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속내
김무성과 친박의 오묘한 상관관계
컴백한 공주의 남자…전투or화해?
김범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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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2/01 [14:53]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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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당을 떠났던 김무성 의원이 사실상 자신이 만든것과 다름없는 바른정당을 버리고 자유한국당으로 컴백했다. ‘새로운 보수’를 시작하겠다는 그의 말은 ‘융통성’이라는 미명하에 사실상 ‘공염불’이 되어버렸다. 이로서 비박계 이외에 계파로서 가장 많은 현역의원을 거느렸다는 김무성 의원의 복귀는 자유한국당의 또다른 계파갈등 변수로 자리잡게됐다.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 당적 제명 이후 친박계가 ‘부글거리는’ 상황에서 ‘배신자’ 김무성 의원에 대한 생각은 복잡할 수 밖에 없다. 김무성 의원 자체가 ‘대통령 박근혜’를 만든 1등 공신 이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캠프 조직 담당한 ‘친박계 좌장’으로 정치력 부각

잦은 갈등 벌였던 두 사람…‘세종시’로 관계 크게 벌여져

無공천 됐지만 당 잔류…선대위원장 맡아 대통령 메이커

탈당 후, 탄핵 일조 뒤 다시 컴백…‘친박과 관계’ 재정립?

 

▲ 지난 2008년, 친이계에게 공천학살을 당해 ‘친박 무소속 연대’로 총선에 출마했던 김무성 의원. ‘박근혜와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사진=구글 이미지 검색>

 

[사건의 내막=김범준 기자] 6선 의원이자 당 대표까지 역임한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발탁해 최측근에서 활약했던 실질적인 ‘YS계의 막내’다. 지난 1985년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한 이후에는 대체로 조직이나 정당 내 실무를 담당하는 정치인으로 커리어를 쌓았다. 또한 유력한 기업가 집안의 자제인지라 주로 상도동계의 자금줄 역할을 하였다. 통일민주당이 창당되자 총무국장으로 당사를 마련해줘 김영삼 총재의 신임을 받기 시작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때도 김영삼 후보의 재정을 관리하는 선거대책위원회 재정국장을 맡았다. 1990년 3당 합당에 참여하여 민주자유당에 합류하였으며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비례대표) 50번으로 공천을 받았으나 낙선했다.

 

그리고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 이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비서관, 내무부 차관을 역임했다. 1995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부터는 부산 남구에서 내리 4선을 하면서 당의 대표적인 중진의원이 됐다.

    

친박계의 좌장

 

이후 2005년 한나라당 사무총장이 되어 박근혜 당시 대표를 보좌했다. 당시 대표 비서실장은 박근혜의 경제 참모가 되는 유승민 의원(현 바른정당 대표)이었다. 이때의 인연으로 ‘친박계의 좌장’이 되어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당시 후보를 위해서 뛰었으나, 결국 경선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친박계는 대선주자인 박근혜 대표 아래 조직을 관리하는 좌장인 김무성 사무총장, 그리고 정책 전반을 입안하는 유승민 비서실장의 삼각체제로 운영됐으나, 이때부터 박근혜 대표는 김무성 의원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 둘은 자주 의견충돌을 벌였는데, 박근혜 대표는 보스와 부하 같은 철저한 상명하복식 ‘묻지마 충성’을 요구한 데 반해, 김무성은 둘 사이를 수평적인 동지 관계로 생각했기 때문에 상당한 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박근혜 대표는 김무성 의원이 ‘자기정치’를 하는 것을 매우 경계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정권을 가지고 있었던 주류세력은 친이명박계에서는 친박계 좌장 역할을 하던 김무성 의원을 찍어낼 수밖에 없었고, 결국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친이계의 친박계 공천 학살로 탈락하게 된다.

 

살길을 모색하는 김무성 의원은 다른 친박계 탈락자들과 함께 탈당하여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였다. 김무성 의원은 친박 성향 무소속들을 규합하여 ‘친박 무소속 연대’라는 이름을 내걸고 선거 연대를 하면서 다시 한 번 당선되었고 곧 한나라당으로 돌아왔다. 이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의 공천 파동을 전격 비판하면서 김무성 의원을 옹호하였다. 이례적으로 직접 부산 남구 을 선거구를 찾아서 지원 유세를 해주었을 정도다.

 

이처럼 김무성 의원을 중심으로 한 ‘친박 무소속 연대’와 한나라당 내 친박 생존자, 그리고 탈당자들이 만든 당인 ‘친박연대’ 등을 합쳐 친박은 총 40여명의 현역의원을 기록하게 되면서 향후 대선 국면에서 친박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된다.

