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진실
지역·세대 갈등의 시발점 ‘5·16 쿠데타’
박정희가 만든 ‘갈등의 벽’…“불통의 역사는 이어졌다”
김범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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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5/16 [09:14]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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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따스함이 온 땅에 퍼지는 5월은 ‘가정의 달’ 이라고 불린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뿐만 아니라 근로자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 등 가족과 관련된 기념일 들이 모여있는 달이기 때문다. 하지만 5월은 한국 근대사 뒤흔든 두 가지 대형 사건이 있었던 달이기도 하다. 5·16 군사정변과 5·18 민주화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5·16 군사정변은 파면됐던 전임 대통령인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가 정권을 잡기위해 일으킨 쿠데타로 아직까지도 찬반이 갈리며 5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2012년 대선 당시 ‘훗날 역사가 평가해 줄 것’이라고 대답을 미뤘지만 역사는 평가하지 못하는 것이다. <편집자 주>

 


 

 

30여 년간 군사독재 정권시작 계기가 된 5· 16 군사정변

젊었을 때부터 정치적인 기질 강해 좌천까지 됐던 박정희

국가 장악 성공한 후 사회 안정공약…민간이양 약속 어겨

‘쿠데타’ 규정된 현재까지도 찬반 나뉘면서 국론분열 시켜

 

▲ 5.16 쿠데타 후 혁명공약을 발표하는 박정희     © 사건의내막

 

[사건의 내막=김범준 기자]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해,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서 군사혁명 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이 이상 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 혁명 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民生苦)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애국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본 군사혁명 위원회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동요 없이 각인의 직장과 생업을 평상과 다름없이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이 순간부터 우리들의 희망에 의한 새롭고 힘찬 역사가 창조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단결과 인내와 용기와 전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육군 중장 장도영”

    

쿠데타와 박정희

 

위에 글은 지난 1961년 5월16일 군사정변을 성공시키고 나서 방송국을 장악한 쿠데타 세력이 발표한 혁명공약의 전문이다. 5·16 군사정변은 대한민국 육군 소장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8기 출신 군인들이 무력으로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강탈한 쿠데타다.

 

물론 전문을 보면 알다시피 당시에는 ‘혁명’으로 칭해졌고, 군사정권이 무너지기 전까지 ‘혁명’이었다. 이같은 군사정변은 장장 18년 간의 박정희 장기 집권 및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32년 간의 군사 독재 정권이 사실상 시작된 날이다. 5·16 쿠데타를 계기로 군부는 한국의 정치 무대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이후 30여 년 동안 한국의 정치·사회 등 모든 분야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여 왔다. 결국 5·16 군사정변은 어떤 의미로든 한국의 현대사를 송두리채 바꾼 날로 볼수 있을 것이다.

 

5·16 군사정변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살펴봐야 한다. 1960년에 일어난 4.19 혁명 이후 대한민국은 이승만 대통령 하야 당시 외무장관이던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내각이 구성되었다. 당시 허정 내각은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각계 각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개혁 정책을 펼치고자 했으나 10년이 넘는 독재정치가 한국사회에 남긴 해악은 너무나 지대했고, 사방팔방에서 터져나오는 국민들의 요구에 모두 응하지 못했다.

 

이후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를 중심으로 제2공화국이 성립되었지만 여전히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경제는 나아진 것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집권여당인 민주당의 신·구파간 갈등이 빚어지며 정치권의 밥그릇싸움이 격화되자, 국민들은 이러한 현상에 크게 실망하여 장면 내각을 성토하는 데모가 연일 끊이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한의 대남 도발이 슬슬 발동이 걸리기 시작하자 정부에 대한 불신은 한층 높아지게 된다. 게다가 이때 비대해진 군부에서 인사적체 등으로 승진이 막혀버린 육사 8기생 등 중견장교들의 불만이 극심했다.

