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진정한 민주주의 첫발을 내딛다”

투쟁의 역사…‘민중의 힘으로 얻어낸 민주주의’

김범준 기자 | 기사입력 2018/01/19 [13:31]

1987, “진정한 민주주의 첫발을 내딛다”

투쟁의 역사…‘민중의 힘으로 얻어낸 민주주의’

김범준 기자 | 입력 : 2018/01/19 [13:31]

지난 2016년 말부터 2017년 초까지,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군 ‘촛불집회’는 헌법 농단 대통령으로 규정된 박근혜가 탄핵되고, 정권교체가 이뤄지면서 마무리됐다. 평화적인 민주혁명에 전세계의 관심은 집중됐으며, 우리나라 시민들은 이를 이뤄낸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마저 그만두게 할 수 있는’ 이같은 민주주의를 얻기까지는 수많은 투쟁의 역사가 존재했다. 촛불 혁명 이전 가장 최근의 사례는 바로 지난 1987년 민중항쟁이었다. 모든 국민들이 좌우이념에 관계없이 힘을 합쳐 전두환 독재정권과 맞서 싸워 국민 주권을 스스로 쟁취해낸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집요한 반대와 공작을 이겨낸 승리기 때문에 혹자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최근 이같은 과정이 영화 <1987>로도 상영되며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대학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폭발하기 시작한 민심

직선제 끝까지 막으려했던 전두환…‘상왕 통치계획’ 수립

이한열 열사의 사망 사건으로 본격적인 민중항쟁 시작돼

美반대 軍투입 무산되자 항복…1987년 체제 현재도 유지

 

▲ 영화 의 포스터.   

 

[사건의 내막=김범준 기자] 17년간 독재정치를 펼치던 박정희가 김재규가 기획한 1979년 10·26 사건으로 사망하고, 새로 취임한 대통령 최규하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밝힌다. 하지만 이 기쁨도 잠시, 전두환 등을 비롯한 신군부가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 내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전두환은 최규하를 로봇처럼 조종했고,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집권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에 시민들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신군부를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특히 5.18광주민주화운동 현장에서의 참극은 전두환 정권의 잔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후 최규하를 축출한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민주화 열망

 

이후 전두환 정권은 3S(Screen, Sports, Sex)로 대표되는 각종 유희문화를 집중적으로 육성시키는 등 각종 ‘우민화 정책’을 펼쳐 사람들을 정치에서 관심이 멀어지게 했다. 또한 평화의댐, 수지 김 간첩조작 사건 등 수많은 사기극으로 국민들의 불안감을 가중시켜 정권유지에 정당성을 홍보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두환에게 반발하는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면서 정권을 끌고 온 것이다.

 

이렇게 유지되던 전두환 정권은 1987년에 들어서서 크게 흔들리게 된다. 그 시작은 1987년 초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당시 시대적 화두는 당연히 ‘민주화’였다. 민주화를 위해선 전두환 정권이 끝나야 했고, 이를 위해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필요했다. 하지만 전두환은 이같은 시민들의 요구를 묵살해 가던 상황이었다.

 

이같은 목소라기 높아지고 시위가 날로 격렬해지자 전두환 정권은 강경진압에 나섰다. 당시 운동권 선배의 행방을 캐묻기 위해 박종철 씨를 연행한 경찰들이 그에게 물고문을 가한 끝에 박종철이 사망하자 경찰은 물고문 사실을 은폐할 목적으로 갖은 공작을 펼쳤다. 그래서 생겨난 희대의 망언이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였다. 경찰의 발표는 심문 과정에서 실토하라면서 책상을 내려쳤는데 심장마비로 억 하고 죽었다는 것이었고 이를 당시 언론에서 기사로 다루며 헤드라인으로 뽑아낸 문구가 바로 저 명언인 것이다.

 

이에 검찰은 당시 최환 서울지검 공안부장과 안상수 형사부 평검사(現 창원시장)를 중심으로 ‘박종철 사망 의혹’ 수사팀을 만든다. 그리고 최환 부장검사가 중심이된 수사팀은 청와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부검의였던 오연상, 황석준과 함께 박종철 씨가 ‘쇼크사’가 아닌 ‘질식사’로 인해 사망했다는 것을 밝혀내게 된다.

 

