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군사독재 민낯 드러낸 ‘우범곤 총기난사 사건’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끔찍한 최단시간 최다살인 사건
임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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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5/16 [11:08]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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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범곤 순경 총기난사 사건을 다룬 JTBC 카드뉴스    <사진=JTBC 방송 캡처>

 

전두환, 1982 신년사에서 “개혁 작업으로 사회 쇄신됐다”

몇 달 지나서 ‘우범곤 순경 총기난사 사건’ 일어나 당황

부패경찰이 죄 없는 주민들 상대로 수류탄 던지고 총 난사

 

5월17일은 전두환의 지휘 하에 비상계엄령이 확대된 날이다. 다음날 5월18일은 광주에서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그러나 청와대 경비단 출신 경찰이 좌천된 작은 마을에서 총기난사를 일으킨다. 정권은 사건을 수습하는 척 신군부세력이었던 노태우를 정치에 발들이게 한다.

 

신군부세력을 이용해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전 대통령은 지난 1980년 11월,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회정화운동’을 시작했었다. 전두환 정권은 운동을 통해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면서 고위직 243명을 포함해 공무원 5천명과 국영기업 임직원 3천명을 해고했다.

 

하지만 실상은 ‘부정부패 척결’과 거리가 멀었다. 정권은 운동을 통해 자신에게 피해를 줄 만한 세력을 없애는 데 주력했다. 비슷한 죄목으로 기자 등 언론인 715명을 해직시켰고, 언론을 통폐합해 유력 월간지를 폐간시켰다. 이를 통해 전두환은 국민의 눈을 가리고 자신이 원하는 세력을 키울 수 있게 됐다.

 

지난 1982년 전두환은 신년 국정연설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만행을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둔갑해 발표했다. 연설문에서 “정부는 사회악과 비리의 소지가 돼온 각종 요인을 제거하고 ‘사회정화운동’을 해왔다”고 밝혔다. 그는 “개혁 작업으로 사회가 지난날과 비교해서 많이 쇄신됐다”면서 “이제 정치 및 사회적 혼란에서 빠져나와 안정을 되찾았다”고 호언장담했다.

 

전두환은 연설문 말미에 “우리가 내걸은 새 시대는 정의로운 사회다!”고 외쳤다. 그러나 병들어 버린 사회는 말 한마디로 감출 수 없었다. 같은 해 4월 26일에 ‘우범곤 순경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사망자만 무려 62명에 달했다. 정의를 바로잡아야 할 경찰이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학살을 가한 것이다.

 

사건을 통해 드러난 경찰의 뒷모습은 썩어 있었고, 불과 몇 달 전 외쳤던 ‘부정부패 척결’과 대비되는 모순이었다. 우범곤은 경찰임에도 불구하고 근무지를 이탈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같은 지서 경찰 2명은 온천접대를 받으러 근무지에 없었다. 경찰이 주민들에게 공공연히 뒷돈을 받았던 것도 드러났다. 전두환 정권은 난감한 상황에 얼굴을 들기 힘들었다.

 

전두환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4월28일 문책성 인사로 서정화 내무부 장관을 경질하며 노태우를 투입시켰다. ‘우범곤 순경 총기난사 사건’을 정부 수뇌부에 노태우를 앉히는 기회로 악용한 것이다. 이후 노태우는 전두환의 오른손 역할을 하며 5공화국의 전면에 섰다.

 

당시 사건이 알려지면서 우범곤 순경이 청와대 내부경비를 맡았던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청와대는 이러한 사실에 전두환 정권이 피해를 볼까 두려웠다. 이들은 언론이 우 순경의 청와대 근무 전력을 알리지 못하게 했다. 그 당시 신문들은 ‘서울의 특수근무지에서 일했다’고 보도했다.

 

사건 일지

당시 언론에서 덮어진 사건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부분이 발견됐다. 사건은 지난 1982년 4월26일 경남 의령군 궁류면에서 일어났다. 희대의 살인마가 된 우범곤 순경은 이 지역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처음 근무한 곳은 청와대였다. 지난 1981년 4월부터 시작해 1982년 2월까지 일을 했다.

 

그는 해병대에서 특등사수였을 정도로 경찰로서 실력은 월등했을 것이란 분석이다. 그러나 어떤 연유인지 3월에 의령군으로 좌천됐다. 그 당시 언론에 의하면 ‘술버릇이 심하고 성격이 난폭하다’는 게 이유였다.