 

이후 일등공신인 김무성은 무소속으로 당선되고 복당한 다음에는 한나라당의 사무총장, 최고위원, 원내대표를 두루 거치며 거물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후 박근혜 의원과 김무성 대표의 관계는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갈등이 첫번째로 수면위로 드러난 사건이 ‘원내대표 파동’이었다. 당시 한나라당에서 김무성 의원에게 원내대표를 제의했는데, 김무성 측에서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정작 박근혜 쪽에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결국 두 사람이 사이가 나빠지게 된 계기가 됐다.

    

악화된 관계

 

여기에 결정타로 2009년 하반기 세종시 수정안을 놓고 원안 고수 입장을 밝힌 박근혜와 달리 김무성은 수정안을 지지하며 김무성과 박근혜는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이는 이명박 대통령이 ‘세종특별자치시 수정안’을 들고 나오자, 김무성 의원은 이를 지지하였으나 박근혜 의원은 세종시 원안 고수를 주장하면서 의견이 갈린 것이다.

 

김무성 의원의 측근들은 박근혜 대표와 숱하게 싸웠다고 회상한다. 특히 갈라지게 된 결정적인 사건인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서는 박근혜 대표의 ‘반란 집압’이라는 그림이 강했다.

 

지난 2009년 10월22일 김무성 당시 사무총장은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을 사실상 지지했다. 한겨레신문이 바로 전날 1면 머리기사로 ‘세종시는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이 원안대로 추진해야 한다는 게 박근혜 전 대표의 확고한 생각’이라고 보도했지만, 김무성은 ‘원안 변경’을 주장한 것이다. 정치권은 긴장했다.

 

이에 박근혜 대표는 그간의 침묵을 깨고 “세종시법(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은 국민과의 약속”이라고 못 박았다. 김무성의 케이블방송 인터뷰 바로 다음 날이었다. 누가 봐도 수하 장수의 반란을 진압하려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후 한 달 간 침묵하던 김무성 의원은 기자들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밝히며 박근혜 대표에게 사실상 무릎을 꿇었다. 김무성 의원은 당시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내가 딴 맘을 가질 이유도 없고, 그럴 사람도 아니다. 세종시 문제는 나의 소신이었다. 그런데 전달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당일 아침까지도 한겨레 보도를 몰랐다. 박 대표가 그런 말을 한 줄 알았으면 나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을 거다. 애초에 그 법을 통과시킬 때 내가 사무총장이었고 당 대표는 박근혜, 원내대표는 김덕룡이었다. 노무현이 청와대와 국회만 빼고 (정부 부처를) 전부 다 가져가서 괴물을 만든다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겠나. 하지만 총선 직전이라 충청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충청 출신 의원들은 의원총회에서 거의 울다시피 했다. 인정에 끌려 찬성 버튼을 눌러줬다. 그때 내가 부끄러운 선택을 했다는 뜻이고, 그래서 사죄한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박근혜 대표는 내가 무슨 말만 하면 기분 나빠했다”

 

결국 이같은 세종시 파동은 김무성 의원이 박근혜 대표에게 무릎꿇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사실 이 당시부터 무대(무성 대장)이 아닌 무쫄(무성 쫄보)가 아니었냐는 말도 있다.

 

결국 이때부터 원조 친박에서 비박으로 돌아서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갑자기 박근혜 의원과 결별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달라서 생긴 갈등이 쌓이고 쌓이다가 이 세종시 수정안 문제가 기폭제가 돼 결국 결별까지 이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 2008년 5월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무성 의원과 박근혜 의원이 나란히 앉아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중앙일보> 

 

朴정부 개국 공신

 

이후 박근혜 대표와 큰 갈등 없이 조용히 지내오던 김무성 의원은 19대 총선이 다가오면서 다시금 위기에 빠지게 된다.

 

2011년 하반기, 홍준표 대표 체제가 유승민, 남경필, 원희룡 최고위원 등의 쇄신파들이 무더기로 사퇴하면서 무너지게 되자, 박근혜 의원이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전권을 잡아 당을 완전히 장악해 버린 것이다.

이에 사실상 당을 모조리 장악한 박근혜 당시 비대위원장은 19대 총선에서 김무성 의원에게 공천장을 주지 않게 된다. 친박계로 18대 총선에서 이미 공천보복을 당한 김무성 의원이 이번에는 ‘비박계’라는 이유로 공천장을 받지 못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된 것이다.

