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의 막후
인간의 삶에서 질병의 의미란?
많이 아파 본 사회학자의 통찰 “질병은 싸워야 하는 대상이 아니더라”
김범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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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7/21 [10:32]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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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 대학에서 의료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1975년부터 캐나다 캘거리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친 아서 프랭크(Arthur Frank)는 아프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유려한 글로 밝혀내 주목을 끈 바 있다. 사회학 교수로 젊고 건강했던(건강해 보였던) 그는 39세에 심장마비를 겪고 그 다음 해에는 고환암 진단을 받았다가 수술과 화학요법을 통해 회복한다. <아픈 몸을 살다>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프랭크 교수의 책은 질병(고환암)의 증상-시도해본 치료법-치료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과 고통-치료 성공과 일상으로의 복귀-다른 암환자들을 위한 조언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등 질병 경험에 대한 ‘서술’을 넘어 질병 경험에 대한 ‘사유’로 눈길을 끌고 있다. 프랭크 교수 자신이 질병을 경험하면서 배운 것들을 짚어가며 인간의 삶에서 질병의 의미를 묻고 재의미화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질병은 의료용어가 아니라 “삶의 모든 측면 건드리는 것”

죽음 가까이 가는 질병이란 여행은 위험하지만 또한 모험

질병의 궁극적 가치는, 살아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는 점

아픈 사람 진정한 책임은 고통 목격하고 경험 표현하는 것

 

▲ 병이 가져오는 위험 중 가장 명백한 위험은 경계를 넘어가 죽는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     © 사건의내막

 

[사건의 내막=김혜연 기자] “나는 목숨을 위태롭게 한 질병을 두 번 겪었다. 서른아홉에는 심장마비, 마흔에는 암이었다. 지금은 많이 회복된 상태다. 그렇다면 왜 굳이 과거로 되돌아가서 이 병들에 관해 쓰고 있는 걸까? 위험한 기회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질병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붙잡으려면 질병과 함께 조금 더 머물러야 하며 질병을 통과하면서 배운 것을 나눠야 한다.”

 

사회학 교수로 젊고 건강했지만(건강해 보였지만) 39세에 심장마비를 겪고 그 다음 해에는 고환암 진단을 받았다가 수술과 화학요법을 통해 회복한 아서 프랭크 교수의 말이다.

 

그는 “심각한 질병은 우리를 삶의 경계로 데려가고, 그곳에서 우리는 삶이 어디에서 끝나버릴 수도 있는지 본다”면서 “경계에서 삶을 조망하면서 우리는 삶의 가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해보도록 허락받는다. 여전히 살아 있긴 하지만 일상에서는 멀어져 있기에 마침내 멈춰 서서 생각해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위험한 기회, 질병

 

“병이 가져오는 위험 중 가장 명백한 위험은 경계를 넘어가 죽는 것이다. 이 위험이 제일 중요하며, 또 언젠가는 이 위험을 피할 수 없는 날이 오고야 만다. 하지만 피할 수 있는 다른 위험이 있는데, 바로 질병에 집착하게 되는 위험이다. 질병을 자신과 마주하지 않고 또 다른 이들과 마주하지 않으면서 뒷걸음질 치는 핑계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질병은 계속 매달리고 있을 만한 무엇이 아니다. (할 수 있다면) 그저 회복하면 된다. 그리고 회복의 가치는 새로 얻게 될 삶이 어떤 모습일지 얼마나 많이 알아가느냐에 달려 있다.”

 

“회복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내 경우에 심장마비 이후의 회복이란 아팠던 경험 전체를 뒤에 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건강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반면 암은 이런 식으로 회복할 수 없었다. 아직도 진찰을 받을 때마다, 보험 서류를 작성할 때마다 암에는 차도가 있을 뿐이지 ‘완치’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하지만 암이라는 질환의 생리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암 경험이 미친 영향이다. 암을 앓고 난 후에는 예전에 있던 곳으로 전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변화의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기엔 너무도 비싼 값을 치렀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고통을 보았고, 특히 젊은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은 갖기 어려울 수도 있는 어떤 관점에서 고통을 보았다. 삶이라는 게임을 이전과 같은 조건으로 계속할 수는 없었다. 예전의 나를 회복하기보다는 앞으로 될 수 있는 다른 나를 발견하고 싶었다.”

