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속내
대한민국 슬픈 현대사 압축, ‘8월 정치 히스토리’
광복부터 국정농단까지…“대형사건 함께한 뜨거운 여름”
김범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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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8/03 [14:26]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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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습하고 더운 여름이 절정에 달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부푼 마음을 안고 여름휴가를 떠날 채비를 서두르는 8월이 다가왔다. 휴가철 끝자락에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인 광복절이 있는 달이기도 하다. 이 뿐만 아니라 8월에는 대한민국 현대사에 굵직굵직한 사건·사고들이 많이 벌어진 달로 기억된다. 한일 합병부터 시작해서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김대중 납치사건, 육영수 여사 피살,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 금융실명제, IMF 관리체제 종료, 그리고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사건, 북한 목함지뢰 매설도발 등 수많은 사건·사고가 일어난 달인 것이다. <편집자 주>

 


 

 

日패전으로 찾아온 광복…강제징용자 몰살된 ‘우키시마호’

8月 인연 많은 박정희…김대중·장준하·육영수 같은달 발생

세월호참사의 주범단체 지목 구원파 연루된 ‘오대양 사건’

최순실 국정농단 전초전 우병우…박근혜의 노골적 감싸기

    

▲ 강제징용 한국인 수 천명을 태운 우키시마호가 지난 1945년 8월24일 일본 교토의 마이즈루만에서 침몰하고 있다. <사진제공=우키시마호 추도 실행위원회>     © 사건의내막

 

[사건의 내막=김범준 기자] 지난 1910년 8월29일은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송두리째 바꾼 사건이 있는 날이다. 친일파의 대명사 ‘경술국적’ 이완용과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8월22일에 체결한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 공표, 소위 경술국치가 일어난 날인 것이다. 이로써 600년 왕조를 근근이 이어오던 조선왕조의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35년에 걸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어 버렸다. 우리나라 근대사에 가장 가슴 아픈 사건이 8월에 시작된 것이다.

    

해방의 8월

 

일제 치하 아래 모진 세월을 다 보내고 수십 년이 지난 1945년 8월 세상은 또 다시 요동치게된다. 히틀러의 독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와 함께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범국’으로 활동하던 일제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앞서 유럽의 두 전범이 항복을 한 이후에도 결사항전을 천명했던 일제는 8월6일 나가사키, 8월9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위력에 무릎을 꿇게 됐다.

 

이에 몇일 뒤인 8월15일 일제가 일왕 명의로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함으로서 2차세계대전이 종결됐고, 이와 더불어 전범국의 식민지배에 있던 나라들이 사실상 모두 독립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일제 치하에 있었던 ‘조선’도 마찬가지로 독립하게 됐고 이날을 ‘광복절’로 지정해 기리고 있다.

 

여담으로 광복절은 북한에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민족해방 기념으로 기념은 하고 있는데, 실상 그 내용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김일성의 저서인 ‘세기와 더불어’에 따르면 김일성이 항일 빨치산 주체의 광복군을 만들고 소련과 합작하여 한반도로 진공해가지고 일제를 쳐부수고는 조국을 해방한 것으로 역사왜곡해서 가르치고 있다. 결국 왜곡은 되긴 했으나 남북한 공통으로 존중하는 유일한 기념일이자 국경일이자 공휴일이 광복절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대한의 국토가 해방의 기쁨의 들떠있던 ‘광복의 해’의 8월에는 아이러니 하게도 아픈 역사도 숨어있다. 광복 9일 뒤에 벌어진 대형 참사인 ‘우키시마호 사건’이 그것이다. 1945년 8월15일, 항복을 선언한 일본정부는 강제징용 된 한국인 노동자들이 전범재판 과정에서 폭동을 일으킬 것을 우려했다. 이에 이들은 폭동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한국인 노동자들을 송환하라는 극비 지시를 내리게 된다.

 

우키시마호에는 일본 북부지방에 있던 한국인 노동자들을 부산으로 실어 보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약 7000여명의 한국인들이 8월21일 아오모리 현의 오미나토항을 출발한 배는 돌연 24일, 방향을 바꿔 일본 중부 연안의 마이즈루항으로 들어갔다. 마이즈루항 근해인 마이즈루만에는 미군이 부설한 기뢰들이 있었는데 우키시마호가 마이즈루항으로 입항하려고 하자 갑자기 폭발이 일어나면서 배가 침몰했다.