 

의령군의 궁류지서는 청와대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근무지였다. 좋은 곳에서 일하다가 좌천을 당했으니 인사문제에 대한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정부가 꾸린 사고원인조사반의 결론도 범인의 동기가 ‘인사불만’이었다고 주장했다.

 

불만 때문이었을까? 그는 좌천된 이후 줄곧 동네주민들을 괴롭혔다. 그는 궁류지서로 오자마자 주민을 상대로 활동비라는 명목으로 돈을 갈취했다고 한다. 그 당시 경찰과 공무원에게 술값으로 돈을 바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우 순경도 몇 만원씩 챙겨 받곤 했다. 깡패와 다름없었던 당시 경찰들은 업소를 돌아다니며 돈을 걷어갔었다.

 

지난 1980년 5공화국에서 반부패 환경 조성을 위해 사회정화위원회를 만들었지만, 유명무실한 기구였다. 당시 이 위원회에서 우범곤 순경의 부패와 부정적 평판을 전달했지만, 경찰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사회정화위원회가 사실상 신군부의 부패를 밝히는 조직이라기보단 오히려 자신들의 행동을 감추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범곤의 범행 동기는 한 가지 더 있다. 그의 애정전선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같은 집에서 동거하는 2살 아래 전말순(당시 25)씨가 있었다. 27살 청년인 우범곤은 궁류면으로 좌천되자 같은 면 압곡리에 살던 전씨와 교재를 시작한다. 서로를 사랑한 이들의 혼사를 막은 건 처가댁이었다. 전씨의 집안은 평소 주사가 심한 우 순경과 결혼을 반대했다. 사건 이후 언론에선 전말순 씨의 일기장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라는 구절을 근거로 결혼 문제가 있었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사건의 발단은 두 사람 사이의 다툼에서 비롯됐다. 사건이 일어났던 4월26일, 우 순경은 점심을 먹으러 집에 들어왔다. 그날 저녁 당직근무가 있었던 그는 미리 수면을 보충하기 위해 낮잠을 청했다. 잠을 자던 그의 몸 위에 파리가 날아들었다. 옆에 있던 전씨는 파리를 잡으려 우 순경의 가슴을 쳤다. 그러다 잠이 깬 그가 화를 냈고 심하게 다퉜다.

 

▲ 사건 당시 경향신문에 실린 우범곤 사진.

 

“파리 잡다가 낮잠 자던 우 순경 때려” 62명 살해의 발단

접대받느라 사라진 경찰들… 우 순경, 아무런 방해 없었다

국민의 눈 막았던 군사정권, 언론통폐합으로 사건보도 막아

 

오후 4시쯤 단단히 성이 난 우범곤은 집을 나가서 근처 가게에서 술을 마셨다. 평소 술버릇이 고약했던 우 순경은 저녁 7시 반쯤 집으로 돌아와 불같이 화를 냈다. 그는 전씨에게 폭행을 하기 시작했고, 이를 말리던 전씨의 친척까지 때렸다. 작은 동네가 금세 시끄러워졌다. 동네 사람들은 우범곤 집 앞에 모여 그를 나무랬다. 이들이 “망나니와 함께 산다”, “저런 인간이 경찰이냐”며 전씨의 편을 들자 우 순경은 집에서 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술집이었다. 만취가 된 그는 근무를 하러 궁류지서로 향했다. 당시 지서에서 근무하던 순경 중 2명은 근무지를 이탈해 온천을 즐기고 있었고, 1명은 비번이었다. 오후 9시 반쯤 우 순경을 말리다 맞았던 전씨의 남동생이 찾아왔다. 그는 “경찰이면 다냐!”면서 “왜 아무나 때리느냐?”고 따졌다. 이에 열 받은 우범곤은 “그래, 다 죽인다!”고 소리쳤다.

 

우 순경은 지서에 배속된 예비군 무기고로 향했다. 이곳을 지키던 육군 방위병 두 명을 카빈총으로 위협해 내 쫓았다. 그는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M1 카빈총 2자루, 실탄 180발, 수류탄 7개 등을 탈취할 수 있었다.

 

처음 사살을 한 것은 9시 40분쯤. 밖으로 나온 우범곤은 마침 앞을 지나던 남성을 보고 총을 쐈다. 이후 토곡리 시장으로 달려가 총을 난사해 마을 주면 3명을 살해한다. 곧바로 궁류우체국으로 향했다. 그는 살인을 저지르고도 지능적인 판단을 했다. 이 사실이 외부로 알리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시 마을의 통신 수단이었던 교환대를 부순 것이다. 이를 위해 교환원 2명과 숙직 중이던 집배원 1명을 살해했다.