 

프랭크 교수가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듯이, 한 개인에게 있어 질병은 의료용어들로 설명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삶의 모든 측면을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프랭크 교수가 질병을 통과하며 겪고, 관찰하고, 화제로 삼는 내용들도 다양하다.

    

질병은 “위험한 기회”

 

“암을 앓고 난 후에는 예전에 있던 곳으로 전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변화의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기엔 너무도 비싼 값을 치렀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고통을 보았고, 특히 젊은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은 갖기 어려울 수도 있는 어떤 관점에서 고통을 보았다. 삶이라는 게임을 이전과 같은 조건으로 계속할 수는 없었다. 예전의 나를 회복하기보다는 앞으로 될 수 있는 다른 나를 발견하고 싶었다.”

 

“아픈 사람들은 할 말이 많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어떤 희망과 공포를 품고 있는지 듣게 되는 경우는 드물다. 통증 속에 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아픈 사람이 자신의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리고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질환을 논할 때 ‘객관적’인 이야기는 언제나 의학의 이야기다. 환자는 질환 용어를 사용해서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재빨리 배우지만, 의학의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면서 아픈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는다. 내가 경험하는 내 몸은 다른 누군가가 측정하는 그 몸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맞닥뜨린 삶의 위기,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통증, 수술과 화학요법, 돌봄, 의료 시스템 안에서 환자의 위치, 환자에게 요구되는 긍정적인 태도, 암과 오명, 주변 사람들의 태도(부정, 인정, 비난), 경이로서의 몸, 이야기의 힘,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

 

하지만 이 모든 화제들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프랭크 교수의 통찰은, 질병은 우리를 삶의 경계로 데려가며 그곳에서 우리는 삶을, 자기 자신을 어느 때보다 또렷하고 투명하게 마주보게 된다. 죽음 가까이 가는 이 여행은 물론 위험하지만 또한 모험이고, 경이를 발견하고 배우는 과정이며, 변화와 다른 삶의 가능성들과 맞닿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질병은 “위험한 기회”라는 것이다.

    

통증 ‘속에서’ 산다는 것

 

아서 프랭크 교수의 질병 이야기에서 질병과 환자의 의미와 위치는 근본적으로 다른 맥락에 놓인다. 질병은 그저 불행한 일, 피해야 하는 일, 빨리 벗어나야 하는 일, 시간과 자원의 낭비가 아니라 새롭게 되는 기회, 다른 삶으로 건너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환자는 치료와 돌봄과 지원이 필요한 사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본 목격자이며 새로운 이야기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이다.

 

프랭크 교수의 스토리는 아픈 사람이 가지고 돌아온 새로운 이야기의 한 사례다. 질병을 보는, 질병을 이야기하는, 혹은 질병을 ‘사는’ 이런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는 점이 가장 큰 의미다.

 

“통증 ‘속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표현하는 용어는 없다. 통증을 표현할 수 없기에 아픈 사람은 자신에게 할 말이 없다고 믿게 된다. 입을 다물게 되면서 아픈 사람은 통증 속에 고립되며, 고립은 통증을 악화시킨다. 자신이 병에 걸렸음을 알게 될 때 올라오는 메스꺼움처럼, 통증 속에 있기 때문에 더해지는 통증도 있다.”

    

▲ 죽음 가까이 가는 질병이란 여행은 물론 위험하지만 또한 모험이고, 경이를 발견하고 배우는 과정이다. <사진출처=Pixabay>     © 사건의내막

 

질병에 가치 부여하기

 

프랭크 교수의 에세이는 질병이 가져오는 상실과 고통을 인정하면서도 그저 피해자의 이야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또한 모든 어려움을 용감하게 극복해낸 흔한 질병 서사의 영웅 이야기도 아니다.

 

위험과 기회, 고통과 축복, 위기와 새로 얻은 삶 등 모순되는 요소들을 또렷한 비전을 가지고 함께 엮어 말하기 때문에 영적 차원의 울림도 크지만 ‘신이 주신 질병으로 삶이 변화되었다’ 식의 간증과도 거리가 멀다. 세속적이고 평이한 용어들로 질병으로 인해 얻을 수 있었던 깊이를 드러냈다는 점이 커다란 미덕이다.

 

또 다른 장점으로는 사유의 무게가 만만치 않으면서도 쉽게 읽힌다는 것이다.