 

이 사건의 경우 일본에서는 ‘우연히 일어난 사고’라고 규정하는 상태고,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이 고의로 침몰시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진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사건으로 홋카이도, 아오모리, 토호쿠 등 일본 각지에서 강제 징용되어 노역에 시달리다가 조국으로 돌아갈 기쁨에 부풀어 있던 한국인 수천 명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고 수습과정에서의 일본의 각종 의문스러운 행동은 우리국민에게 또 다른 아픔을 가져다주었다.

 

이후 우리나라는 미군정의 도움을 받아 만신창이가 된 나라를 추스르기 시작했다. 남한 뿐이긴 했지만 ‘총선거’와 ‘헌법 제정’을 마친 후 광복 3주년인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면서 진정한 ‘독립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 1974년 8월15일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가 피살당한 장면.     © 사건의내막

 

박정희와 8월

 

하지만 우리에게 시련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북한과의 전쟁을 벌이며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기도 했고 이승만 정권의 권력욕으로 인한 각종 민중탄압이 자행됐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의 행보는 부정선거로 인해 몰락하게 되고, 국민들은 새 시대의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됐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민중탄압으로 묵살되고 만다. 군인출신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1961년부터 기나긴 군사독재가 시작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 때의 8월은 유난히 사건 사고가 많이 일어났다. 특히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제정하며 본격적인 ‘영원한 독재’ 야망을 보였던 70년대에는 역사서에 남을 만한 각종 굵직한 사건이 많이 발생했다.

 

유신이후 일어난 수많은 대형사건 중 스타트를 끊은 것은 1973년 8월8일에 발생했던 ‘김대중 납치사건’이다. 1971년 7대 대통령선거 당시 정권의 온갖 방해공작과 부정행위 속에서도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 선전했던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 유지에 최대 방해요소였다. 박정희는 정권 유지를 위해 1972년 10월 ‘유신체제’를 선포하게 됐고 마침 지병치료를 위해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김대중은 국내로 들어오는 것을 포기하게 됐다. 그리고 그는 1973년 7월 재미교포 반체제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약칭 한민통)를 결성하는 등 해외에서 반유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비상이 걸린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 암살계획’을 실행하게 된다. 도쿄서 한민통 결성을 며칠 앞둔 1973년 8월8일,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러 그랜드팔레스 호텔로 간 김대중은 괴한들에 의해 납치되었다. 이후 선박 용금호에 감금된 채 동해로 강제 압송되었다가, 미국 CIA의 개입으로 129시간 만에 8월13일 서울의 자택 부근에서 풀려났다.

 

당시 이 사건을 조사한 일본 경찰청은 납치 현장에서 주일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의 신분으로 일본에 머물던 김동운 중앙정보부 요원의 지문을 채취하는 등 증거를 확보하여 관련자 출두를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관련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고 관련자 출두 등 협조를 거부하였다. 이에 따라 이 사건은 한국 공권력에 의한 일본 주권의 침해라는 한일 간의 외교문제로 비화하였고 양국 관계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또한 북한이 8월28일 남북회담 중단을 발표하는 등 남북관계 악화에도 영향을 미친 박정희에 ‘무리수’였던 것이다.

 

이같은 무리수를 던진 박정희는 아이러니 하게도 다음해 8월 큰 변을 당하게 된다. 1974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발생한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 그것이다. 이날 광복절 행사 오전 10시 6분, 경축식의 클라이맥스라 할 박정희 대통령의 경축사가 낭독되기 시작했다. 이날 경축사의 내용은 “평화통일 3단계 기본원칙”을 밝히는 역사적 내용이었다. 그러던 중 아래층 맨 뒷줄 중앙 부근에서 총소리가 울렸으나, 대통령은 듣지 못했는지 경축사를 계속 낭독하였다. 그리고 두번째 총소리가 울렸고, 한 사내가 아래층 중앙 뒷줄에서 단상을 향해 뛰쳐나와 권총을 쏘아댔다. 범인의 총에 박정희는 화를 면했지만 영부인인 육영수가 머리를 맞고 쓰러져 결국 숨지고 말았다.