수사는 ‘박종철 사망 의혹’에서 ‘박종철 고문 경찰관’에 대한 수사로 바뀌게 되었고, 이 때 최근에 임명된 박상옥 대법관는 1, 2차 수사에 ‘말석’ 검사로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박종철 씨 사망 후 부검을 실시해본 결과 박종철 씨의 시체는 수많은 피멍과 물고문, 전기고문의 흔적들이 역력했고 당시 부검의가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정식으로 확인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물론 당시 수사팀은 정권수뇌부에 압력으로 인해 사실상 사건을 축소 발표했다. 하지만 이같은 축소 발표에도 국민들은 분노의 표시로 경적을 울리는 경적 시위를 하기도 했다. 결국 고문 경찰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두환은 직선제로의 개헌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묵살하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여 국민들의 민심을 격앙시켰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여야가 합의해서 개헌을 하기를 바랬으나 야당이 하도 억지를 부려 합의가 안된다. 고로 오늘부터 일체의 개헌논의를 중단하고 현행헌법에 따라 1988년 2월에 새 정부에게 정권을 이양하겠다. 그리고 개헌논의는 88 서울올림픽 이후로 미룬다. 대신 임기 중에 지방자치제를 단계적으로 실시하는것을 검토하겠다”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곧 올림픽도 하는데 개헌이야기는 하지말라는 이야기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올림픽 핑계를 댄 것이다. 당연히 국민들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간 발표였다. 개헌논의 중단에 대한 반발로 야권에서 주장하던 지방자치제 도입을 반대급부로 시사하긴 했으나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대통령 취임 때부터 7년 임기를 마치면 무조건 떠나겠다고 약속해온 전두환은 퇴임 이후에도 실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각제 개헌을 구상하고 있었다. 국회의원 공천권을 가진 집권당 총재로 후계자 노태우를 허수아비 국무총리로 세워서 좌지우지 한다는 ‘상왕 계획’을 설계 했던 것이다.

 

이처럼 군사정권의 억압 속에서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는 분위기가 높아졌지만, 당시 야당인 신한민주당의 이민우 총재, 이철승 등은 당시 전두환 정권이 주장하는 내각제 개헌에 대해 지지의사를 밝혔다. 이에 반발한 김영삼, 김대중 등은 자신들 계파에 속하는 70여명의 의원들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 창당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전두환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1987년 4월20일부터 4월24일까지, 통일민주당의 20여개 지구당에 폭력배들이 난입하여 기물을 부수고 당원들을 폭행하는 등 난동을 부렸으며, 이로 인해서 창당대회는 인근 식당이나 길거리에서 약식으로 치러졌다. 통일민주당 측은 처음부터 이것은 정부가 개입한 비열한 정치공작이라 규탄하고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였으나, 수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결국 국회에서는 개헌을 위한 위원회가 여야의 만장일치에 의해 추진되고 있던 상황에서 전두환이 호헌 조치와 야권에 대한 잦은 탄압으로 논의 자체를 뒤집어 버리자 직선제 개헌으로의 변화를 고대하던 국민들의 반발을 한 번에 받게 되고 만 것이다.

    

▲ 지난 1987년 6월26일, 부산 문현로터리에서 열린 ‘평화대행진’ 행사 도중 한 시민이 웃통을 벗어던지고 “최루탄을 쏘지 마라!”고 외치며 뛰어가는 장면. <사진=보도사진연감>

 

폭발한 민심

 

그런 와중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소속의 김승훈 신부가 5.18 민주화 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박종철 씨의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은폐되었고 고문경찰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는 것을 폭로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더욱 상승했다.

 

그리고 5월27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어 그간 분열되어 있던 민주 세력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국본은 6월10일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 날에 맞춰서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규탄’하는 집회를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도시에서 열기로 했다. 그러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국본의 간부들이 체포되었고 집회가 무산되자 서울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경찰이 시위대들을 보이는 대로 체포하는 가운데 일부 시위대가 명동성당으로 피신하면서 소위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미 5월 이전부터 진행 중이었던 시위를 특별히 6.10 항쟁, 6월 항쟁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명동성당에는 당시 故 김수환 추기경이 있었는데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의 입지를 활용해 시위대를 잡으려는 경찰을 막아주었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경찰을 향해 “수녀들이 나와서 앞에 설 것이고, 그 앞에는 또 신부들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 맨 앞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밟고 신부들을 밟고 수녀들까지 밟아야 학생들과 만날 것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추기경이 거부하는 상황에서 성당에, 그것도 추기경이 있는 명동성당에 함부로 경찰을 투입해서 사람을 잡아간다는 것은 세계 가톨릭계 전체에 도전하는 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무소불위의 국가 권력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손을 뻗을 방법이 없었다. 거기다 전두환이 벌인 최대의 쇼인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자칫 유럽이나 남미의 가톨릭 국가들이 올림픽을 보이콧을 할 가능성도 높았다. 실제로 교황청은 명동 성당 내로 공권력이 투입되거나 시위 진압에 군이 동원될 경우 서울올림픽에 대한 전면적 보이콧을 검토했었다고 한다. 국민들도 명동성당 안의 시위대에게 호응하면서 헌금의 형식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보내주는 등 지지를 표시했다.

 

한편 6월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경찰의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아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이한열은 결국 6.29 선언이 발표된 지 6일 뒤인 7월5일 요절했다. 문제는 이 최루탄에 직격당한 장면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잡혔다는 것이다. 이한열군의 중상으로 경찰이 무차별로 쏘아대는 최루탄에 반대하는 최루탄 추방대회가 6월18일 전국 각 도시에서 150만여명이 참여한 시위가 열렸다.

