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진실
4.19 혁명, 아시아 최초 시민 봉기의 내막
부패한 권력의 말로…“국민은 참고 있지 않는다”
김범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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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4/19 [09:15]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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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혁명 당시 학생들의 시위 모습.     © 사건의내막

 

고인 물은 가만히 두면 당연히 썩는 것처럼 견제 없는 독재 권력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 이건 전세계 공통이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17년 장기독재의 박정희 정권이 그러했고 29만원 밖에 없다는 전두환 정권이 그랬다. 무엇보다 각종 비리의 국정농단으로 지난 3월10일 날 파면이 결정되어 옥살이를 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모두 직간접적 차이 뿐, 국민들이 심판해 권력에 내려온 것과 다름없었다. 이같은 우리나라의 민중항쟁은 매우 유서가 깊다. 권력자와 맡선 대한민국 민중항쟁의 첫 시작 자체가, 첫 대통령인 이승만 정권에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권과 마찬가지로 이승만 정권도 국민들의 커다란 반발에도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었고 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과 함께 정권을 마무리했다.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리는 1960년 4월19일의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편집자 주>

 


 

 

1950년 들어 서서히 높아져간 민주화에 대한 열망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로 마산에서 3.15시위 진행

강경진압에 전국적으로 퍼져…4.19 시민혁명 발생

최후 순간까지 버틴 이승만…독재자 최후의 몸부림

 

아! 슬퍼요/아침하늘이 밝아 오면은/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저녁놀이 사라질 때면/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아침하늘과 저녁 놀을/오빠와 언니들은/피로 물들였어요.

오빠와 언니들은/책가방을 안고서/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강도질을 했나요/무슨 나쁜짓을 했기에/점심도 안 먹고/저녁도 안 먹고/말없이 쓰러졌나요/자꾸만 자꾸만/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19일/학교에서 파하는 길에/총알은 날아오고/피는 길을 덮는데/외로이 남은 책가방/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엄마 아빠 아무 말 안해도/오빠와 언니들이/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배우다 남은 학교에/배우다 남은 책상에서/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뒤를 따르렵니다.

- 수송국민학교 학생 강명희의 시 <나는 알아요>

 

[사건의 내막=김범준 기자] 4.19혁명은 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에 시민들이 항거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일으켜 최종적으로는 이승만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제1공화국을 종식시킨 민주주의 시민 혁명이다. 또한 아시아에서 최초로 일어난 ‘시민혁명’이다.

    

민중혁명의 배경

 

6.25 전쟁이 휴전협정으로 막을 내린 지 불과 7년밖에 지나지 않은 1960년. 그때는 이미 국민들 사이에 민주주의를 향한 강렬한 열망이 들끓고 있었다. 민주화를 위한 요구는 적어도 5년 전부터 이미 있어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50년대에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어가며 잿더미가 되어 밑바닥까지 추락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도 못한 시점에서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위해 목숨을 버릴 사람은 찾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에 비참한 대한민국에서는 민주주의 정신이 국민들의 의식 속에 정착하고 있었다.

 

1950년대 당시 언론인들은 최대의 지식인 계층에 속했다. 친정부적 성격을 띤 <서울신문> 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논조는 이승만 정부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사회 참여적인 성격이 몹시 강했다. 각 언론사들의 주필들은 다양한 논설, 사설, 칼럼을 통해 민주적 가치를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환기하였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초기의 언론 자유에 대한 신념을 버리고 탄압 정책으로 전환했다. 그의 언론 탄압 이력은 적어도 1955년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때문에 당시 언론인들은 이미 언론에 대한 탄압과 정치깡패를 동원한 테러행위, 날조 및 공작행위에 질려하며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언론을 구독하는 국민들은 점차로 이승만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있었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현실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교육열이 높아진 것도 큰 이유가 됐다. 당시의 교육열은 사실상 ‘붐’ 에 가까운 것이었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국가 총예산의 평균 10.5%는 교육 관련 지출이었다. 그 외에도 국민학교(초등학교) 의무교육제가 채택되었으며 또한 빈민층일수록 학구열은 더욱 높았다. 이에 1945년에서 1960년까지 학생 수는 3배로 증가했고 ‘성인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문자의 독해율은 1945년 22%에서 1959년에는 79%로 급증했다.

 

그와 함께 초·중등 교육과정 중에는 자유 민주주의의 정신과 이상에 대한 교육이 반복적이고도 일관성 있게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대학교에 진학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매우 강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많은 대학생들이 생겨났다. 1945년 대학생 수는 7819명이었는데 1960년에는 9만7819명으로 무려 9만 명이 늘었다. 이는 한국과 국민소득이 비슷한 제3세계 국가에 비해 엄청나게 높은 비율이였다.