 

이 사건에는 흥미로운 뒷이야기가 있다. 이 사건의 범인은 일본에서 공작훈련을 받은 ‘재일교포 문세광’이었는데 그는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어 중앙정보부 조사실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쏟아지는 구타에도 불구하고 완강히 입을 열지 않아 전혀 수사가 진행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중앙정보부에서는 그의 입을 열게하기 위해 투입했던 사람이 당시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의 법무비서관이던 김기춘 검사(전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다는 것이다.

 

이때 김기춘은 문세광에게 담배를 권한 후, 그가 즐겨 읽었다는 ‘자칼의 날’이라는 소설 이야기를 꺼내 분위기를 어느 정도 풀었다. 그리고 “자, 사나이 대 사나이다. 자네가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난 100% 다 믿을테니 모두 말해보게”라고 말했고, 문세광 역시 “좋습니다. 선생께서는 제 말을 다 알아들으시리라 믿으니 전부 말하겠습니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드디어 진술했다는 이야기다. 이후 김기춘은 법무부장관,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지냈고 2013년 8월5일부로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되며 박정희의 딸 박근혜 대통령 정권의 실세로 활약하고 있다.

 

앞의 8월에 벌어진 두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유신이후 박정희 정권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야권과 민중의 압박은 거세져 왔고 이에 박정희 정권은 각종 공작과 암살로 이를 무마해 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75년 8월17일에 있었던 ‘장준하 의문사’ 사건이다. 장준하는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독립운동가, 해방 후에는 정치, 언론, 사회운동, 민주화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전 국민적 인기를 끌며 ‘재야 대통령’이라고 까지 불린 활동가였다.

 

이에 박정희 정권 입장에서는 최대 난적이었고 실제로 중앙정보부를 집중 배치시켜 감시를 할 정도로 까다로운 상대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장준하는 1975년 들어 평소 잘 만나지 않던 김대중과 만나고, 함석헌·홍남순과 접촉하며 8월15일, 광복절 30주년을 맞아 모종의 거사를 계획했다고 알려졌다. 장준하는 재야와 야당 전체를 아우르고 군부 일부가 동조하는 어떤 거사를 계획중이었으며, 여러가지 증언으로 미루어 8월20일경으로 예정된 것은 확실해 보였다.

 

때문에 박정희정권의 감시가 더욱 심해졌고 그러던 중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하였고 박정희 정부는 실족사로 발표했다. 아직까지 고인의 사망에 관한 의혹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당시 정권이 장준하를 암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당시 정권이 고인이 계획했던 ‘유신개헌운동’을 저지하기 위해서 고인을 살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신개헌운동’의 실체에 대해서는 이미 고인이 되신 법정스님과 김대중이 증언한 바 있다. 이 때문에 지난 대선 정국에서 박근혜 당시 후보는 고인의 부인 김희숙씨를 만나 사과했다.

 

이후에도 박정희 정권의 8월 사건은 계속 이어진다. 북한의 도발로 전쟁까지 일어날 뻔 했던 1976년 8월18일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는 판문점 인근 초소에서 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미군들을 북한군이 도끼로 무참히 살해한 사건이다. 이에 8월21일 미군이 병력을 이끌고 북한을 공격할 준비를 하자 김일성이 직접 유감성명을 표하며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마지막 사건으로는 박정희 정권 붕괴의 서곡이었던 1979년 ‘YH사건’도 있다. 이 사건은 1979년 8월9일, 가발업체였던 YH무역 여성노동자 170여 명이 회사운영 정상화와 근로자 생존권보장을 요구하며 신민당사 앞에서 농성을 벌였던 사건이었다. 이들 근로자의 슬로건은 ‘배고파 못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라는 기본적인 요구였다. 하지만 박정희 유신정권은 김영삼 총재가 이끄는 신민당이 이들 YH무역 여공들의 농성을 지원하자 신민당사에 경찰을 투입하여 이들을 강제 진압하면서 국민들의 잠재적 불만 폭발의 도화선이 됐다. 이후 박정희는 1979년 말 심복이었던 김재규의 총격으로 생을 마감했다.

    

▲ 탄핵된 전직 대통령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우병우에게 ‘민정수석’ 임명장을 수여했던 장면. 우병우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 사건의내막

 

깜짝 사고의 8월

 

이후에 8월에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1987년 8월29일 발생한 ‘오대양 집단 변사사건’이다. 이 사건은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에 있는 오대양의 공예품 공장 식당 천장에서 오대양 대표이자 교주인 박순자와 가족·종업원 등 신도 32명이 손이 묶이거나 목에 끈이 감긴 채 시체로 발견된 사건을 말한다.