 

‘대학살’이 시작된 것은 저녁 10시부터다. 압곡리 매실마을로 향한 우 순경은 낮에 싸웠던 동거녀 전말순 씨를 찾아갔다. 그곳엔 전씨를 비롯한 친척들이 살고 있었다. 우범곤은 전씨를 비롯한 6명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전씨는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 추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사망했다. 이때 언론에 짧은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다.

 

당시 전씨 기억에 의하면 우 순경은 양손에 카빈총을 한 자루씩 들고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다. 전씨의 집에 쳐들어가며 그는 “여기 전말숙 있나!”고 소리쳤다. 그 소리에 방문을 열었던 전씨 가족들을 향해 카빈총으로 난사했다. 거기에 수류탄을 마당에 던지고 집밖을 나섰다.

 

전말숙 씨는 우범곤에 대해 “성격이 괴팍하고 말씨가 거칠었다”면서 “집안이 가난해 항상 열등감에 젖어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경찰이 결혼식도 안 올리고 동거부터 한다고 다른 사람이 수군거리는 걸 못마땅해 했다”고 덧붙였다.

 

우 순경은 600M 정도를 달려 운계리로 향한다. 그곳에서 만나 한 중학생과 구멍가게를 들렀다. 콜라 1병을 사 마셨던 그는 동행했던 중학생을 총으로 쏴 죽였다. 갑작스러운 총격에 놀랐던 가게주인이 놀라서 소리치자 역시 총을 쐈다. 마을 안쪽에 주민들이 총소리가 나자 집 밖을 기웃거렸다.

 

우범곤은 이곳에서 엽기적인 살해방식을 보여준다. 총소리를 듣고 집 안에 숨은 마을 주민들을 밖으로 유도했다. 그는 “간첩이다! 다들 나오세요!”라고 소리친 뒤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총으로 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민들은 밖으로 나가면 죽는 것이었다. 당시 마을 주민이었던 사람은 “밖에서 총소리가 나자 아들이 나가려고 했다”면서 “혹시나 나갔으면 죽었을지 모른다”고 회상했다.

 

우 순경은 총을 쏘면서 혼잣말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이 더러운 세상”, “다 쏴 죽일 것이다”, “순경 못 해먹겠다” 등을 외쳤다. 그가 얼마나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을지를 가늠케 한다. 이 마을에서 죽은 사람들 중에는 이미 자신이 우체국에서 살해한 교환원의 아버지를 포함한 일가족 5명이 있었다. 마을은 우 순경이 쏜 총과 수류탄으로 인해 쑥대밭이 됐다.

 

우 순경은 엽기적인 행동은 평촌리를 향한 후에도 이어졌다. 저녁 10시 50분 근처 문두출씨 상갓집에 들어간 그는 문상객들과 어울려 10분간 술을 마셨다. 평촌리 주민들 대부분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총을 메고 나타난 우범곤은 “간첩이 나와 비상이 걸렸다”고 거짓말한 뒤 술을 받아먹었다고 한다. 태연하게 3000원을 봉투에 넣어 부의금까지 내는 모습을 보고,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문상객 중 한 명이 카빈총을 보곤 “실탄도 없는 총을 머 하려고 갖고 다니나?”고 건드렸다. 그러자 본색을 들어낸 우범곤은 총을 난사했다. 난대 없는 총격에 문상객들이 학살당했다. 몇몇 도망친 이들은 “우범곤이 총을 쏜다!”고 소리쳤다. 현장에 있었던 한 목격자는 “우리 동생들이 총소리를 듣고 나갔다가 많이 죽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초상집에선 12명이 살해당했고, 이 동네에서만 23명이 목숨을 잃었다.

 

도망친 사람들은 산속에 들어가서 총소리에 두려워해야 했다. 대부분이 혈육으로 묶였던 마을이었지만, 아무도 총을 난사하는 우 순경을 막을 수 없었다. 마을에서 살아남았던 한 사람은 “가서 우범곤을 막아야 했지만, 그러면 죽을 수도 있단 생각에 망설였다”면서 “산으로 도망쳐서 살았다”고 말했다. 도망친 이들은 산을 넘어가서 경찰에 신고했다.

 

무능한 경찰

사건이 진행 중이던 오후 10시 50분쯤 근무지를 무단이탈해 온천접대 후 술을 마시고 돌아오던 궁류지서장 허창순 경위 일행은 주민 신고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궁류지서에서 우범곤 순경이 총을 탈취해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다는 보고를 받고는 도피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의령서 경찰 30명은 자정이 다돼서야 현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들도 우범곤이 무서워 마을 초입 다리 밑에 숨어있었다.

