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품은 중세 재벌, 메디치 가문 이야기

“부인의 결혼 지참금, 입지전적 가문 성장하다”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5/08 [09:43]

세계를 품은 중세 재벌, 메디치 가문 이야기

“부인의 결혼 지참금, 입지전적 가문 성장하다”

이일영 칼럼니스트 | 입력 : 2018/05/08 [09:43]

메디치가의 창시자 ‘조반니 드 메디치’(1360∼1429)는 1386년 토스카나 귀족 출신 ‘피카르다 부에리’(1368~1433)와 결혼하여 큰아들 대 코시모 드 메디치(1389~1464)와 둘째 아들 ‘로렌조 드 메디치’(1395~1440)에게 메디치가를 물려주었습니다. 이와 함께 또 다른 두 아들 ‘다미아노 드 메디치’(1389년경~1390)와 ‘안토니오 드 메디치’(1397년경~1398) 는 생후 일 년 만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창업자 ‘조반니’가 물려준 경영철학 대대로 이어온 후손
부인 ‘피카르다 부에리’ 의 내조와 자녀교육도 중요요인
어려움 처할 때마다 귀족연합을 주선 하거나 군대 지원
음모의 궁전 갇힌 메디치가…피렌체서 쫓겨난 대코시모

 

▲ 메디치가 창시자 조반니 부부와 두 아들.  

 

‘조반니’는 친척의 은행에서 일하면서 부인이 가져온 결혼지참금이 밑천이 되어 1397년 메디치 은행을 설립하여 입지전적인 부를 쌓았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 오지만 큰 맥락에서 보면 세력과 맺은 인연을 끝까지 신의로 지켜낸 처세가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은행 설립 이후 ‘조반니’가 세상을 떠난 1429년까지 32년 동안 당시 상황은 그야말로 격변이었습니다. 은행의 가장 큰 고객이었던 교황청이 세 명의 교황으로 대립하였으며 피렌체 도시는 날이 새면 새로운 세력의 용병이 쏟아내는 함성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메디치가의 창시자


큰 흐름에서 메디치가 300년의 경제적 성장을 살펴보면 창시자 ‘조반니 메디치’(1360∼1429)가 은행을 설립하여 그 바탕을 일구었으며 이를 물려받은 큰아들 대 코시모 드 메디치(1389~1464)에 의하여 절정의 융성을 가져왔습니다. 이는 창업자 ‘조반니’가 물려준 경영철학과 그의 부인 ‘피카르다 부에리’ 의 내조와 자녀교육이 큰 영향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에 초점을 두어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조반니’와 ‘피카르다 부에리’의 결혼에서부터 파악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당시 매우 못생긴 추남이었으며 상당한 격차의 신분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는 가운데 ‘피카르다 부에리’ 가 ‘조반니’의 성실하며 지혜로운 모습을 보고 강하게 고집하여 성사된 결혼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부인의 선택을 증명하듯 ‘조반니’는 당시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문란한 생활과는 달리 평생을 사업과 가정에 충실하였습니다.


나아가 ‘조반니’는 언제나 검소하였으며 눈에 띄는 활동이 아닌 조용한 처세로 차근차근 부의 금자탑을 쌓아 갔던 것입니다. 더욱 ‘조반니’의 삶에서 돋보이는 대목은 당시 엄청난 재앙인 흑사병이 피렌체 도시를 강타하여 죽음의 도시로 변한 암흑의 시기에 헌신적인 기부를 통하여 시민을 보호하였습니다. 이는 부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선구적 사실과 함께 이로 인하여 서민 사회에서 부자의 적대감이 아닌 존경의 대상으로 평가된 사실은 그의 인간적인 모습과 뛰어난 사업가의 면목이 그대로 드러난 점이라 할 것입니다.