 

수사 결과 오대양 대표이자 교주인 박순자는 1984년 공예품 제조업체인 오대양을 설립하고, 종말론을 내세우며 사이비 교주로 행세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박순자는 자신을 따르는 신도와 자녀들을 집단시설에 수용하고, 신도들로부터 170억 원에 이르는 거액의 사채를 빌린 뒤 원금을 갚지 않고 있던 중 돈을 받으러 간 신도의 가족을 집단 폭행하고 잠적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집단 잘살 원인이나 경위가 밝혀지지 않았으나 몇 년후 오대양의 신도 6명이 경찰에 자수 하면서 의문점들이 밝혀졌다. 이에 따라 사건이 전면 재조사에 들어갔지만, 이 사건이 경찰의 발표대로 집단자살극인가, 아니면 외부인이 개입된 집단 타살극인가에 대한 논의만 무성했을 뿐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부검 의사는 3구의 시체는 자살이 분명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교주 박순자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교살에 의한 질식사가 분명하며, 누군가에 의해 계획적으로 행해진 집단 타살극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는데 ‘세월호’의 회사 청해진해운의 실소유 단체로 지목되는 ‘구원파’가 오대양 교주인 박순자가 한때 몸담았던 단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다. 결국 구원파는 이때도 사건 연루의혹이 있었으며 세월호 참사에서도 연결돼 있는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여기에서도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이름이 언급된다는 것이다. 1991년 ‘오대양 사건’ 재수사 당시 법무장관인 김 전 실장이 갑작스럽게 수사팀을 교체하면서 사실상 수사가 흐지부지 됐다는 의혹을 당시 수사담당검사였던 심재륜 씨가 제기한 바 있다.

 

이같은 인명피해 말고도 8월에는 깜짝 사건도 있었다. 1988년 8월4일에 벌어진 MBC 뉴스데스크 생방송에 한 남자가 난입해 “내귀에 도청장치가 들어있습니다”고 말한 방송사고가 벌어진 것이다. 물론 이는 정신이상자의 소행으로 밝혀졌지만 당시 세간에서는 ‘고문후유증 탓에 미쳐 이런 짓을 벌였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국민들이 집권세력을 두려워하는 것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이와 비슷한 성격은 아니지만 8월의 ‘깜짝쇼’는 또 있다. 1993년 8월12일 김영삼 대통령이 ‘금융실명제’를 깜짝 발표한 것이다. 이에 수많은 차명 계좌를 가지고 있던 고위공직자나 기업들은 비상이 걸렸고 잠시나마 부유층들의 부정부패 척결에도 큰 효과가 있었다.

    

2000년대의 8월

 

이처럼 8월에는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들이 즐비했고 이는 2000년대 이후에도 이어진다. 2001년 8월23일, IMF에서 빌린 금액 195억 달러를 전액 청산하면서 관리체제를 조기에 졸업했다. 이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대중은 8년 후인 2009년 8월18일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또한 지난 2013년 8월28일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수사 사건’도 크게 벌어졌다. 당시 현역의원이었던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연루되어 이후 이석기 전 의원과 통합진보당 동료의원, 그리고 당 자체가 모조리 해산된 대형 사건이었다.

 

지난 2015년 8월 달에는 두 개의 큰 사건이 발생했다. 8월4일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이 발생한 뒤, 우리 측이 확성기 방송을 하자 북한이 휴전선에 포격을 가하는 등 긴장상태가 높아진 것이다. 결국 남북은 남북관계 관련 최고 책임자인 우리 측 김관진 국가안보실장, 홍용표 통일부 장관과 북측에서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 김양건 노동당 비서가 8월25일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인 0시 55분, 6개항의 합의를 도출해 전쟁 위험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지난 2016년 8월은 대통령 박근혜가 탄핵을 맞이하게 된 최순실 국정농단의 증거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던 시기다. 8월초 최순실이 특혜를 줬던 이화여대 ‘미래라이프 대학’ 논란이 터졌고,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각종 개인비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등 ‘국정농단’ 사건 진상규명의 시발점이 됐다.

    

penfre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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