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따스함이 온 땅에 퍼지는 5월은 ‘가정의 달’ 이라고 불린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뿐만 아니라 근로자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 등 가족과 관련된 기념일 들이 모여있는 달이기 때문다. 하지만 5월은 한국 근대사 뒤흔든 두 가지 대형 사건이 있었던 달이기도 하다. 5·16 군사정변과 5·18 민주화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향후 우리나라 민주정권 수립의 시발점이 됐고, 그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이 될 정도로 ‘세계적인 민주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같은 숭고한 희생에 대해 일부 극우세력들은 당시 전두환 신군부의 논리와 같은 ‘빨갱이’를 주장하고 있어 눈살을 찌푸려진다. <편집자 주>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 커다란 기여 한 ‘5·18 민주화운동’
박정희 사후 커진 민주화 요구…학살 자행된 5월 빛고을
시민과 계엄군 모두 피해자…미국 대한 새로운 관점제기
전두환 정권 옹호하며 벌어진 만행 부정하는 극우세력들
▲ 5.18광주민주화항쟁하는 민중들 <사진=KBS 뉴스 갈무리> © 사건의내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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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내막=김범준 기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위에 노래가사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공식 지정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백기완 시인의 시 ‘묏비나리’를 소설가 황석영이 다듬어 가사로 만든 것이다. 이 노래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했고 마지막 날 전남도청에서 숨진 윤상원과 1979년 겨울 노동현장에서 일하다 숨진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내용으로 하는 노래굿 ‘넋풀이’를 통해 처음 발표되었다.
그 뒤 1982년 제작된 음반 <넋풀이-빛의 결혼식>에 수록되면서 널리 알려졌고 민주화 운동은 물론 진보 계열의 시민사회단체, 노동단체, 학생운동단체 집회에서 널리 불렸다. 이는 주로 집회 시작시 국민의례 대신 민중의례를 할 때 그 일부로서 포함된 것이다. 국민의례 때 애국가가 불리는 것처럼 이 곡이 불렸고 무엇보다 1980년 광주가 운동세력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항쟁까지 과정
이같은 한국 민주화에 굉장히 큰 기여를 했고,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친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조짐은 사건이 벌어지기 반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1972년 10월 유신에 의하여 종신 집권 체제를 구축한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 유신정우회, 긴급조치 등을 수단으로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한국을 지배했다.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던 유신 체제는 1979년 10월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가 사살되면서 막을 내린다. 박정희의 사망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 국무총리는 10월27일을 기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같은해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완전 장악한다. 이때 대학방학을 이유로 이 쿠데타에 대한 지식인 계층의 대처와 항명서는 뒤늦게 이어진다. 결국 대학가가 개학을 맞이한 3월에서야 신군부에 의한 군부장악과 안개정국에 대한 사항이 알려지게 되었고, 1980년 4월부터 이를 규탄하기 위한 집회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더해서 군사훈련반대 움직임이 일어난다. 유신정권당시 대학교 1학년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군사훈련을 받아야했다. 박정희가 죽은 이 때 학생들은 당연히 이 불합리한 훈련에 반발했다. 그러나 이 반발은 어찌어찌하며 가라앉았고, 총학생회는 훈련장으로 가는 후배들을 독려했다. 이 와중 당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현 자유한국당 의원)은 “정부에서 안개정국을 해결하지 않으면 학생들은 실력행사에 나설 수밖에 없다”라며 5월13일을 그 한계로 못 박았다.
의도한 발언이었는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았으나 학생회의 이 발언은 곧 전 대학으로 퍼졌고, 예정된 날 운동권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온 ‘서울의 봄’이 시작된다. 특히 이는 5월15일에 절정을 이루어서, 서울역 광장에는 서울 32개 대학에서 약 10만 여명의 학생과 군중들이 모였다. 잘하면 청와대까지 진출할 분위기였다.
