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건’, 살인 택시 온보현

여성만 노린 ‘살인 택시’,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다

문병곤 기자 | 기사입력 2018/08/08 [19:03]

‘그때 그 사건’, 살인 택시 온보현

여성만 노린 ‘살인 택시’,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다

문병곤 기자 | 입력 : 2018/08/08 [19:03]

한국 역사상 가장 잔인한 연쇄살인으로 알려진 살인 택시사건은 온보현이 꾸민 범행이다. 살인마 온보현은 살인을 위해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사건을 일으킬 때마다 예기치 못한 일에서 당황하는 모습도 보였는데, 그의 심리변화가 범죄일지 곳곳에서 드러난다. “아버지를 욕되게 하고 싶어 범죄를 저질렀다는 그의 어린 시절부터 연쇄살인마가 되는 과정을 알아본다. <편집자 주>


 

어렸을 적 아버지에 대한 원망, 불안한 심리로 작용

택시 번호판 바꾸고 범행…일명 살인 택시로 불려

 

여성만 노려 범죄, ‘살인 일기쓰면서 철저히 준비

지존파와 비교해 달라경찰서에 자수, 사형 판결

 

▲ 자수한 이후 온보현이 현장검증을 하는 장면.   <사진=MBC 뉴스 캡처>

 

 

[사건의내막=임대현 기자] 지난 19949월 전국은 택시 살인마 온보현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는 주로 심야 귀가 여성들을 상대로 강간과 살인을 저질렀다. 그는 ‘38명 살해라는 범행목표까지 세우고 불과 한 달 반 사이 6건의 범행을 저지른 악질 범죄자였다.

 

살인마의 어린 시절

온보현은 전북 김제군 금구면 선암리 온씨 집성촌에서 51녀 중 둘째로 태어나 금구국민학교 5년을 중퇴했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온보현은 국민학교를 다닐 때 성격이 온순하고 침착해 동네 어른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숙부 온모씨에 따르면 보현이의 어릴 적 성격은 차분하고 심약했다학업성적은 중간 정도였다고 기억했다. 온보현은 서울로 올라가 공장·노동판 등을 전전하며 닥치는 대로 일을 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택시회사에서 퇴직한 후 최근엔 트럭으로 고랭지채소 등을 실어나르는 사업을 하다 실패, 경제적 어려움과 심적 갈등을 겪은 것으로 가족·친지들은 알고 있다.

 

온보현은 형제들과 고향에 있는 친척·친구들과 연락을 끊고 살았기 때문에 사건 발생 시기 그의 행적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가족·친척들은 거의 없는 상태였다. 아버지가 추석이면 성묘를 하기위해 고향을 찾을 때도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다가 고향을 떠난 후 처음으로 고향에 내려왔다.

 

그는 숙부집에 4일 동안 기거하면서 동네에서 삽과 낫을 빌려 1차 범행에 필요한 구덩이를 파기 위해 산에 자주 오르내렸다. 숙부는 이때 그가 성묘를 하기위해 내려와 벌초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 조카를 기특하게 여겼다고 당시를 설명했다.

 

그러나 그의 삶에서 항상 문제가 되어 왔던 것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목격한 폭력적인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심하게 때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많이 보고 자란 그는 아버지에 대해 분노를 품은 채 자랐다. 그의 분노는 더욱 비대해졌는데,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 원인이었다.

 

온보현은 24세 때인 1981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형제들과 헤어진 뒤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가정을 꾸미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가족관계에 대해선 철저히 숨겨와 형제들도 정확히 온보현의 가족관계를 모르고 지내왔다.

 

그는 겉모습만 봐서는 온순하기 그지없었다. 온보현은 6번째 범행에서 다친 손을 치료하기 위해 13일 동안 서울 천호2C여관에 머물렀으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조금도 의심을 사지 않았다.

 

C여관 주인 박모(52·)씨는 그렇게 얌전하고 조용하던 사람이 흉악한 살인범이었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며 오히려 신문보도를 의심하기도 했다. 온보현이 택시를 몰고 C여관에 나타난 것은 살해를 한 이후였다. 당시 박주윤씨를 살해할 때 손가락을 다친 온보현은 한 달 동안 머무르겠다3층 구석방을 택했다.