이와 함께 ‘조반니’의 부인 ‘피카르다 부에리’의 조용한 내조와 바른 자녀교육으로 헌신한 삶이 가져다준 영향 또한 큰 바탕이었습니다. 부인은 1429년 남편 ‘조반니’가 죽고 1433년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4년간을 너무나 비통한 슬픔으로 남편을 그리워하였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피렌체 인본주의 문학가이며 르네상스 인문주의 학자로 잘 알려진 카를로 마르소피니(CarloMarsuppini,1398~1453)가 '피카르다 부에리’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친구인 두 아들 ‘대 코시모’와 ‘로렌조 드 메디치’에게 전한 추도문에 잘 담겨 있습니다.


그는 늘 뵈었던 친구 어머니 ‘피카르다 부에리’의 영전에 카리아(Caria)국의 ‘아르테미시아 2세’ 여왕(BC. 395~BC.351)의 사랑과 고대 로마제국의 포르키아(Porcia.BC, 70~BC,42)의 사랑에 이어 또 하나의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을 역사에 남기고 갔다고 추모하였습니다. 메디치가의 수많은 이야기가 역사에 전해오지만, 르네상스 인문학자가 전한 추도문에 담긴 메디치가 창시자 ‘조반니’ 부부의 사랑 이야기에 대한 설명이 없는 점을 늘 아쉬워하며 이번 기회에 이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먼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고대 ‘마우솔로스’ 에 담긴 ‘아르테미시아 2세’ 여왕과 ‘마우솔로스’ 왕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B.C. 4세기경 현재 터키지역인 ‘카리아국’은 페르시아에서 독립한 나라로 당시 ‘마우솔로스’ 왕이 죽은 후 왕비 ‘아르테미시아’ 2세 여왕이 수도이었던 ‘할리카르나소스’(Halicarnassus)에 남편을 위하여 만든 묘소가 ‘마우솔로스’입니다. 피라미드형 지붕을 가진 45m 높이로 추정되는 이 무덤은 ‘알렉산더대왕’의 후계자이었던 고대 그리스 시인이며 정치가인 ‘안티파테르’(BC. 397~BC. 319)의 시에서 ‘고대 7대 불가사의’ 라고 노래한 이후 오늘날에도 영원한 이야기로 남은 역사적인 유물입니다.


‘亞르테미스 2세’ 여왕은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이 무덤을 만들면서 사랑하는 남편과 영원한 몸이 되기 위하여 남편의 유골을 화장하여 무덤이 완성되는 2년 동안 날마다 포도주에 섞어 마시다가 이를 다 마신 이후에 세상을 떠난 섬뜩하면서도 슬픈 사랑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 고대 로마제국의 ‘포르키아’와 브루투스의 사랑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저의 암살자 ‘브루투스’와 그의 둘째 부인 ‘포르키아’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전하는 ‘사도 바울’이 갇힌 감옥이 있던 빌립보전투에서 ‘브루투스’는 참패하여 자결합니다. 남편 ‘브루투스’의 소식을 들은 ‘포르키아’가 이를 걱정하여 주야로 지키는 감시의 눈을 피해 뜨거운 석탄을 재빨리 삼키고 입을 닫기를 반복하였던 자살로 사랑하는 남편의 곁으로 떠나간 슬픈 이야기입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 학자 ‘마르소피니’는 평소에 늘 보아왔던 친구의 어머니 ‘피카르다 부에리’ 모습을 고대의 역사적인 사랑을 잇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추도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메디치가 창시자 ‘조반니’ 부부의 숨은 사랑 이야기를 살피면서 역사에 기록되는 부자를 만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똥별과 같은 요행이 아닌 사랑으로 덩어리진 내조의 힘이 바탕이 되었음을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부모의 교육을 받은 큰아들 대 코시모 메디치(1389~1464)가 청출어람처럼 메디치가의 눈부신 융성을 이루는 많은 이야기들을 이어서 살펴보기로 합니다.