그러나 심재철 서울대 총학생회장은, 잘하면 민주화에 성공할 기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수부대가 왔다는 소문에 해산 결정을 내리게 된다. 당시 서울대 대의원회 의장이었던 유시민(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 반발하는 학생들도 있었으나, 대다수는 귀가하였고 마지막까지 남았던 고려대가 해산하며 서울의 봄은 일단락 지어졌다. 이에 자신감이 붙은 전두환 정권은 대학생들의 해산 후 5월17일자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 주모자들을 기습적으로 체포했다. 이 사건을 서울역 회군이라고 하여 민주화를 10여년 뒤로 늦춘 사건으로 평가된다. 일각에서는 이 사건이 역사에 끼친 영향을 위화도 회군에 맞먹게 크게 평하기도 한다.
이처럼 1980년 4월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학생들의 민주화투쟁과 소위 사북사건등으로 대표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국회에서도 비상계엄 해제를 논의하기 위한 본회의 개최를 결정하게 되자 신군부는 이를 막고 정권장악을 기도하게 된다. 그리하여 전두환, 노태우 등의 압박으로 열린 비상국무회의에서 1980년 5월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단행하였다.
계엄사령부는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및 옥내 외 집회 시위의 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직장이탈 및 태업파업의 금지 등의 조치를 취했다. 5월17일 새벽에 계엄군은 전국 대학교의 학생운동권 관련 학생들을 모조리 검거했고, 5월18일에는 김대중, 김종필 등 26명의 정치인을 학원, 노사분규 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혐의로 연행하고 김영삼을 연금시키는 등 초법적 사태가 일어났다. 국회 또한 폐쇄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헌법에 규정된 국회통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계엄군을 동원,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한 채 취해진 불법조치였다.
이후 전두환 정권은 광주에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고 비상계엄의 확대에 따라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여단이 5월17일 저녁 10시경 광주에 투입되어 전남대, 조선대, 교육대 등에 진주했다. 5월14일 광주에서 민주대성회라는 이름의 시위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남대학교 학생회장인 박관현이 연설을 한다. 민주대성회로 일어선 학생들은 5월15일 서울에서 큰 시위가 열렸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호응하여 5월16일에 학생들은 거리 시위로 나서고, 이것이 훗날 촛불집회 때도 알려진 횃불시위이다. 이 시위는 별다른 충돌 없이 조용히 끝났으나, 여기서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회 측은 만일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학교서 만나자는 행동지침을 내렸다.
5·17비상계엄 전국 확대로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 정문 앞에서 5월 18일 10시경 등교 중이던 전남대생들과 출입을 제지하는 계엄군 사이에서 최초의 충돌이 발생하였다. 무장 계엄군의 통제에 항의하는 학생 수는 삽시간에 100여명으로 불어났고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엄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에 계엄군은 폭력진압으로 맞섰다.
이 일로 학생들은 계엄군에게 쫓기면서 시내로 나와 시위를 시작했다. 이에 계엄군은 오후 3시부터 시내로 투입되어 진압을 시작하였다. 계엄군은 도청 앞과 금남로에 진출하여 시위 학생 뿐만 아니라 시위와 무관했던 일반 시민들까지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하였고 3∼4명이 한조가 되어 시위현장의 주변 건물까지 샅샅이 뒤지며 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심지어는 여관에서 머무르고 있던 외지인까지 끌려나왔고 광주 공용터미널에서 청각, 언어 장애인이 대답을 안한다는 이유로 계엄군에게 구타당해 사망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러한 폭력에 광주 시민들은 분노하였고, 이것이 학생과 시민이 연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시민들의 대규모 저항에 긴장한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발포하는 등 강력하게 탄압해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광주 시민들은 10여일 간 처절한 저항을 벌였다. 항쟁 10일째인 1980년 5월27일 0시. 계엄군이 시내의 전화선을 차단하고 진압작전에 돌입했다. 새벽 3시에 한 여성이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다며 우리를 도와달라는 애절한 내용의 가두방송 소리가 광주시내 곳곳에서 들려왔다. 새벽 4시가 되자, 계엄군은 전남도청 앞을 완전히 포위했고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결국 아침이 되면서 광주시 전역은 계엄군에게 장악되었고 5·18민주화운동도 막을 내렸다.