 

이에 김무성 의원은 자신처럼 비박계 & 친이계 또는 박근혜 비대위원장에 반기를 들었단 이유로 공천에서 탈락한 한나라당 국회의원 약 30여명과 외부의 자유선진당, 국민생각과 힘을 합쳐서 비박계 범우파 신당을 창당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김무성 의원을 중심으로 다시 친이계 의원들과 국민생각, 자유선진당으로 크게 뭉쳐서 4~50여개 지역구에서 출마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마지막 순간에 실현이 어렵고 탈당이 소신과 어긋난다는 이유를 밝히며 중단했다. 새누리당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고, 야권으로서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당시 김무성 의원은 탈당을 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로는, 영남에서 한나라당과 신당이 경쟁하게 되면 어부지리로 야권이 총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크게 높아지고 그렇게 된다면 대선은 해보나 마나라는 예상 때문이었다고 한다.

 

실제 영남 특히 부산의 경우 야권 단일 후보들이 40%가 넘는 득표율을 기록한 지역이 제법 많았던 점을 보면, 만일 우파 신당이 출현해서 여당표가 분산됐으면 야권이 총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커졌을 것이다.

 

결국 총선에서 과반을 차지하며 승리한 새누리당을 이끈 박근혜 위원장은 ‘선거의 여왕’ ‘당을 위기에서 구출한 영웅’ 취급을 받으며 명실공히 ‘보수당의 유일무이한 대권후보’로 등극하게 되고, 이는 김무성 의원이 탈당하지 않은 것이 박근혜 위원장에게 큰 도움을 준 것과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야권일각에서는 ‘김무성 의원이 박근혜 위원장이랑 짜고 탈당하는 척해서 당 내 배신자들을 조기에 걸러냈던 기획’이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결국 이같은 김무성 의원의 결정으로 지난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때 박근혜 캠프의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아서 일선에서 뛰며 잠시 갈라졌던 관계를 조금이나마 해소하며 박근혜 대통령 당선의 1등 공신으로 등극한다.

 

특히, 이 당시 선대본부장을 맡았던 김무성 의원은 국정원 대선개입과 연계된 행동을 한 것이 드러나 ‘부정선거 의혹’의 주범 중 한 명으로 지목됐다. 바로 김무성 의원이 당시 대선 연설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대화록’을 유출시킨 것이다.

 

이 대화록은 지난 2007년 10월 2일에서 10월 4일 동안 노무현 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이 회담을 가진 당시의 내용이 ‘NLL을 포기했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민주당에 대해 공세를 퍼부었던 ‘북풍 정치 공세’다. 문제는 국가 최중요 문서인 ‘외교문서’를 공개하면서 ‘국가 외교 신뢰성’이 폭락했고, 이를 공개한 새누리당 의원들은 기밀을 유출했다는 ‘실정법 위반’문제가 걸렸는데, 이 중심에 김무성 의원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프레시안>이 지난 2012년 12월14일의 김무성 유세를 취재한 녹음한 파일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해, 녹취록을 공개한 후, 유튜브를 통해 녹음한 음성 파일을 공개해 김무성 의원이 내용을 입수한 사실은 빼도 박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려 논란이 폭증한다.

 

녹음파일이 공개되자 김무성 의원은 원문을 본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남북정상회담록과 상당부분 일치해 원문을 보지 않고는 알수 없는 사실을 말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실은 대통령 선거전 입수한 사실 자체가 불법이 됨을 넘어서, 박근혜 선대위측이 국정원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을 공인하게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대선 당시 김무성 의원이 문건을 입수했을 때, 정보열람이 가능한 ‘국회의원’같은 고위 공직자도 아닌 ‘무직 신분’이었다. 즉 ‘공직자’가 아닌 ‘민간인’ 신분에서 대통령 지정 국가기록물(기밀문서)을 손에 넣어 입수했다는것으로 명백한 실정법 위반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이와더불어 김무성 의원의 행동이 들통나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의혹관련하여 대선 이후 강조했던 “국정원이 어떤 도움을 주지도,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는 해명은 거짓이 된다. 더군다나 논란의 12월14일 부산 유세는 박근혜와 김무성이 함께했다.