 

▲ 코무네(comune)와 시뇨리아(signoria)의 역사를 간직한 피렌체 자료 

 

메디치가의 융성


메디치 은행의 역사는 중세 유럽의 상업사와 함께 살필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 많습니다. 격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부를 추구한 옛사람들의 활약을 통하여 부의 경쟁이 가지는 치열한 모습들이 예나 지금이나 돈이 가지는 위력을 먼저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중세의 역사는 오늘날 세계문명을 일군 모든 바탕이 중세라는 치열한 시대 상황을 통하여 이루어진 사실에서 이를 헤아리며 오늘의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역사에 담긴 훼손 될 수 없는 진리가 담겨 있는 까닭입니다.    


메디치가의 창시자 ‘조반니’의 큰아들 대코시모로 통하는 ‘코시모 드 메디치’(Cosimo di 'Medici, 1389~1464)는 1389년 4월 ‘다미아노 드 메디치’(1389년경~1390)와 쌍둥이로 태어나 형제인 ‘다미아노 드비치’는 태어난 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스무 살 무렵 1409년경부터 아버지 ‘조반니’가 설립한 메디치 은행에 근무하며 후계 수업을 받았습니다.


1415년에 ‘대 코시모’는 이탈리아 귀족 바르디 가문의 ‘콘테시나 드 바르디’(Contessina de' Bardi, 1390~1473)와 결혼하였습니다. 대 코시모의 처가인 바르디가문은 당시 자치 도시 피렌체 공화국의 종주권(suzerains) 에 영향을 가진 귀족 가문으로 특히 피렌체 공화국과 용병 계약을 맺은 군대 조직을 가지고 있던 콘도티에리(condottieri) 가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대코시모가 메디치 은행을 이끌어가면서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귀족들의 연합을 주선하거나 군대의 힘을 지원하며 ‘대코시모’의 든든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바르디 가문에 대하여 좀더 상세 하게 살피려면 당시 피렌체를 대표하던 3대 기업가 가문이었던 바르디 가문(Bardi family)과 페루찌 가문(Peruzzi family)그리고 아차이올리(Acciaioli family)가문을 반드시 살펴야합니다. 다음 기회에 이 부분은 별도로 이야기하도록 하고 이러한 바르디 가문의 딸과 ‘대코시모’의 결혼 과정에는 아버지 ‘조반니’가 앞을 내다본 깊은 생각에서 비롯된 결혼이었음은 ‘대코시모’의 은행 운영과정에서 충분히 이해가 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버지 ‘조반니’는 장남 ‘대코시모’의 결혼과 함께 본격적으로 은행의 후계자 수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오랫동안 은행을 운영하여 오면서 고수하였던 독립 채산제 운영을 분명하게 주지 시켜 이를 실천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메디치 은행의 특성적인 장부 기재법을 공부시켰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대코시모’는 복식부기법이라는 서양에서 최초의 회계장부를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복식부기와 같은 회계장부를 우리나라는 고려 시대 개성상인에 의하여 사개치부법(四介治簿法)이라는 같은 논리의 복식부기 회계장부를 사용하였던 사실에서 서양보다 200년이 앞선 우리 선조의 지혜에 가슴을 여미게 합니다.


아버지 ‘조반니’가 가장 중요하게 교육한 부분은 인적 자산에 대한 관리 부분 이었습니다. 이는 교황청 세력에서부터 다수의 귀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메디치 은행의 높은 성장을 가져온 아버지 ‘조반니’는 주요한 인물들을 아들 ‘대코시모’ 에게 소개하며 아들을 부탁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록으로 남은 ‘대코시모’의 행적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 메디치 은행의 가장 중요한 세력이었던 코사(대립교황)가 1415년 3월 콘스탄츠 공의회(Council of Konstanz)에 재차 소집통보를 받았을 때 ‘대코시모’가 대립 교황 코사와 동행한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이후 투옥되었던 코사를 1418년 아버지 ‘조반니’가 30,000플로린이라는 당시 궁전 30채를 지을 수 있던 거액의 보석금을 지불하고 피렌체로 망명시켜 오는 과정의 실무를 아들 대 코시모에게 맡기고 있었습니다. 이후 다음 해 1419년 12월 대립 교황 코사가 세상을 떠나자 성대한 장례를 치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대코시모’는 사업가에게 신의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배웠을 것입니다. 아버지 ‘조반니’ 는 자신의 협력자이며 친구이었던 코사의 장례를 마치고 새해를 맞은 1420년 그동안 착실하게 후계수업을 받은 장남 ‘대코시모’ 에게 자신의 열정을 바친 메디치 은행의 운영권을 완전히 물려주었습니다. 메디치 은행 2대 행장 ‘대코시모’ 가 탄생한 것입니다.    