 

육사 8기의 중심에는 당시 육군 소장이었던 박정희가 있었다. 박정희는 여순 반란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모든 것을 자백하고, 백선엽이나 원용덕과 같은 만주군 출신 군인의 옹호로 사형은 면하고 예편되는 것으로 정리됐다. 다만 박정희는 민간인 신분으로 육군본부 정보국 문관으로 재직하긴 했다. 이 와중에 박정희에게는 다행으로 한국전쟁이 발발, 소령 계급을 달고 군인으로 복직됐다.

 

그 후 순조롭게 군생활을 이어가면서 준장 소장으로 차례로 진급했고, 6군단 부군단장, 군수기지사령관, 육본 작전참모부장 등의 요직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쿠데타 당시에는 2군사령부(현 제2작전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재직 했다. 그런데 사실 군에서의 부사령관은 예비 예비역 즉 나갈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이유는 군생활 동안 박정희는 정권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찍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박정희의 정치적인 기질에 기인하였는데 제일 먼저 남로당(1946년 서울에서 결성된 공산주의 정당) 전력이 있었다. 이후 군에서 조용히 기회를 엿보던 박정희는 1960년 3.15 부정선거가 터지자,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을 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에 포항에 주둔한 김동하 제1 해병대 상륙 사단장과 공모하여 서울을 칠 계획을 꾸몄지만 4.19 혁명이 터지면서 이 역시 종이 위의 구상에 그쳤다. 하지만 박정희는, 1960년 5월2일, 당시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을 위시로 한 수뇌부에 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요구하기도 했으며 김종필을 필두로 한 육사 8기생의 연판장이 돌아 수뇌부의 불신을 천명하자 박정희에게 이를 갈면서 그를 박살내려던 송요찬은 실각했고 군 수뇌부는 붕괴했다.

 

어쨌든 박정희가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인 기질은 육군본부로 하여금 그를 경계하게 했고 박정희가 쿠데타니 어쩌니 소리를 하고 다니자 아예 그를 좌천 또는 예편시킬 구체적인 입안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의 과거 좌익에 가담했던 경력이 발목잡아서, 결국 육본 작전참모부장에서 2군부사령관으로 좌천당한다. 그러나 이는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오히려 결심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볼때 박정희는 대외적으로는 4.19 혁명 이후의 사회불안 때문에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부득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었다고 해명했지만, 실제로는 이미 그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쿠데타 구상을 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쿠데타 세력은 이승만 정권 말기부터 여러차례 쿠데타를 준비했었고 제2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1961년 4월 19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박정희는 4.19 혁명 1주년을 맞이하여 분명히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날 것이고, 이러면 사회혼란을 명분삼아 자연스레 군이 출동하는 시나리오를 세웠다. 하지만 4월19일에는 대규모 시위나 혼란상황도 전혀 없는 등 잠잠한 하루였다. 즉, 이 때 쯤에는 4월 혁명의 흥분에서 벗어나서 사회가 안정화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황한 박정희는 쿠데타를 연기했으나 시간이 지체되면서 조금씩 계획이 누설됐다. 결국 민주화 촉진 대회로 인해 혼란이 생기자 5월16일 박정희 소장은 청와대, 방송국, 육본을 위시로 한 서울의 주요 기관을 차례로 점령하기 위해 육사 8기생, 해병대, 육군 공수특전단, 6군단 포병대 등을 동원한다.

 

당시 재빠르게 주요기관을 점령한 쿠데타 세력은 새벽에 중앙방송국(현재 KBS)을 점령하였고 아침에 박종세 아나운서의 낭독으로 혁명공약을 방송하였다. 혁명공약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의 명의로 발표되었으나 실제로는 김종필이 초안을 잡은 것이라고 한다. 결국 하룻밤동안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지라 당시 주민들은 “자고 일어나니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어 있었더라”는 증언들이 자주 회자되고는 한다.