 

여관주인 박씨는 택시운전사가 장기간 투숙할 때면 사고를 내고 도망 다니는 경우가 많은 데다 그가 손에 붕대까지 감고 있어 더욱 의심이 들었다. 박씨는 윤보현에게 결혼한 사람 같은데 왜 여관에 머무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이에 온보현은 아내와 싸워 집을 나왔다싸울 때 아내를 때리지는 못하고 애꿎은 맥주병만 내리쳐 손가락을 다쳤다고 태연스럽게 대꾸했다.

 

회사택시인데 들어가지 않아도 되느냐는 여관주인의 질문에는 내가 산 택시인데 개인택시 면허가 없어 회사이름으로 등록했다고 받아넘기기까지 했다. 온보현이 아침저녁으로 밥을 사 먹은 여관 앞 J식당 주인 김모(43)씨도 속아 넘어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도 온보현의 연기는 완벽했다. 김씨는 조용히 앉아 TV를 보면서 밥만 먹는 그의 표정에 조금도 초조해하거나 긴장하는 빛이 없었다고 말했다.

 

199485일 그는 곧 구체적인 살인 계획을 세우고 살인 수첩까지 장만했다. 온보현은 살인계획을 세울 당시 나이 만 37세였고, 거주지는 서울시 도봉구 수유1동이었다. 수첩에는 어쩌면 이 글로 인하여 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범행일지를 작성한다. 훗날 수사당국에 이 범행일지를 공개할 예정이다고 적혀있다.

 

온보현은 구체적인 살인 방법에 대해 고민하던 중, 그는 그가 전에 했던 택시기사 일을 연상했다. 그는 차고에 세워져 있던 강북수유리의 국제운수 11287 스텔라 차량을 절도했고, 곧이어 미사리 쪽에서 대진운수 11237로 번호판을 위조하였다.

 

첫 범행은 같은 해 828일에 저질렀다. 그는 강동구 암사동 사거리에서 한 명의 여성을 태웠다. 온보현은 흉기로 여성을 겁박해서 학생증을 뺏은 후, 그녀를 야산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차문을 여는 순간 피해자는 살려달라고 크게 외치며 영동고속도로 이천 부근에서 도망쳤다. 그는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그녀를 뒤쫓지 않은 채 그대로 도주했다.

 

첫 범행을 실패한 이후 그는 한동안 숨어 지내다가 곤지암주차장에서 에스페로 택시와 택시회사와 번호판을 바꾸고 다음 날 새벽에 다시 거리로 나갔다. 다음날 새벽 1~3시경 그는 43세 권모씨를 차에 태워 구리안산고속도로 입구에서 성폭행을 한차례 한 후, 그의 고향 쪽인 김제 영천마을 야산으로 피해자를 끌고 갔다.

 

온보현은 미리 파놓았던 구덩이 옆에서 권씨를 한 차례 더 성폭행했다. 그 후 그는 피해자의 입과 팔 그리고 다리를 포박한 뒤 구덩이 안으로 밀어 넣었다. 피해자는 그가 숲 근처에서 잠깐 잠을 자는 사이에 도주해 인근에 위치했던 공사장의 인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한편, 잠에서 깨고 난 뒤 피해자가 도주한 사실을 깨달은 온보현은 그날 아침까지 숨어 지낸다. 경찰이 그가 운전하던 택시를 끌고 가는 것을 지켜본 뒤, 그날로 대전으로 택시를 타고서 도주했다. 이후 경찰은 수유리 근처에서 일했던 모든 택시기사의 이력서들을 수집한 뒤, 피해자와 대조심문을 통하여 범인을 확정 짓고 범인의 신상을 파악했다.

 

새로운 범행은 며칠 뒤 이루어졌다. 온보현은 저녁 830분경에 서울 독산동 부근에서 21세 학생 엄모씨를 태웠다. 그는 올림픽대로에서 피해자를 칼로 위협하여 강원도 횡성에 위치한 한 야산으로 끌고 가서 성폭행을 두 번에 걸쳐서 한 뒤, 피해자를 나무에 포박했다.

 

온보현은 피해자를 죽이지 않은 채 친구를 데려오겠다고 말한 뒤, 2차 범행을 하러 야산을 내려갔다. 이 틈을 타 피해자는 포박을 풀고 도주했다.

 

첫 살인은 912일에 일어났다. 온보현은 저녁 830분경에 양재동 부근에서 26세 회사원 허모씨를 태웠다. 그는 서초톨게이트 부근에서 피해자를 칼로 위협하여 전날 피해자를 포박해 놓았던 강원도 횡성의 야산으로 끌고 갔다. 그러나 포박당한 채 남겨졌던 피해자가 도망간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분노에 가득 차 피해자 허씨를 구타하고 강간한다.