‘대코시모’는 아버지에게 받은 교육을 바탕으로 철저한 독립 운영제를 시행하여 피사, 밀라노, 바젤, 제네바, 리옹, 아비뇽, 브뤼헤, 안트베르펜, 런던, 뤼벡 등 유럽 주요 도시에 지점을 신설하였습니다. 이는 방대한 지역적 세력을 가진 교황청 업무와 가장 적합한 메디치 은행을 구성한 것입니다. 이러한 아들의 든든한 성장을 지켜보며 메디치 은행 설립자 ‘조반니’는 1429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1433년 메디치가의 신사임당과 같았던 헌신적인 내조로 평생을 일관하였던 어머니 ‘피카르다 부에리’ 가 세상을 떠난 다음 알비치(Albizzi)와 같은 반대파의 음모에 베키오 궁전에 투옥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이때 부인 ‘바르디’ 가문에서 메디치가 구출을 위한 막후의 숨 막히는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 중세 길드 작업 광경 

 

음모의 궁전


메디치 은행의 2대 주인 ‘대코시모’는 1420년 은행을 물려받은 이후 1433년 유럽 각 나라 10개 주요 도시에 설립한 지점을 통하여 눈부신 성장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는 지중해와 유럽은 물론 증동지역까지 다양한 상품을 수출입하는 오늘날의 종합상사와 같은 경영방식을 은행 업무에 접목시킨 사례로 당시로는 매우 선구적 경영이었습니다. ‘대코시모’는 전수받은 아버지의 경영철학에 담긴 장점을 고수하면서도 더욱 활동적이며 공격적인 경영을 추진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매사에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지 않고 갈등과 반목을 중재하는 평화적인 입장에서 계층에 구분이 없는 후원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합리적인 의식으로 서민에서 귀족 그리고 상인에서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과 교유하였던 그에게 당연히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이와 함께 그는 어머니 ‘피카르다 부에리’의 열정적인 교육으로 인문학에서부터 문학과 예술에까지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고 후원하여 당대의 학자와 예술인의 높은 신망과 존경의 대상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급성장하는 메디치가의 기세에 위협을 느낀 반대파 피렌체 귀족들의 음모가 은밀하게 추진되었습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알비치가문의 리날도 델리 알비치(Rinaldo degli Albizzi, 1370~1442)와 스트로치가문의 팔라 스토로치(Palla Strozzi, 1372~1462)입니다. 이와 같은 자치 도시 피렌체의 시대적 대립을 이해하려면 한 번쯤은 배우며 지나갔지만 단번에 이해가 되지 않는 코무네(comune)와 시뇨리아(signoria)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코무네는 주민공동체라는 뜻으로 11세기경 이탈리아 일부 지역에 주민공동체 형태의 자치도시가 생겨나면서 지도자 격인 집정관이 혼자 또는 다수로 구성되어 도시를 이끌어 갔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민주적인 이 제도가 지도자의 선출과 관련된 다양한 계파가 난립하면서 여러 문제가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당시 외부의 위협이 수시로 발생하는 상황에서 자치제라는 협의 때문에 즉각 결정하여 대처할 수 없었던 문제로 시기를 놓치게 되어 도시의 운명이 바뀌는 일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코무네의 문제들을 보완한 통치 권한의 뜻을 가진 시뇨리아(signoria) 제도가 14세기에 도입된 것입니다, 이는 지도자의 권한을 강화한 제도로 도시마다 다르게 이루어졌으며 피렌체에서는 공화정이라는 모호한 체제로 주요한 길드의 조합원들이 선출한 9명의 대표로 시뇨리아(signoria)가 구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뇨리아는 정부의 주요한 업무를 결정하지만, 도시와 사회 각 분야에서 대표로 선출된 도디치 부오미미니(Dodici Buonomini)라는 12인으로 구성된 사회단체와 그리고 16인으로 구성된 피렌체 도시의 치안과 보안업무를 관장하였던 세디치 곤 팔로니에르(Sedici Gonfaloniere)와 협의하는 상당히 복잡한 체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중 장치와 같은 협의 제도는 경제력을 가진 부유한 상인에 의하여 지배되는 길드와 귀족들이 서로 은밀하게 연합하여 이를 선도하는 가문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었습니다. 12세기 당시부터 급변하는 피렌체 정세에 감각적인 권력을 가졌던 알비치가문이 피렌체를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용히 사업만 하던 메디치 은행 설립자 ‘조반니’와 달리 아들 ‘대코시모’는 성공적인 은행경영과 여러 사업의 확대로 엄청난 경제력을 가지게 되면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알비치가문의 ‘리날도 델리 알비치’가 스트로치가문의 ‘팔라 스토로치’와 공모하여 ‘대코시모’ 싹 자르기를 도모한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음모자 알비치가의 ‘리날도’가 1428년 토스카나 변경의 루카공화국 정복을 주장하여 전쟁을 이끌던 그가 전리품을 빼돌려 사유 재산을 축적하였다는 죄명으로 피렌체로 소환되었습니다. 이후 전쟁은 피렌체의 패배로 끝이 났고 자신의 소환 배후에 메디치 세력의 힘이 작용한 의심을 하고 루카와의 전쟁 패배의 원인을 메디치가 ‘대코시모’와 추종세력의 비협조로 몰아 피렌체에서의 추방을 도모한 것입니다.        