 

한편 5·16 쿠데타의 소식을 들은 당시 육군 대위 전두환은, 쿠데타가 누구의 주도로 이루어진지 며칠간 주도면밀한 조사를 한 끝에 박정희와 그 측근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에 육사 교장에게 사관생도들이 5·16 쿠데타를 지지하는 퍼레이드를 하는 것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교장은 생도들이 정치에 관여할 수는 없다면서 거부했다. 결국 전두환은 끈질긴 설득 끝에 퍼레이드를 강행했고, 이후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를 받는 심복이 되어 또다른 쿠데타인 12.12 군사반란을 저지르는 유명한 불법 사조직 하나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 박정희는 5.16 쿠데타 이후 연이은 개헌을 통해 ‘독재자’로 변모하게 된다. 사진은 72년 대통령 취임 우표     © 사건의내막

    

당시의 반응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박정희 군사정부는 “조국재건최고회의” 라는 조직을 설립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바로 당시 사회를 혼란 시켜왔던 이정재 등을 처형한 정치깡패 재판이 있었다. 이같이 혼란스러운 사회를 일단은 안정시켰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한테는 큰 저항감이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후일 박정희와 대립하며 ‘재야 대통령’이라고 불렸던 장준하 같은 경우 초기에는 5·16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뒤, 사회가 안정을 찾고도 내려올 생각을 안하자 이를 무너뜨리기 위한 여론을 조성하려다 포천의 어느 야산 절벽에서 의문의 실족사했다.

 

이처럼 장준하를 포함한 당시 지식인들은 장면 정권을 수호하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거의 유일한 예외가 바로 개신교인 논객이자 사상가였던 함석헌으로, 그는 딱 잘라서 “혁명은 민중이 하는 거지, 군인은 혁명 못 한다”며 쿠데타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 외에 다른 예로는 그나마 경향신문 한창우 사장이 비난했으나 쿠데타 세력의 응징을 받았다. 사실 쿠데타를 바라보는 지식인들의 시선은 적잖이 복잡했다. 어떤 이들은 드디어 기득권이 청산된다며 기대감을 보인였고, 또 어떤 이들은 반공 친미 노선에 상당히 안심하기도 했다.

 

즉, 전반적으로 볼 때 쿠데타를 평가하는 그들의 목소리는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시대상 자체가, 군부의 쿠데타에 대해 당시 지식인들이 긍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당시 제 3세계에서 발생한 군사쿠데타는 대부분 민족주의적, 개혁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집트의 나세르, 미얀마의 네윈, 이라크의 꽁레 등의 쿠데타를 들 수 있다. 게다가 5·16 쿠데타의 주역들이 제 3세계 쿠데타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소장파였다는 사실 역시, 지식인들에게 기대감을 크게 했다.

 

물론 이런 분위기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불과 1년이 지난 1962년만 해도 그런 분위기는 많이 희석되었다. 1962년 4월16일자 연세춘추에서 실시한 대학생 여론조사에 따르면 5·16 쿠데타의 의의가 “국민의 민의” 라는 응답은 불과 9.7%였던 반면, “정치적 혼란의 결과”라는 응답은 무려 73.3%에 이르렀다.

 

북한의 경우 쿠데타 당시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한때 통일 협상의 희망을 품고 박정희의 형의 친구이자 무역상 차관이었던 황태성을 밀사로 보냈다. 하지만 미국에 대한 반공을 과시하기 위한 박정희에 의해 밀사만 사형당했다. 결국 이로 인해 남북관계는 다시금 냉랭해지게 됐고, 박정희를 공산주의라고 주장한 인물들은 대거 숙청당하기도 했다.

 

미국은 5·16 쿠데타 열흘 전쯤 한국의 상황을 보고 한국과 한국국민은 병이 들었다며 비관적으로 표현했고, 정부 언론 교육 종교 기업의 구조가 모두 부정부패로 연결돼 있으며 한국인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망상 속에 살고있다며 비판했다. 여기에 미국은 무기력한 장면 정부는 위기를 대처할 능력이 없으며 조만간 민중의 폭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고, 또 “이런 노력이 실패해 장면 정부가 무너지면 최악의 군사정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미국은 한국의 개혁을 직접 조종해야 한다며 특사와 보좌관을 한국에 보내 경제권과 인사권을 장악하고, 장면 총리 뒤에서 한국을 개혁해야 한다는 막후통치를 검토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고 존 F. 케네디 대통령도 여기에 동의하고 한국에 대한 막후통치안을 수립하려는 참에 5·16 군사정변이 터지고 무산되었다.