 

당시 의령서 책임자인 서장 최재윤 경정은 보고 없이 근무지를 이탈해 부산에 있었다. 사건 사실을 보고받고 현장에 온 시간은 새벽 1시 20분이었다. 현장을 본 의령서장은 범인을 잡으려는 생각보다 사상자들을 보고 겁에 질려 궁류지서로 도망쳤다. 이들은 마을에 경보방송을 하거나 사이렌을 울리는 초기 조치를 하지 않았다. 게다가 경찰이나 군지원 등을 하지도 않아 초기대응이 허술했다는 지적이다.

 

새벽 2시에는 주민 2명이 산을 넘고 도망쳐와 경찰의 출동을 청원했다. 그러나 서장은 날이 어둡다는 핑계로 거부했다. 새벽 4시가 돼서 마산·진주의 기동대가 지원을 왔다. 그러나 이들이 투입해 우범곤을 찾아내지도 못 했다.

 

그 사이 우 순경은 유유히 산속에서 숨어있었다. 그는 사건이 시작한 다음 날인 27일 새벽 5시 35분에 다시 평촌리 마을로 들어갔다. 일가족 5명이 잠을 자고 있던 한 민가에 들어간 그는 수류탄 2발을 던져 자신도 함께 사망했다. 결국, 경찰 소속 살인마는 한 번도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범행을 저지른 꼴이 됐다.

 

함께 폭사 당한 가족의 성은 서씨이다.이곳 평촌리 마을은 서가 집성촌으로 50여 가구의 서씨 집안이 모여 살았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죽은 사람과 그 곳을 떠난 사람이 대부분이다. 현재는 20가구 정도가 남아있다. 피해자들 중엔 일가족 모두가 살해당하기도, 부모가 죽어 3남매가 고아가 되기도 했다. 우 순경이 폭사한 집은 터만 남아있다.

 

우범곤은 62명을 죽이고 33명에 부상을 입혔다. 이 사건은 세계에서 최단시간 최다살상 기록으로 일본에서 발생한 ‘쓰야마 사건’을 경신(31명 사망)했다. 이는 지난 2011년에 ‘노르웨이의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가 기록을 갱신(76명 사망)할 때까지 1위 자리를 지켰다.

 

전두환 정권은 피해자들을 입을 막기 위해 돈을 굴렸다. 국가배상심의위원회를 만들어 사망자 1인당 최고 1900만원을 지급했다. 최하 금액은 300만원이었다. 이와 별도로 사망자 장례비로 30만원, 조위금으로 600만원을 유족에게 지급했다. 6명이었던 가족을 잃은 박(당시 19살)씨는 보상금으로만 1억원이 넘는 돈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서울 아파트 가격이 1천만원 정도였던 걸 감안하면 상당한 금액의 보상이었다.

 

전두환은 사건이 일어난 궁류면 지역을 개발하는 방안도 내놨다. 그는 현장을 찾아 100억원 규모의 ‘궁류개발계획’을 발표했다. 계획을 통해 저수지를 새로 짓고, 도로를 새로 포장하는 등 사업을 진행했다. 당시 주민은 “사람 목숨과 지역발전을 맞바꿨다”고 한탄했다.

 

마을은 겉으로 살기 좋아졌지만, 주민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사건 당시 118가구에 619명의 주민이 살던 평촌리는 사람들이 대부분 떠났다. 이곳은 2012년 1월말 기준으로 57가구에 114명의 주민만 남아있다.

 

언론이 통제되던 당시는 사건의 뒷이야기조차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 오히려 사건 이후 긍정적인 기사가 올라왔다. ‘마을이 생기를 되찾았다’던가 ‘경찰의 불신은 있을 수 없다’라는 식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의 경우 언론을 통폐합시킨 <연합통신>의 보도를 받도록 했다. 이들의 지방 독점취재로 인해 당시 언론들은 문제를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경찰 입장에서 ‘우범곤 순경 총기난사 사건’은 숨기고 싶은 비극이다. 꾸준히 제기되는 경찰의 단독수사권 요구에 이 사건이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시민의 편에 서야 할 경찰이 반대로 총구를 겨눴으니 국민의 시선이 곱지는 않다.

 

당시 경찰이 부패하지 않았더라면 이 같은 사건이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건이 발생했어도 적절한 초기대응만 있었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더군다나 군사정권은 이를 빌미로 사건해결보다 정치적 인사를 앞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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