 

문제는 이렇게 대학교를 졸업한 ‘지식층’들이 일할 만한 일자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교는 예비 실업자 양성소인가’라는 자조적인 조롱이 유행하기도 했으며 업률이 무려 50%에 달했다. 사회 전체에 미래에 대한 비전을 딱히 찾을 수가 없었던 분위기였던 것이다. 또한 그 무렵 들어 미국도 점차 경제 원조를 삭감하고 있던 추세였다. 그래서 사회 전반의 전 세대에서 이승만 정부에 대한 지지를 조금씩 철회하고 있던 중이었다. 4.19 혁명은 바로 이와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촉발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이승만 대통령(가운데)와 그의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왼쪽). <사진=e영상역사관>     © 사건의내막

    

3.15 마산의거

 

이같은 사회분위기 속에 이승만과 자유당은 ‘사사오입 개헌’, ‘조봉암 진보당 사건’ 등 정권연장을 위한 갖은 부정을 저질렀으며 1960년 3월15일 대대적인 ‘부정선거’ 감행하게 된다. 이에 국민들은 본격적인 시위를 시작하게된다.

 

선거 당일 마산지부 민주당 간부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로 들어가 부정선거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하였으며 민주당 마산 지부는 최초로 선거 포기를 선언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개표도 안한 통에서 이승만이 기표된 용지가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투표하러 갔는데 표를 받지 못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민주당은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진행했는데, 이 과정에 경찰이 고등학생을 사람들 보는 앞에서 곤봉으로 폭행했다. 이에 마산시민들이 분노해 소요를 일으켰고, 그날밤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해 8명이 사망하고, 80여명 부상당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이같은 ‘3.15 발포 사건’이 발생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외신들 앞에서 “민주당은 수치스럽게도 그들의 패배를 은폐하기 위해 그런 수단을 강구하였던 것이며 따라서 그들이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킨데 대해 한국국민에게 보답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며 “수많은 한국 애국자들이 민주당의 전술과 공격에 대해 분개하고 보복을 원하였으나 그들은 경찰 당국에 의해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라는 뻔뻔한 대답을 했다. 이와 더불어 자유당 정권은 ‘공산당 사주설’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마산 사태가 벌어진 뒤 여론은 계속 험악해져 갔다. 특히 ‘3.15 마산의거’ 이후 마산 시내 분위기는 계속 을씨년스러웠다. 멀리 전라북도 남원에서부터 마산상고에 입학하기 위해 와있었던 상고생 김주열 군이 행방불명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3월15일 이후로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 어머니인 권찬주씨는 한 달 가까이 마산 거리를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연히 시민들의 입에는 김주열이란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었고 관심도 집중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해서 당시 마산시청 뒤에 있었던 저수지의 물을 몽땅 퍼내고 시신 수색을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4월11일, 김주열의 시신이 신포동 부둣가에서 발견됐다. 경찰 당국은 김주열의 시신을 도립병원(현 경상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마산의료원)으로 급히 옮기고 사실을 은폐하려 했으나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온 시내로 퍼졌다. 이에 흥분한 3000여 명의 시민들이 경찰의 저지를 뚫고 병원 안으로 밀려들어가 김주열의 사망을 확인했다. 김주열의 시신은 최루탄이 오른쪽 눈을 관통한 상태였다.

 

시신의 참혹한 몰골을 본 시민들은 당연히 분노했고 학생들이 제일 먼저 대열을 이루어 “살인선거 물리치자”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이때 안전을 이유로 교장이 직접 학생들을 인솔하고 나오는 풍경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 장면이 사진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되었고 전국판 신문에 실리며 타 지역의 시위열기에 다시 불을 붙였다. 중년 여성들의 시위 참여도 확산되었다. 이들은 “죽은 자식 살려내라!”, “차라리 우리도 죽여달라!”고 절규하며 시위대의 행진에 함께하였다. 특이한 점으로서 해인대학교 학생 5000~6000명 그리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까지도 시위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시민들은 학생들을 향해 박수를 보냈고 시위 대열에도 합류했다. 이윽고 성난 2만여 명의 시민들이 마산 경찰서와 시청에 난입하였으며 많은 관공서 건물과 차량들이 대파된다. 그날 밤 경찰은 또 발포를 했고 두 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이에 더 자극받은 마산 시민들은 3일간 거리로 쏟아져나와 시위를 벌였으며 마산의 행정은 온통 마비되었다. 정부에서는 2차 마산 시위를 공산당이 사주한 것이라고 몰아붙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같은 날 난동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소위 ‘대공 3부 합동수사위원회’를 구성, “적색분자들의 준동 혐의에 대해 과학적으로 수사하겠다”고 하는 한편 “이번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고도 했다.

    

피의 화요일

 

그러나 이같은 이승만 정권의 거짓된 발표는 오히려 시민들에 반발을 키웠다. 이에 시위는 전국으로 퍼져 나날이 시위는 커져갔다.