 

“중병은 그 여행자들을 인간 경험의 가장자리로 데려간다. 한 발짝만 더 나아가도 그렇게 아픈 사람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이 여행이 인정받기를 원한다”, “몸을 통제하려 하기보다는 몸의 경이를 인식하길 권한다”, “내가 삶과 바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는 것, 그것은 축복이었다”처럼 경구와도 같고 논증보다는 직관의 결과인 ‘심오한’ 말들이 자주 나오지만 프랭크 교수의 경험을 우리가 함께 되짚어가며 듣는 이야기이기에 허공에 붕 떠 있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개인적인 목소리로 자신이 마주쳤던 것들을 복기하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그 경험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자신의 경험을 말하지만 언제나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사유를 만들기에 꽉 찬 깨달음의 기쁨을 함께 느끼면서 읽을 수 있다.

 

“질병의 궁극적인 가치는, 질병이 살아 있다는 것의 가치를 가르쳐준다는 점에 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아픈 사람들은 동정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가치 있게 여겨져야 하는 존재가 된다. 멀고 먼 별에서, 우리는 한 번 깜빡이고는 사라지는 빛처럼 보일 것이다. 빛이 사라지는 순간에 우리는 빛이 계속 타오르게 하는 일 자체가 중요함을 깨닫는다. 죽음은 삶의 적(敵)이 아니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삶의 가치를 다시 확인한다. 또 질병을 계기로, 삶을 당연시하며 상실했던 균형감각을 되찾는다. 무엇이 가치 있는지, 균형 잡힌 삶이 어떤 것인지 배우기 위해 우리는 질병을 존중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존중해야 한다.”

 

“암 병동의 침상에서 세상을 보는 일은 우주에서 세상을 보는 일과도 같다. 세상은 자그마하지만 이미 온전하다. 아프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인간이기에 겪는 고통을 나도 겪는다는 것은, 그 온전한 전체 안에서 자기 자리가 어디인지 아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내가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것이다.”

    

필멸의 몸으로라도 살 수밖에

 

프랭크 교수의 이야기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도 의미가 무척 크다. 우리 사회에는 건강하고 젊고 ‘정상적’인 몸에 대한 내외부의 집착과 압력이 가득하며, 동시에 아픈 몸에 대한 공포와 회피와 비난 역시 존재한다. 또한 속도와 성과, 생산성을 중요시하는 산업화 시대의 습속에다 자기계발 시대의 스스로 채찍질하기가 더해진 삶의 방식이 규범이거나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개인들의 몸이 짊어지는 하중이 과도하다.

 

이런 상황에서 아프게 된다는 것은 환자와 주변 사람들이 다층의, 다중적인 위기를 겪게 됨을 의미한다. 직간접적으로 질병을 경험하는 사람들과 만성질환을 안고 아픈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숫자는 늘어나고 있지만 의학적 어려움 훨씬 이상인, 여러 종류와 층위의 어려움 속에 있는 이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말은 아주 드물다. 치료와 섭생 이야기, 종교적 간증 이외의 질병에 관한 이야기들(질병 수기 포함)이 상대적으로 극소수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노년, 질병, 장애, 죽음과 같은 주제들에 대한 모임, 강연, 연구물, 책들이 조금씩 등장하고 있는 것은, ‘다른’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으며 취약한 필멸(必滅)의 몸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징후가 아닐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프랭크 교수는 이런 필요와 요구에 부응해 질병의 의미를 전환시킬 수 있는 이야기, 아픈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줄 수 있는 이야기, 고통에 대한 다른 시각을 줄 수 있는 이야기, 그럼으로써 고통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이야기를 제공할 것이다.

 

“아픈 사람들의 책임이 낫는 일이 아니라면 그들의 진정한 책임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고통을 목격하고 경험을 표현하는 것,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아픈 사람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반드시 배우고자 해야 한다. 아픈 사람들은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은 보고 듣는 것, 이는 사회 안에서 양측 모두의 책임이다.”

 

“강물 위에 빛나는 햇빛을 소중히 할 수 있을 때, 그래서 그 빛이 거기 계속 비칠 것을 상상하고 믿을 수 있을 때, 나는 이 세계 너머에 속하는 평화를 느끼며 더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내가 사라진 후에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떠 있을 미소를 상상할 수 있을 때, 여기 있어서 행복하다. 하지만 반드시 여기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기쁨은 집착하지 않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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