 

미국의 경우, 처음에는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가 장면 정권을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냈고, 이후 윤보선을 찾아서 “미군 및 4만명 정도의 국군을 동원하여 서울을 포위해버린 다음 심리전으로 반란군을 동요시키면 총 한방 쏘지 않고 반란군을 진압 할 수 있다”며 윤보선을 설득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반란군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면서 그러면 서울에서 시가전이 벌어진다며 반대했다. 결국 둘은 한동안 우왕좌왕하다 1군 사령관 이한림에게 진압하지 말것을 지시하면서 진압작전은 포기되었다. 나중에 12.12 군사반란이 터졌을 때도 반란군과 정면으로 부딪히면 서울이 전쟁터가 된다고 적극적인 대응을 못했다.

 

이후 군 전반에서 쿠데타를 인정하는 것으로 분위기가 전환되고,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나서서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을 벌이자, 미국은 쿠데타 불개입으로 입장을 바꿨다. 이후 국무성의 명의로 “한국의 정변은 반미 정권의 등장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국은 신정권을 승인할 것이다.”라는 성명을 발표함으로 쿠데타를 인정했다. 물론 여기에는 박정희가 적극적으로 친미 노선을 표방한 덕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 5.16 기념 사진전. 박정희는 정권의 정당성을 위해 끝없이 국민들을 세뇌했다. <사진=e영상역사관>     © 사건의내막

    

세대·지역갈등 시작

 

이처럼 당시 일반국민과 지식인, 미국 등의 동의를 얻어 정권 장악에 성공한 5·16 쿠데타 집권세력의 혁명공약은 당초 몇 달 이내에 민정 이양을 한다는 것이었다. 몇 달 이상 미루어지다가 헌법 개정과 대통령 선거를 거쳐 제3공화국이 성립하게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건이 약 20년 뒤 되풀이되고, 군사 독재정권은 주인만 바뀌면서 계속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대를 이은 장기간의 군사독재는 몇 십 년간 참아왔던 국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1987년 6월 항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이후 한참의 시간이 흘러 5·16 군사 쿠데타 50여년이 지난 2012년 당시 대선후보 였던 박정희의 딸 박근혜 전 대통령은 쿠데타가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다며 훗날 역사가 평가해줄 것이라는 발언으로 논란을 키운바 있다. 공교롭게도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당시 득표율 51.6%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게다가 대선이 있었던 2012년 12월은 1961년 5월 16일로부터 대략 51.6년 후다.

 

한편, 요 몇년사이 여론조사 결과들을 살펴보면 5·16 쿠데타를 긍정적 및 부정적으로 보는 인구가 절반으로 갈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령대별로 보면 20대, 30대에서 비공감이 많았고, 40대부터 공감하는 의견이 더 높아졌으며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공감한다는 의견의 비율이 높았다. 지역별로는 수도권에서 공감과 비공감이 비슷한 비율이었고, 호남에서는 비공감이 다수였으며 박정희의 고향인 대구경북을 포함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공감한다는 의견이 다수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같은 설문조사 결과에 대해 한 정치평론가는 “우리나라 지역·세대갈등은 과거에도 있어왔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 이후 지금까지 더욱 심화돼 온 면이 있다”며 “5·16 군사정변 수장의 딸 박근혜가 정권을 잡았었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진정성있는 대화을 통해 갈등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지지층 규합을 통한 권력 강화에만 관심이 있었고, 결국 그 역풍을 받아 탄핵으로 무너졌다”고 평했다. 이어 “미래로 가지 못하고 과거로 회귀한 듯한 ‘박근혜 식’ 통치로 인해, 그의 아버지 ‘박정희 쿠데타’도 결국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penfre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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