 

결국, 이는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 후에도 계속 따라다녔던 ‘부정선거’ 중심에 김무성 의원이 서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됐다. 김무성 부산 유세로 인해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의혹과 NLL 대화록 논란이 하나로 합쳐진 상태가 되어 버렸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공개된 자료에는 새누리당측의 대화록 전문 공개 전의 주장인, NLL을 포기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외교문서의 공개논란과 함께 이에 대한 추궁이 들어오자 새누리당은 “NLL을 ‘포기’했다”에서 “‘사실상 무력화’한 것이란 내용을 암시한다”로 입장을 변경하였으며, 이후 대화록의 발언에 대한 해석논란이 진행되었다.

 

대화록 논란을 주도했던 새누리당 윤상현 의원은 훗날 포기 발언은 없었다고 고백했다. 결국 김무성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을 당선시키기 위해 ‘외교 문서 공개’라는 국가 위신을 떨어뜨리며, 국정원과 함께 ‘조작극’을 감행했던 것이다.

    

▲ 새누리당 대표시절, 박근혜 정부 성공을 위한 화룡정점을 찍겠다는 김무성 의원. 하지만 그는 ‘박근혜 탄핵 1등 공신’이 됐다. <사진=새누리당>

 

파국,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을 만들었던 김무성 의원의 국회 복귀까지는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지난 2013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부산 영도구에 출마해 65%가 넘는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국회로 복귀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2014년 7월에 열린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실시된 최고위원 경선에서 친박 큰형님 서청원 의원과 치열한 접전을 벌여 승리해 새누리당 수장이 됐고, 이후 거의 완벽한 ‘비박’으로 포지셔닝을 했다.

 

하지만 ‘할 말은 하는 당대표가 되겠다’던 처음 약속과는 달리 박근혜정부와 의견 차이가 생길 때마다 자신의 뜻을 번번이 굽혀서 사람들이 붙여준 ‘무대’라는 별명보다는 ‘무쫄’이라는 별명으로 더 불리는 등 조롱을 당하게 된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과 갈등이 생기면, 이틀도 못넘기고 꼬리를 내린다는 ‘30시간의 법칙’은 김무성 의원의 당 대표 임기 내내 반복되어 버린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이 추진한 ‘경제 활성화 법안’ ‘국정 역사교과서’ 등 논란이 큰 법안들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당을 ‘청와대 비서실’로 만들었다는 비판에도 직면했다. 그러나 지난 20대 총선 당시 친박계 이한구 의원이 공천관리위원장으로 내정되며, 비박계에 대한 대대적인 ‘공천 숙청’ 벌어지면서, 김무성 대표도 행동을 감행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다.

 

이에 김무성 대표는 공천마감 시일까지 유승민, 이재오 의원 등의 비박 주요인사를 내친 공천장에 서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자신의 지역구인 부산광역시 영도구로 귀향하는 이른바 ‘옥새런’을 감행하게 된다. 결국 친박계가 이를 어느정도 수용하면서 김무성 대표는 그나마 ‘당 대표’로서의 면을 세우지만, 박근혜 대통령과의 관계는 더 이상 회복 불가 상황에 빠져버린다.

 

무엇보다 이같은 공천 파동 등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민심을 크게 잃어버린 새누리당은 그간 자신들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총선에서의 대참패를 겪게된다.

 

결국 김무성 대표를 비롯한 새누리당 지도부는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전원 사퇴했다. 다만, 김무성 대표는 총선 이전부터 총선이 끝나면 당이 이기든 지든 대표직에서 물러날 것임을 시사해 오기도 했고, 대선에 출마하려면 어차피 당대표에서 물러나야 하기 때문에 새삼 놀라울 것도 없다는 냉담한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총선 대참패로 입지가 제대로 추락하며 차기 대권 도전 가도에 빨간불이 켜졌다. 그리고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게 된다. 다만 이같은 대선 불출마선언도 ‘개헌을 통해 차기 총리를 노리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진다.

 

개헌은 박근혜 대통령이 가장 원하는 시나리오 중 하나였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을 만든 김무성 의원은 끝까지 뜻을 함께하는 ‘공주의 남자’ 행태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지면서 개헌은 물거품이 됐고, 김 의원은 박 전 대통령을 탄핵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 둘의 사이는 더 이상 되돌릴 수 없게 됐다.

 

다만, 박근혜 전 대표가 제명됐다는 이유로 다시금 자유한국당에 컴백하면서 ‘새로운 보수’를 시작하겠다는 철학도 ‘거짓’이 되어버렸다. 당 대표가 비박계 홍준표라지만 여전히 친박은 현역의원 최대계파를 자랑하며 그 세를 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김무성 의원에게 ‘정치인 박근혜’라는 멍에는 앞으로 평생 남을 것으로 보인다.

    

penfre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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