당시 발표한 공식 피해자는 121명이었으나, 후에 192명으로 수정 발표되었다. 부상자 또한 공식 집계로 852명이었으나, 수없이 많은 실종자가 발생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 수치는 최소 집계에 불과하다. 사건당시의 신군부의 통제로 인해 언론매체는 ‘광주 사태’로 칭했으나 군부 정권이 끝난 이후 진상 조사가 이루어져, 광주사태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소위 신군부가 주장했던 ‘광주 사태’ 이후로 전두환 군부정권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은 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이외에도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선언을 한 직후, 8월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
▲ 광주에 들어서는 계엄군 <e영상역사관> © 사건의내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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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쟁의 영향
이같은 5·18 민주화운동은 전두환의 군사독재에 대항해서 일어난 시위가 진압군과의 격한 대립 끝에 광주에 진입하려는 진압군과 광주 시민들의 총격전으로 발전했다. 결국 이들은 진압되지만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군사정권에 의한 인권탄압과 민간인 살해 사례로서 많이 알려지게 된다. 물론 이정도로 설명하기에는 당시 상황과 이후 여파가 굉장히 크다. 이 일련의 사태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의 일부로서, 군부 독재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희생으로 의미가 재부상했다.
당시 계엄군으로 투입된 특전사 대원들에게도 당시 사건은 지우고 싶은 암울한 기억이다. 이들은 그 당시 시대사적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상부로부터 ‘빨갱이를 때려잡으러 간다’는 대의명분을 갖고 이를 수행하였다. 또한 진압당시 학생과 시민들을 진압하다 점점 폭력의 수위가 상승, 같은 나라 국민을 상대로 총뿌리를 겨누는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을 다수 겪었다.
진압작전에 참가했던 계엄군들이 갖고 있던 “빨갱이로부터 나라를 지켰다는 긍지와 자부심”은 나중에 진실이 하나둘 밝혀지면서 “군사독재 정권의 앞잡이” 내지는 “잔인한 학살자”라는 불명예로 돌아왔다. 실제로 당시 계엄군의 상당수는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등 다양한 정신적 문제를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결국 양측 모두에게 심각한 상처로 남게 되었다.
결국 전두환과 신군부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민주화운동이 진압되었으나 이는 도리어 전두환 정권의 원죄가 되고 말았다. 5·18은 87년 6월 항쟁까지 이어지는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80년대 학생운동에 뛰어든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학생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는 수많은 386 인사들이 증언하는 바이기도 하다.
또한 5·18 민주화운동 이후로 미국의 대한 새로운 관점이 나오게 됐다.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민들은 미국이 광주시민들을 도와주러 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은 아직 광주에서 대피하지 못한 자기 국민 130명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항공모함을 파견한 것뿐이었다. 미국은 전두환에 대해서는 별다른 가치판단을 벌이고 싶지 않았고, 도리어 박정희 시절 개발되던 핵 포기 등으로 말이 통하는 상대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의 민주주의는 후차적인 문제였다. 당장 소련이 뒤를 봐주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판국에 민주주의보다도 정권의 안정을 중요시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이 반정부 시위로 정권이 바뀌는 사태를 원하지 않았을 테고, 때문에 이를 알고서도 방관하거나 유사시 미군을 투입해 정권을 지키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혹을 사고 있다.
진보계열에서의 5·18은 향후 민주화운동 불길을 당겼다는 평가와 함께, 미국의 본질을 깨닫게 해준 민중항쟁이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1980년 5월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 대한 인식은 한국전쟁에서 우리 측을 도와준 우방국이라는 개념이었고, ‘민주주의의 나라’이자 ‘가난을 구원해준 나라’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사례로, 남미 등에서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다는 이유를 대면서 인권유린 하는 군사 독재자들에게 지원을 해줬다.
