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진실
박정희 ‘만주군·남로당·반란군’…“역사는 말하고 있다”
[박정희 탄생 100년 재조명 기획] 대통령 되기 전 행적 집중분석
김범준 기자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기사입력: 2017/11/17 [14:44]  최종편집: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올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태어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그의 고향인 경상북도 구미시와 박정희 추종 단체에서는 각종 기념행사를 계획하는 등 ‘성대한 행사’를 기획했으나, 그의 딸 박근혜가 파면되고 구속됨에 따라 빛을 바랬다. 무엇보다 박근혜의 구속은 ‘박정희 신화’가 흔들리게 된 시발점이 되면서,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 재평가’도 활발해지는 상황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단체들은 ‘박정희 동상’을 만들며 그의 ‘공’을 기리는 활동도 멈추지 않고 있다. 이처럼 사회를 분열시키는 ‘박정희 논란’은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그의 삶의 궤적을 보면 어느 정도 답은 나온다.

 


 

어린시절 군인 동경해 일본육사 졸업…충성 편지 작성

일본 패망이후 귀국해 남로당 프락치 대장활동 하기도

6·25전쟁 발발하자 포병소령 복귀…장군까지 승승장구

군사반란 감행…정권 찬탈 후 선거서 이기며 장기집권

 

▲ 만주군 육군 예비소위 시절 박정희. <사진=구글 이미지 검색> 

 

[사건의 내막=김범준 기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제강점기인 지난 1917년 11월14일, 경상북도 구미에서 하급 군관인 효력부위(정9품. 하사~중사)를 지낸 농민 박성빈과 백남의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박정희 본인은 5남 2녀 중 막내다. 19세이던 1936년에 집안 어른들이 16세의 김호남과 결혼을 시켰고, 이듬해에 딸 박재옥이 태어났다.

    

만주군 장교

 

어린 시절부터 군인을 동경했으며,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재직하던 중, 한국인 교사 차별 문제에 불만을 품고 만주군에 입대하려 시도하나 나이 제한으로 거절당한다. 그러나 결국에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 2기로 입학하여 예과(1942년)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당시 만주군관학교 예과 상위 성적자에게 베풀어지는 관행에 따라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2년)에 진학해 졸업하고 현역 만주군 육군 소위로 전역한 바 있다.

 

박정희는 일본육군사관학교 입학 전 혈서 편지를 썻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나라를 위해 목숨 바침)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하지만 만주군 육군 장교로 복무하던 와중 일본이 패망으로 소련군 육군에 포로로 잡히게 되었고 가까스로 도망쳐 나와 빈털털이로 고향 구미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귀국한 박정희는 할 수 없이 남조선국방경비대에 들어가서 포병 소위 계급을 부여받는다. 복무 도중에 셋째 형인 박상희가 대구 10·1 사건으로 경찰에게 사살되자, 남조선로동당에 들어가서 국군 내 남로당 프락치들의 군사총책으로 활동했다.

 

남로당 활동 당시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에서 감행했던 작전 중에 가장 큰 규모였으며 가장 성공에 가까웠던 정부전복 기도사건(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을 지도했으며, 소령으로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던 1948년 11월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 작업 도중에 여수·순천 반란사건과 연루돼 체포, 사형을 선고받았다. 3남 박상희가 경찰에게 총살당하고, 막내아들 박정희마저 사형선고를 받자, 그 충격으로 어머니 백남의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박정희는 같은 만주국 출신으로 당시 육본정보국장이던 백선엽 대령의 구명으로, 사형을 면하고 예편되었으며 전향한다.

 

다만, 이는 박정희만 특별 대우를 받아 사면된 것은 아니고,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이응준이 혐의자들과 일일이 개별 면담한 뒤 상당수를 군문을 나가는 조건으로 훈방 조치했다고 한다.

 

이후 민간인 신분인 군속으로 육군에서 근무하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포병소령으로 복귀하였고,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9월 15일 중령으로 진급하고 대구로 올라가는 육군본부 수송지휘관을 맡았다.

 

그리고 1950년 2월에는 동거녀 이현란과 헤어졌다. 사실 이현란이 계속 박정희와 다투다가 끝내 가출했기 때문이다. 같은해 11월에는 첫 아내 김호남과 갈라서고, 12월에 육영수와 재혼한다.