 

온보현은 강간한 피해자를 나무에 묶고 피해자의 얼굴, 무릎, 다리 등을 삽으로 가격하고는 도주했다. 상처가 심했던 피해자 허씨는 사망했다. 한편, 범행현장에서 벗어난 온보현은 풍납동 신한은행지점에서 피해자 허씨의 외환은행카드를 이용하여 61만원을 인출하여 사용했다.

 

광기로 가득 차게 된 그는 강동구 천호동 사거리 부근에서 19세 회사원 노모씨를 태웠다. 중부고속도로로 진입한 뒤 온보현은 피해자를 칼로 위협하여 김천에 위치한 여관으로 끌고 가 강제로 범했다.

 

그러다 피해자는 다른 피해자들과는 달리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고 차분했기에 온보현은 피해자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가장이 되어 홀로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피해자의 말에 묘한 감정을 느낀다. 이후 새벽에 피해자를 고덕동에 위치한 피해자의 집 앞까지 바래다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온보현의 범행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가락동에서 24세의 아동복지학과 교사 박모씨를 태운 뒤, 올림픽아파트 앞 사거리 부근에서 칼로 피해자를 위협했다. 그러나 피해자가 심하게 반항한 나머지 흉기에 손을 베이고 말았다.

 

자신의 손을 다치자 극도로 흥분한 온보현은 피해자의 허벅지와 배 등을 수차례 찔러 살해한 뒤, 경북 금능군에 위치한 도로변에 시신을 유기하였다. 이후 상처를 치료하고 은신하기 위해 서울 천호동에 위치한 C여관 3층의 구석진 방에서 13일 동안 은신한다.

 

▲ 온보현은 택시를 이용해 범죄를 저질렀다.   <사진=tvN 범죄의 재구성 캡처>

 

손을 베인 온보현은 범행을 중단했는데, 부상과 더불어 이전까지 겪을 수 없었던 피해자의 심한 반항으로 인하여 본디 소심하고 용기가 부족했던 온보현은 범행을 저지르고자 하는 의욕을 잃었다. 이에 대하여 범죄 프로파일러였던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마지막 희생자였던 박모씨의 거룩한 희생이 추가적인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막았다고 저서 <한국의 연쇄살인>에서 평가했다. 그러나 당시 경찰은 여전히 온보현의 행방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때 온보현은 자신의 살인수첩에 손가락 부상으로 범행 중단됨. 요즘 지존파사건으로 사회가 큰 충격을 받은 듯 떠들썩하다. 목적이 달성되면 자수할 것이다. 살해 목표인원 38, 현재 2명 살해함. 36명 남음. 목표인원을 초과해 50명으로 변경될 수 있음이란 글을 쓴다.

 

자수로 끝난 살인일기

온보현이 글을 썼던 1994920일에는 지존파가 검거되었다. 이와 함께 온보현과 관련된 강력범죄 사건 공개수사가 시작됐다. 대대적인 공개수배와 더불어 그가 택시 기사이자 범행에 택시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들어 불심검문 탐문수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온보현은 수첩에 김제 경찰서 바보 같은 녀석들, 전국에 수배한다고? 내 스스로 자수하기 전까지 절대 잡지 못한다. 도망간 사람들 신고하면 복수한다 했는데…. 지존파는 돈 많은 사람을 살해한다 했는데 나는 왜 살인을 하지. 목적 없는 살인행각으로 더 많은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무어라 비난할까라는 글을 적었다.

 

과대망상과 자기과시욕에 빠진 살인마 온보현은 자수하겠다는 마음 변하지 않기를 다짐하면서 서울 용산경찰서로라며 악마의 일기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당시 지존파를 검거하여 유명해졌던 서울 서초경찰서 입구에서 의경에게 자수하러 왔다고 말하며 자수했다.

 

온보현은 경찰 조사에서 밝히기를 지존파와 나를 비교해보고 싶다. 지존파와 같은 감방에 넣어 달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의도를 갖고 자수를 했으니, 선처가 될 리 없었다. 그러나 그가 바랐던 것과 같이 온보현은 지존파 못지않게 매스컴에 대서특필됐던 것은 물론 다음 해 11월에 신속하게 집행된 사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19941031일 서울지검 강력부 박충근 검사는 온보현이 훔친 택시를 이용하여 부녀자 여섯 명을 납치하고, 이 가운데 두 명을 살해한 혐의를 들어 그를 구속 및 기소했다. 검사는 윤보현의 끔찍한 살인을 지적하며 사형을 구형했다.