당시 미국이 신군부와 결탁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 증거들이 발견되었다. 당시 평상시 군 통제권은 대통령이 아니라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주어져 있었는데 신군부가 쿠데타를 위해 군대를 일으킨 것, 또 5·18 당시 계엄군을 이동 통솔시킨 것은 사전에 미국의 허락을 받지 않고 불가능 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군사 결정권은 미국 총사령관에게 있었고, 전두환 독단으로 군을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외신들은 광주 사태이후 위컴 사령관이 유감을 표했다며 의례적인 제스쳐를 보여주었으나 지식인들은 이미 미국에 깊은 실망을 느낀 후였고, 이러한 반미 성향은 서울 미문화원 점거 사건과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 등으로 이어진다.
86년에 지어진 운동권 가요 ‘반전반핵가’에서 ‘양키 고 홈’ 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과, 5월의 노래에서 ‘양키놈 솟은 콧대야’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에서 이러한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반미 성향에 80년대 운동권을 휩쓸었던 마르크스의 철학사상 등이 결부되며 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나타나게 된다. 또한 민족끼리 해결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며 80년대 후반에는 반미+친북 성향이 강하게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 광주 학살의 주범, 전두환은 최근 자서전에서도 ‘폭동’으로 규정함으로서 국민적 지탄을 받았다. <사진=SBS ‘그것이 알고싶다’ 캡쳐> © 사건의내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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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론자의 논리
이같은 진보 운동권들이 높게 평가하고 미국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다는 이유로 인해 우리나라 일부 극우 세력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 자체를 부정하는 움직임을 많이 보이고 있다. 특히, 가장 많이 주장하는 것이 ‘북한 개입설’이다. 하지만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 등 세계적인 평가를 받았다.
당연히 당시의 기록물이 보존되어 있고, 피해자 유족들이 생존해 있으며, 따라서 역사적 및 사회적 평가가 모두 끝난 상태이다. 또한 1980년대, 국방부도 북한의 개입은 없다고 1980년대에 이미 인정했다.
그러나 2012년 대선 이래로,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일부 극우세력들에 의하여 이러한 5·18 민주화운동이 “북한이 개입한 폭동” 으로 비하되고 있어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주고 있는 상황이다. 이들의 주장은 크게 북한의 간첩이 5·18에 개입했다는 주장과, 민주화운동이 아닌 폭동이라 불러야 한다는 주장의 두 가지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지난 2013년 5월경 TV조선 및 채널A 두 곳의 보수성향의 방송사에서 이와 같은 근거 없는 주장을 그대로 보도함으로 인해 다시 사회 여론의 지탄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국가에서 이미 공인하고 판결이 난 증거자료에 대해 부정한다는 측면, 민주화운동이라고 판결난 상태에서 폭동설을 가설이 아닌 진실이라고 우기는 태도,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근거는 우익 중에서도 극우로 평가받는 ‘뉴라이트’ 등의 주장이다.
이들 주장에는 광주운동에 대한 진입으로 ‘헌법적’ 처벌을 받은 전두환과 신군부에 대한 옹호가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 극우계열 인터넷 커뮤니티를 살펴보면 폭동설이 당연하다는 듯이 다뤄진다. 이들은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면 ‘좌빨’이라고 비난하며, 전라도에 대한 지역비방까지 서슴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우익계열 모두가 이 설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는 대표적인 극우 언론인으로 평가받지만 1980년 당시 이 현장에 직접 잠입취재까지 했던 조갑제 당시 부산국제신보 기자는 5·18에 대해 “빨갱이들 일으킨 폭동이 절대 아니라 이건 민주화운동이다”라고 강변했으며 다른사안들은 몰라도 5·18이 민주화운동이란 것만은 부정하지 않고 있다. 군사정권의 딸이자 보수 세력의 상징인 박근혜 대통령 역시 5·18은 민주화운동이 맞다고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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