 

지난 1952년 5월 이용문의 주도로 계획된 군부의 이승만 축출 시도에서, 이용문의 보좌관이었던 박정희 역시 정변 계획에 참여하였으나 계획은 미수로 끝나게 되었다. 1953년 11월 25일에는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여 장군이 됐고 1955년 7월 14일에는 제 5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1957년에는 소장 진급자 명단에 올랐을 때 과거 남로당 경력을 문제삼은 진급 담당자들이 백선엽에게 항의하였지만, “박 장군에 대해선 내가 보장한다.”며 박정희로 진급하는 데 또 도움을 주었다. 이 덕분에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후 백선엽을 “백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와 가까워졌다.

 

소장 계급으로 제 6군단 부군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는 1957년 제7사단 사단장, 1959년 7월 1일 육군 제6관구사령관이 되었으며 1960년 1월 21일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받으며 군내 요직을 거쳤다.

 

그런데 4·19 혁명으로 같은 해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민주당이 집권하자, 박정희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으로 부임했고 이종찬은 장면 국무총리에게 박정희의 중용을 건의하면서 출세가도가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장면 총리가 미 육군 제8군사령관 겸 UN군총사령관 육군대장 카터 매그루더와 논의하면서 육본을 통해 박정희의 남로당 활동 전력이 알려지면서 1960년 12월15일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좌천당한다. 또한, 당시 박정희를 좌익으로 지목한 김형일은 박정희와 원수 사이가 됐고, 이후 군정에 반대하다가 참모차장에서 예편됐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박정희는 이전 상관이었던 이용문처럼 정변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61년 4월19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박정희는 4·19 혁명 1주년을 기념으로 학생들이 대규모 집회를 할 것으로 예상하였고, 이때 혼란을 틈타 집회를 진압하다는 명분으로 정권을 탈취할 생각이었지만, 아무 일도 없어 작전은 늦춰지게 된다.

    

▲ 프레이저 보고서에서 박정희의 남로당 시절에 대한 기록. <사진=구글 이미지 검색>

 

반군의 리더

 

하지만 이같은 작전은 늦춰졌을 뿐이었고, 결국 박정희는 손에 피를 묻히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쟁취했다. 그의 나이 만 43세에 반군 지도자로 추대된 것이다.

 

반군은 1961년 5월16일 해병대 병력 일부를 시작으로 대한민국 제2야전군 상당수와 제1야전군의 일부가 유엔군사령부로부터 이탈하여 대한민국 정부 주요 기관 및 시설을 정복하기 시작하면서 실체를 드러냈다. 이는 박정희를 구심점으로 하는 사회에 불만이 가득한 장교들에 의해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다.

 

육군 중장 장도영 관할 밖의 제1해병여단과 공수단을 비롯 서울 인근으로는 서울 동부의 제6군단 포병단, 서울 서부의 제30사단, 서울 남부의 제33사단, 서울 북부의 5사단 그리고 춘천, 대구, 광주, 부산에 주둔 중이던 군대들이 궐기하여 이른바 5.16 군사정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군인들은 총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KBS라디오방송국, 육군본부, 국방부, 6관구 사령부(제 1지휘소로 사용), 서울지방경찰청, 파출소, 중앙전화국, 시청, 도청, 발전소 등이 표적이 되었다. 정부 수반이 머물렀던 반도호텔(현 롯데호텔)에는 육군 특수부대(GDT)의 기습이 가해졌다.

 

그러나 장면 총리가 호텔 맞은편의 주한미국대사관, 안국동 미국대사관 숙소를 거쳐 혜화동 가르멜 봉쇄수녀원으로 피신하고, 여러 각료 또한 은신함으로써 작전이 실패하고 계엄령 승인을 얻지 못하게 된다.

 

이에 박정희는 오전 9시 경, 장면 총리에게 피신을 권한 후 체포당한 현석호 국방장관과 연금당한 장도영을 데리고 해군참모총장 해군중장 이성호 제독, 공군참모총장 공군중장 김신 장군, 해병대사령관 해병중장 김성은 장군과 함께 청와대로 향해 윤보선 대통령으로부터 계엄령 추인 및 혁명 지지를 요구한다.

 

하지만 대통령 또한 이를 완강하게 거절하며 오히려 사퇴 의사를 밝혔고, 오전 10시경 국회해산 및 비상계엄을 알리자 곧 북한군이 휴전선에 결집, 10시 18분 경에는 매그루더와 주한 미 대리대사 마셜 그린이 장면내각 지지를 선언하는 한편, 국민들이 군사봉기를 딱히 반겨주지도 않았다.