 

그리고 4월19일 화요일,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리는 그날에 시위는 서울, 대구, 부산, 마산, 광주, 제주 등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우선 서울의 경우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문을 나서자 여러 단과대생들이 합세하였고 서울 시내 대부분의 대학교, 이어 고등학교, 중학교 학생들까지 대대적으로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정부의 반공 프로파간다를 의식했는지 “데모가 이적이냐, 폭정이 이적이냐”,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등의 구호를 외쳤다. 즉 자기들은 결코 용공이 아니라는 구호다.

 

이날 정부에서는 귀가조치를 단행했으나 이미 10만 명 이상의 학생들과 시민이 몰려나왔고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를 가득 메울 정도가 되었다. 학생들은 각기 세 방향으로 나뉘어 국회의사당이 있던 태평로를 점거하고 면담을 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승만이 있던 경무대와 이기붕의 자택 쪽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경찰은 중앙청 앞에서 저지선을 형성, 공포탄과 최루탄을 발포하며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오후 1시 30분경,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기 시작했고 선두에 있던 여러 명이 쓰러졌다. 이때 발포로 인해 총합 21명 사망, 172명 부상당했다. 특히 경무대(현 청와대) 앞에서의 소위 ‘죽음의 행진’에서 피해가 워낙 컸다.

 

이날 서울에서의 총 사망자 수는 104명으로 이 중에 경찰 측 사망자도 3명이 포함되어 있다. 기타 지역의 경우는 부산의 경우 사망 13명 부상 60명. 광주는 사망 6명(경찰 1명 포함) 부상 70명. 그 외의 지역에서는 경찰의 발포가 없어 사상자가 없었다.

 

4월19일 날의 시위로 여론은 최악이었지만 이승만은 여전히 착각 속에 빠져있었다. 이승만은 4월20일 대국민 담화에서 “어제의 난동으로 본인과 정부 각료들은 심대한 충격을 받았다. 전 생애를 바쳐 온 애국적인 한국민이 그러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고는 거의 믿지 못할 일이다”라는 어이없는 수준의 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이에 최대의 우방 미국까지 이승만 정권에게 등을 돌리게 되는 사태를 맞이했다. 이렇게 미국이 등을 돌린지 얼마 안 되어 4월21일에는 국무위원이 일괄 사표를 냈고 23일에는 장면이 부통령 사임서를 냈으며 그 날 이기붕은 부통령 당선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날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 번 끓어오른 사회의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후 4월25일 대학교수들이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랜카드를 앞세워 데모를 하기에 이른다. 심지어 국민학생들도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를 하였다. 4월19일, 피의 화요일 때 서울수송국민학교 6학년 학생이었던 전한승(13세)군이 총에 맞아 사망했던 것이다.

 

또한 사태를 진압하라고 파견한 계엄군마저 이승만이 아닌 국민을 지키는 군대가 되었고 이후 시위대가 시위를 벌이는 곳에는 항상 탱크가 상징처럼 따라다녔다.

 

▲ 4·19 혁명 시위대에 대한 발포로 학생들이 희생되자 이승만 대통령(가운데)이 하야성명을 발표한 후 경무대를 떠나고 있는 모습. <사진=4.19혁명회>     © 사건의내막

    

승리의 화요일

 

상황은 이승만에게 명백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4월26일 화요일 아침, 김정렬 국방장관이 강경히 이 대통령에게 하야를 진언했고, 부인 프란체스카도 귀에 대고 결심을 재촉했으며, 4월25일 수석국무위원으로 입각한 허정도 하야를 권유했다.

 

이승만은 대학생, 미국대사, 시민대표 등과 면담 끝에 10시 20분경 드디어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사임할 것을 발표했다. 비슷한 시간인 9시 45분경 파고다공원에 몰려든 데모 군중이 이승만 동상의 목에 철사줄을 걸어 쓰러뜨렸다. 현재는 그 자리에 백범 김구선생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하지만 4월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갑자기 막무가내로 거부했다. 이미 방송으로 다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비서들의 잇따른 사임서 사인 요구에 버텼다.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늙은 독재자에 최후의 몸부림인 것이다. 주변인들이 나서서 또 촉구했지만, 이승만의 대답은 역시 사임하면 온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허정이 질서를 확고히 유지할 수 있다고 역설하자 그때서야 어쩔 수 없었던지 사임서에 사인을 해 국회에 제출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4월27일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고 국회는 이 대통령 즉시 하야, 정부통령 선거 재개, 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고 다음날 오후 3시에 국회에 제출된 이 대통령 사임서가 즉시 수리되었으며 헌법 규정에 따라 수석국무위원인 허정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되어 후에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같은 민주화의 대한 열망은 몇 년지나지 않아 5.16 군사반란을 일으킨 박정희에 의해 무참히 무너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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