   
이러한 음모의 시나리오를 최종 점검한 ‘리날도’는 시뇨리 후보 중 베르나르도 구아다니(Bernardo Guadagni)가 경제적 어려움을 갖게 되자 이를 해결해주며 매수하여 자신의 세력을 동원하여 곤팔로니에레에 당선시킵니다. 이후 루카와의 전쟁 패배의 방조협의로 ‘대코시모’ 를 당시 베키오 궁전으로 소환하여 형식적인 재판과정을 거쳐 체포해 버립니다. 이후 ‘코시모’는 피렌체에서 20년간 추방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건이 전개되면 당시 학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게 되는데 당시 ‘대코시모’ 메디치가의 추방을 선도한 대표적 학자가 서유럽에 그리스문학을 최초로 소개한 마누엘 크리솔라라스(Manuel Chrysoloras, 1355~1415)이었습니다. ‘피렌체 찬가’로 잘 알려진 공화주의를 주창한 르네상스 인문학자 이며 정치 철학자인 레오나르도 브루니(Leonardo Bruni,1370~1444)가 그의 제자이었습니다.


또한 알비치와 함께 메디치가 추방의 거사를 도모한 스트로치 가문의 ‘필라스트로치’(Palla Strozzi) 또한 ‘마누엘 크리솔라라스’의 제자이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가장 극렬하게 사형을 주장하였던 프란체스코 필렐포(Francesco Filelfo, 1398~1481)가 마누엘 크리솔라라스의 삼촌인 존 크리솔로라스(John Chrysoloras) 의 후원으로 공부하였던 인연을 가진 사실에서 이들이 음모의 목소리를 높인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표자인 ‘마누엘 크리솔라라스’는 높은 지식에도 불구하고 매우 오만하였으며 이러한 이유로 메디치가와 교유하였던 학자들과 자주 충돌하였고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메디치가에 대한 반감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그가 ‘대코시모’의 추방에 앞장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짚고 가야 할 내용은 ‘대코시모’의 사형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던 프란체스코 필렐포에 대해서입니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에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사촌이었습니다. 르네상스에 대한 예술사를 살필 때마다 예술가 후원에 가장 큰 역할을 하였던 메디치가와 세기의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관계가 왜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대목이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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