 

이에 정권이 군부에 넘어갔구나 하고 국민이나 미국이 믿게 하기 위해 그날 장도영 등을 앞세워 여러 포고문을 쏟아내는데, 전국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의 정치활동을 불법으로 하고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정치인과의 협상을 배격할 것임을 밝히며, 국무위원, 정무위원을 모조리 체포하고, 대의원 헌법기관을 정지시키는 한편, 오후 7시부터 장면 정권의 모든 권력을 군사혁명위원회가 최종적으로 인수함에 따라 국가 기구의 전권을 행사할 것이고, 오후 8시를 기해 민의원, 참의원, 지방의원 등 국회는 모조리 해산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후 오후 10시 30분에 윤보선 대통령으로 하여금 민주당(1955년)원들의 신병을 전부 보장한다는 대가를 주고 대국민 특별담화 방송을 하게 하여 장면과 각료들에게 투항을 권고하였고 5월17일 내부 불만을 잠재우면서 장면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다가 그날 저녁부터 18일 아침까지 매그루더로부터 출동명령을 받은 야전사령본부청을 점령하고 대한민국 육군 제1군사령관 이한림의 체포를 단행한다.

 

장면 총리는 5월16일 외부에서의 접촉을 차단하고선 유엔군에 대한 개입을 요구하는 편지를 미대사관에 보냈다. 17일에는 오후 가까운 사이였던 경향신문 사장 한창우와, 18일 오전 총리고문 도널드 위태커와 비밀리에 접촉을 가지며 동향을 파악하였다. 이후 18일 장도영이 찾아와 설득한 끝에 대동하여 18일 12시 30분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소집한 69차 임시국무회의에 참여하게 되는데 윤보선 대통령은 국무회의가 아니라 투항식에 참여한 것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이로써 박정희는 내각 총사퇴를 결의시키고, 국무회의 및 국무총리로부터 계엄령 승인을 얻어 1시간 뒤 윤보선 대통령이 이를 추인하도록 함으로써, 봉기 60여 시간 만에 마침내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대한민국 정부, 대한민국 국회, 대법원의 역할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전권을 군사혁명위원회로 가져온다.

    

▲ 5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박정희. <사진=구글 이미지 검색> 

 

권력 찬탈 성공

 

박정희는 이튿날 아침 군사혁명위원회를, 장도영을 의장으로 하고, 자신을 부의장으로 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하고 1962년 12월31일까지 전국의 모든 정치인 활동을 일체 금지시켰다. 그리고 미국과 비공식적인 면담을 가진 뒤 5월23일 박-매그루더 협상을 타결함과 동시에 포고령을 내려 정기 간행물 1200여 종을 모두 폐간, 6월에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공포, 육군 보병중령 김종필을 위시한 중앙정보부를 발족시켜 세력을 견고히 한 다음 7월3일 인신 구속 등에 관한 임시 특례법(인신 구속 특례법)을 통과시킴에 따라 법관의 영장도 필요없고 형사소송법을 따를 필요 없이 반혁명으로 의심되면 어떤 국민도 마음대로 구속·압수·수색할 수 있게 되어, 의장 장도영과 43명의 인사들을 숙청했다. 이후 의장직에 올라, 1961년 11월 11일 미국 초정에 따라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민정이양에 관한 회담을 나눈다.

 

동시에 민생 안정책으로 농가 부채 탕감, 농산물 가격 안정 정책을 실시해 농민들의 호응을 얻고 제2공화국에서 처벌중이던 3.15 부정선거 관련 책임자를 소탕, 정치깡패들을 일거에 체포 후 조리돌림하며 국민과 지식인들에게도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조용수(2008년 1월16일 서울중앙지법에서 무죄 선고) 같이 민간인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사형 당한 일도 있다.

 

그리고 1961년 6월3일에는 윤보선 대통령이 조속히 민간에 정권을 넘겨야 하며 특히 이 문제에 대해서는 9월에 열리는 유엔 총회를 고려해야 한다고 한 것을 <동아일보>가 “조속한 정권 이양 필요”라는 제목으로 1면에 보도한 적이 있는데, 검열을 안 받고 이게 신문에 실려 동아일보 편집국장, 정치부 차장, 기사를 쓴 이만섭 기자를 비롯한 정치부 기자 등을 연행되고, 이만섭이 구속되었으며 윤보선 대통령의 비서관 유동준까지 최고회의에 끌려갔다.

 

한편 중앙정보부에서는 정치학, 법학, 경제학, 교육학 등 학자들과 중앙정보부 간부를 포함한 21명으로 구성된 대외문제연구소를 설립하는데 여기서 1961년 10월에 1963년 8월15일 민정을 이양한다는 전제하 군인들이 예편해 대선과 총선에서 승리함으로서 민정에서도 정권을 잡아야 하며, 선거 승리를 위해 군인이 참여할 정당을 만들어야 하고,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새 헌법과 선거 제도를 고안해야 한다는 계획서를 작성한다.