 

19941114일 서울형사지법 합의25(재판장 김주형 부장판사)는 피고인 온보현에게 강도살인 및 시체 유기죄 등을 적용했다. 앞서 검사가 구형한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2심에서도 사형이 확정됐다.

 

1995112일 온보현은 자신과 비교되길 바라던 지존파 등 19명과 함께 사형됐다. 언론에 따르면 그는 자신과 같은 흉악범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강력범죄자들에게 반드시 사형을 선고해줄 것이며, 형을 신속하게 집행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자수 직후 그는 자신의 범행에 대해서 상세히 털어놓았다. ‘몇 번이나 범행을 저질렀냐는 질문에 온보현은 전부 8번이다. 택시를 두 번 훔쳤고 강도·강간 여섯 번이다. 허수정·박주윤씨는 죽였지만 나머지 4명은 살려줬다고 답했다.

 

허씨를 어떻게 했나라는 질문에 그는 신갈 부근 야산에서 테이프로 입을 막고 비닐봉지를 머리에 씌운 뒤 산에서 주운 삽으로 때려죽였다. 허씨를 태우고 전날 강도·강간을 한 뒤 강원도 횡성군 야산에 묶어둔 엄모씨를 보러 갔으나 엄씨가 달아나고 없어 그냥 서울로 왔다고 답했다. 살해 동기에는 반포대교까지 왔으나 서울로 들어온 후 허수정이 반말 비슷하게 하면서 반항해 죽였다면서 성폭행은 안 했다고 밝혔다.

 

박씨는 왜 죽였나라는 질문엔 칼로 위협하자 핸들을 꺾고 반항해서라고 답했다. 최초 범행대상이던 여대생은 놔준 게 아니고 놓쳤다고 설명했다. 첫 범행이어서 서툴렀다고 말했다.

 

노모씨는 강간만 하고 돌려 보내줬다 것에 대해 온보현은 태우고 다니며 얘기해보니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남동생과 산다고 해 불쌍했다면서 고분고분 말도 잘 들어 돌려보냈다고 설명했다. 피해자들을 데리고 갔던 장소에 대해서는 전북 김제군 선암리는 고향이지만 다른 데는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갔다고 말했다.

 

전북 김제에 파뒀던 구덩이에 대해서는 전북 김제에 파둔 건 내가 죽으려고 판 것이고 다른 데는 구덩이가 없다고 답했다. 온보현은 범행동기에 대해 아버지가 미워서 그랬다. 813일 어머니 기일 때 고향에 내려가 죽으려고 구덩이까지 파놓았으나 고향에 내려온 아버지를 보니 화가 치밀어 그냥 죽기 억울했다. 범죄라도 저질러 아버지나 형제들이 창피해서 고향에 못 내려가게라도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여자들을 범행대상으로 삼은 이유에 대해서는 남자보다 쉽지 않은가. 1980년도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벌금형을 받자 사귀던 여자가 절교를 선언했다. 그때부터 사회와 여자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답했다.

 

빨리 죽여 달라

온보현이 정한 살인목표 38은 자신의 나이를 기준으로 정한 것이었다. 나중에는 50명까지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는 납치당한 사람들에게 도망가면 끝까지 복수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자수 이유에 대해 신문·방송에 내 얼굴이 나와 자살하려고 중부고속도로를 무작정 달리다 밝힐 건 밝히고 죽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죽으면 박주윤 살해범이 나라는 것도 모를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자살방법까지 생각해뒀다. 사실, 제주도로 가는 배에서 뛰어내리거나 목을 매는 것이 목표였다. 공개수배 이후 검문에 걸리면 분신하려고 신나도 가지고 다녔다고 말했다.

 

수배상태였는데도 여관에 투숙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가짜 신분증이 여러 개 있어 전혀 의심받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자수 이후 심경을 밝히는 과정에서 이유 없이 범행에 걸려든 피해자들께 죄송하다면서 죽음으로 속죄하겠다. 빨리 죽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 2008년에 방영된 tvN의 범죄 재연 다큐드라마 범죄의 재구성에서는 온보현에 대해 한 범죄심리학자는 불안정한 성장과정을 들어 그가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온보현이 도덕이나 법률을 무시하는 성향을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성장 과정만을 들어 그의 근본은 선했다고 여길 수는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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