더 맛있는 코카콜라를 마실 수 있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콜라의 대중화를 주도한 것은 코카콜라였다.

 

1894년 미국 미시시피 주의 조지프 비데한은 약국의 소다수 기계를 통해 판매하던 기존 방식 대신 코카콜라 원액을 유리병에 담아 판매하는 이른바 ‘보틀링 비즈니스’를 시작한다. 현재 전 세계 콜라시장의 표준이 된 보틀링 비즈니스 사업의 모델은 여기에서 비롯했다. 빨간색이 코카콜라의 상징색이 된 것은 이 무렵이다. 1886~1890년까지 코카콜라의 광고문구는 흑백으로 인쇄됐다. 1890년 말 컬러인쇄가 보급되자 코카콜라는 로고에 빨간색을 쓰기 시작했다.

 

코카콜라는 애틀랜타에서 처음 판매를 시작할 무렵, 콜라를 판매하는 약국 외벽 흰 천 바탕에 빨간 글씨로 ‘맛있고 상쾌한 코카콜라! 맛있는 코카콜라가 5센트’라고 적은 옥외광고를 했는데 그 이미지를 광고에도 사용한 것이다. 빨간색 바탕에 흰색으로 새겨진 로고는 이후 코카콜라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이미지가 됐다. 코카콜라가 큰 인기를 끌면서 유사품이 쏟아지자 코카콜라는 1916년 어둠 속에서도 쉽게 구분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유명한 컨투어 병을 만들어냈다.

 

‘콜라병 몸매’라는 말까지 생겨난 유명한 콜라병이 탄생한 것이다. 컨투어 병의 모태가 된 첫 스케치는 1913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실린 코코넛 삽화에서 비롯됐다. 밋밋하고 직선적인 선을 쓰는 다른 음료 병과 차별화하기 위해 코코넛 열매의 굴곡 있는 모양을 차용한 것이다. 컨투어 병은 1950년 소비재 가운데 최초로 시사 주간지 ‘타임’의 커버 모델이 됐고 1960년에는 미국 특허청에 상표 등록돼 누구도 베낄 수 없는 코카콜라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코카콜라는 새로운 패키지 디자인의 인기를 등에 업고 1920년대에 이미 미국과 유럽은 물론 중국, 홍콩, 필리핀, 중앙아메리카에까지 퍼져나가 글로벌 탄산음료 시장을 휩쓸기 시작한다. 제2차 세계대전은 코카콜라에 큰 기회가 됐다. 당시 해외에 참전한 미군에 콜라를 독점 공급하면서 펩시콜라를 다시 멀찌감치 따돌렸기 때문이다. 코카콜라는 참전 군인들이 플라시보 효과를 경험할 정도로 ‘성수’ 대접을 받으며 브랜드 파워를 강화해갔다. 코카콜라 마개가 전쟁의 기념품처럼 소장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두 회사는 해외 시장 개척에 본격적으로 주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1950년대 코카콜라는 여전히 전 세계에서 펩시콜라를 5대 1의 차이로 앞섰다. 해외 진출도 코카콜라가 주도하고, 펩시콜라는 따라가는 모양새였다. 이때부터 펩시콜라는 ‘저렴한 음료’라는 이미지에서 탈피하는 데 힘을 쏟기 시작한다. 설탕 성분을 줄여 코카콜라같이 자극적인 맛에 접근시키는 한편 젊고 경쾌한 이미지의 광고를 집중적으로 내보냈다. “타도! 코카콜라”를 외치면서도 생산 공정과 조직 관리에 있어 상대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모방했다.

 

또 젊은 소비자를 ‘펩시 세대’로 규정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는 오토바이나 펩시 자동판매기를 끌어올리는 헬리콥터 등을 광고에 등장시켰다. 다소 소란스럽지만 감성적인 광고였다. 펩시는 이런 노력들을 통해 코카콜라와의 세계 시장점유율 격차를 종전 5배에서 3배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코카콜라는 브랜드 이미지가 노화되는 데 위기감을 느끼고 반격에 나섰다. 펩시콜라로부터 “우리를 따라하는 거냐”는 조롱을 들으면서도, 1955년 26온스짜리 ‘킹 사이즈’ 제품을 내놨고, 펩시의 각종 시장조사 자료를 집중적으로 수집,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치열한 마케팅 경쟁을 거치면서 탄산음료시장의 파이도 덩달아 커졌다. 1965년 미국인 1인당 탄산음료 소비량은 연간 260병까지 올랐다. 펩시콜라의 결정적 한방은 블라인드 테스트 방식을 도입한 비교광고인 ‘펩시 챌린지’였다. 1973년 이 회사는 이른바 ‘코크 신봉자’라 불리는 코카콜라의 열성 소비자들을 모아 눈을 가린 뒤 코카콜라와 펩시콜라를 맛보게 했다. 참가자 중 상당수는 “펩시가 더 맛있다”고 손을 들었고, 펩시콜라는 이 장면을 그대로 TV 광고에 내보냈다. 지금은 비교광고가 많이 확산됐지만 당시엔 상당히 낯선 기법이었다.

 

펩시 챌린지 캠페인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미국 내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위협을 느낀 코카콜라는 1980년대 들어 ‘다이어트 코크’와 같은 신제품을 지속적으로 출시하며 응수했다. 이 과정에서 실책도 있었다. 기존 제품을 단종하고 1985년 출시한 ‘뉴 코크’는 400만달러 이상이 투입된 야심작이었지만 기존 소비자들로부터 “맛없다”는 혹평만 들었다. 회사 측은 두 달 반 뒤에 기존 제품 판매 재개 결정을 내린다. 그러자 판매량은 금세 예전 수준을 회복했고, 뉴 코크 개발비를 뛰어넘는 수준의 광고효과를 거뒀다는 평가도 받았다.

 

‘만년 2인자’ 펩시는 탄산음료 비중을 낮추고 과일주스나 시리얼 등 건강 음료를 강화하는 전략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건강에 좋지 않은 탄산음료를 기피하는 소비자가 늘어나는 추세를 감안한 것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2004년 펩시코의 전체 매출은 292억 달러로 코카콜라컴퍼니(219억달러)를 처음 앞질렀다. 이듬해부터는 시가총액과 순이익도 코카콜라를 넘어섰다.

 

브랜드가치 격차

 

하지만 펩시콜라가 시야를 넓히는 동안 음료시장 내에서 코카콜라의 아성은 훨씬 더 견고해졌다. 올해 5월 포브스가 평가한 자료에 따르면 코카콜라의 브랜드가치는 560억 달러로, 전 세계 브랜드 가운데 4위다. 펩시(190억 달러)는 음료브랜드 가운데 2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전체로는 29위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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