    

전두환 행보

 

이에 당황한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 선포까지 검토할 정도로 다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군의 투입을 거의 결정한 단계였다고 한다. 실제로 6월19일 군부대 투입을 통한 무력진압을 실시하기로 결정이 되었고 수도권 외곽에 주둔 중이던 충정부대(제17보병사단, 제20기계화보병사단, 제30기계화보병사단 등 서울 주변에 있는 부대)들을 서울 외곽지역에 집결시켰다. 여기 소속 병사 증언에 의하면 이미 출동 준비를 마치고 서울 진입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으며 수도방위사령부 소속 병사들 역시 출동준비를 이미 끝마친 상태였다고 한다. 즉 명령만 내려지면 바로 투입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청와대출입기자들에게 6월19일 밤 10시 대국민담화를 발표할 것이며 이와 동시에 군부대를 투입하여 무력진압으로 소요사태를 종결할 것이라고 통보하였고 기자들은 이 내용을 본사에 정보보고 한 상태였다.

 

무력진압에 대한 정보는 당연히 시위 지도부에게도 전달되었으며 시위지도부는 유혈사태에 대비하여 비상연락망을 가동하고 길거리에서 시위하는 시민들 틈에 섞여서 연행 당하는 것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대비를 하였다.

 

한편 주한미군 정보부대에서는 5월19일 오전에 한국군이 무력진압에 대비하여 병력을 동원하고 있다는 징후를 포착하였다. 청와대에서 19일에 주한미군에게도 무력진압을 위한 군부대 이동을 통보하라고 지시는 내려갔지만 한미연합사령부에 통보되지 않았다.

 

CIA 한국 지부에서는 6월 20일 새벽 4시에 강제진압을 할것이라는 구체적인 첩보를 입수하였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강한 반미 감정과 군부대 투입의 악영향을 경험한 미국은 한국군의 무력진압을 저지하기 위하여 CIA가 주한미군의 협조를 받아 전차5대를 차출하여 수도방위사령부와 육군 특수전사령부등 한미연합사령부의 통제하에 있지 않고 한국이 단독으로 움직일수 있는 부대들의 정문에 전차를 보내 무력시위를 함으로써 한국군에게 압력을 넣었다. 이 행동은 효과를 발휘하여 진압부대의 출동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이와 더불어 6월20일 오후에 주한미국대사가 전두환과 면담 일정이 있다는걸 알고 전두환과 만나러 가기 전에 접촉하여 한국군의 무력진압 계획을 알려주고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다시 한 번 무력진압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함으로써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비극이 다시 벌어질 뻔한 위기를 막는데 성공하였다. 미국상원에서 한국 민주화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민주화에 힘을 보탰다.

    

▲ 피흘리는 이한열 씨와 이를 부축하는 이종창 씨. <사진=로이터 정태원> 

 

시민의 승리

 

결국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6월29일, 노태우 후보의 직선제 수용 선언(6.29 선언)으로 야권의 요구를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이 선언을 통해 노태우 후보는 자신의 선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대통령 후보를 포함한 모든 공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했고, 이후 당시 여당이었단 민정당은 이 선언을 당의 공식입장으로 인정했다. 이어 전두환도 특별담화를 통해 6.29 선언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면서 이 선언은 정부의 공식 선언이 되었다. 그와 함께 4.13 호헌조치는 철폐되었다.

 

6.29 선언이 발표되자 6월 항쟁은 이한열의 장례식으로 끝을 맺었다. 이 장례식에는 100만 명의 서울 시민들이 참석했다. 6월 항쟁이 끝나고 6.29 선언에 따른 헌법 개정 작업이 착수되었고,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를 통해 새 헌법이 확정, 6월 항쟁과 6.29 선언으로 이어진 일련의 과정은 일단락되었다.

 

6월 항쟁이 이런 엄청난 규모의 시위로 번지게 된데에는 대학을 졸업한 도시 봉급자(화이트 칼라)를 중심으로 한 신흥 중산층들의 참여. 이른바 넥타이 부대가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때마침 낮이 가장 긴 6월인데다 서머타임 시행으로 날은 9시까지 쨍쨍하고 시위가 진행되는 서울 도심 한복판은 지하철 운행을 중단 혹은 무정차 통과해 시위 참여의 좋은 명분을 만들어주었다. 강남의 아파트 촌까지 소등 형식으로 시위가 진행됐다.

 

음식점 주인들과 아줌마들이 시위에 참가하는 시민들을 위해 김밥을 싸주며 시위에 박차를 가하였고, 넥타이 부대들을 비롯한 시민들이 시위를 막고 있는 전경들에게 장미꽃을 꽂아주었다. 그야말로 남녀노소와 지역과 빈부 격차를 떠나 거국적인 여론이 흔들리는 것이었다.

 

6월 항쟁은 사실상 수십 년에 걸친 군부독재를 국민의 힘으로 청산시킨 민주 항쟁으로 평가된다. 국민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독재를 연장하려고 했던 전두환 정권을 사실상 굴복시켰으며 민주화를 달성한 분기점인 것이다. 이에 1987년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새로운 터닝포인트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후의 헌법 개정이 없었으므로 정치적, 헌법적으로는 분명히 현재 대한민국은 87년 체제에 의해 굴러가고 있다.

 

그리고 1987년 민중항쟁을 계기로 과거사 청산운동, 과거사 진상규명을 비롯해 기나긴 독재정권의 세월 동안 금기시 당한 사건과 인물들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penfre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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