 

이에 중앙정보부 행정차장 이영근 총괄로서 1962년 1월 말부터 비밀리에 법조계, 언론계 등 각계 인사 52명으로 재건동지회를 결성, 1962년 4월 훈련원을 설치하고 1962년 말까지 1000여 명의 요원을 교육했으며,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일본 6개 재벌로부터 정치자금 총 6600만 달러를 받아왔고, 대내적으로는 1962년 겨울 김상돈, 조중서 등 민주당 41인을 반혁명으로 몰아 체포하기도 한다.

 

또한 징벌적, 적극적 부쟁처리법으로서 재계를 강제 동원하거나 압박하는데 일례로 1962년 5월 25일에는 부정축재법 위반으로 김지태를 체포해 그의 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부산일보 경영권을 중앙정보위원회로 압수, 결국 5.16장학회, 정수장학회로 넘겨주게 되는데 자금을 제공해달라는 요구에 김지태가 응하지 않하지 않은 것이 원인으로 알려졌었다.

 

또 다른 사례로는 1962년 6월10일에는 중공업화를 통한 내포적 공업화 재원을 확보하기위해 미국 몰래 화폐개혁을 실시하고 잇따라 동결 조치를 발표하여 장롱 속에 있는 돈들을 끌어내고 재산에 따라 차등적으로 정부 출연기관 주식을 강매하게 하며 삼화제철 등을 동원하려 한 것이 있다.

 

동시에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법 등으로 인해 현금 위주로 재산을 축적하고 있던 국내 화교 상권을 타격하기도 했다. 덕분에 아시아 경제를 주름잡던 화교들이 한국에서 영향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지하경제가 없었고 사업 자금 동결에 따라 중소기업 가동률이 50% 밑으로 떨어지는 등 역효과만 나타나자 뒤늦게 이를 안 미국의 요구대로 실패를 인정, 이후 차츰 미국의 주장을 수용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박정희는 중공업화계획 연기, 재정 안정화, 금리 현실화, 환율 정상화, 한일수교 등 미국의 여러 요구에 대한 승낙을 발판으로 원조, 차관 등의 인센티브를 더 따내는 전략으로 선회하게 된다.

    

독재자 등극

 

그렇게 1962년 12월17일이 되자, 박정희는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통과시키고 12월26일 일원단제 및 대통령책임제를 핵심으로 하는 개헌헌법을 공포하고, 이튿날 대통령 선거 출마 의사를 밝히기에 이른다.

 

민정이양이 다가오자,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 국회를 뼈대로 하는 제5차 개헌을 공포하고, 증권파동을 통한 정치자금, 일본 재벌의 로비 자금 등으로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여 세를 불린다. 그리고 혁명공약에 따라 민간인 신분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정변 당시 자신이 끌어내렸던 윤보선과 국민 선거로 맞붙는다.

당시 윤보선과의 선거에서 윤보선 측은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두고 빨갱이로 몰아가면서 극렬한 공격을 퍼붓는다.

 

이에 박정희는 1963년 10월 5일 동아일보 1면 반단 광고로 다음과 같은 광고를 내면서 매카시즘적인 공격으로 모욕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이후 반공을 국시로 내걸면서 소위 빨갱이 논란으로 정권을 공고화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아이러니한 장면이다.

 

1963년 10월 15일, 박정희는 윤보선보다 0.97% 많은 표를 받음으로써, 5대 대선에서 승리를 거둔다. 윤보선을 후보로 내세운 야권 세력은 허정과 송요찬의 사퇴로 표 결집을 시도했으나, 결국 박정희에게 투표 차로 패배하게 된다.

 

박정희가 내세운 젊고 과단성 있는 이미지로 혁신계 세력의 지지를 얻었고 군정 시기에 거둔 적극적인 중농정책 결과로 인해 호남, 영남 등의 농민층으로부터 많은 표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윤보선 후보가 박정희 후보의 남로당 시절 일을 거론하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색깔론을 들고 나왔는데, 당시 상대적으로 이념관계로 인하여 피해를 많이 본 호남, 영남 지역에서는 이에 대한 역효과가 발생하여, 박정희 후보가 해당 지역에서 압승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이후부터 박정희는 헌법 개정 끝에 총 18년 간 장기통치하며 독재자로 등극하게 된다.

    

penfree1@hanmail.net

ⓒ 사건의내막.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 용
주간베스트 TOP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