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인의 나라 ‘페니키아’와 ‘파피루스’ 무역

“출중한 항해기술로 문화 퍼트린 상인의 전설”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6/24 [12:20]

상인의 나라 ‘페니키아’와 ‘파피루스’ 무역

“출중한 항해기술로 문화 퍼트린 상인의 전설”

이일영 칼럼니스트 | 입력 : 2018/06/24 [12:20]

서아시아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인류 최초로 문명의 씨앗을 놓은 메소포타미아문명에 이어 아프리카 사막에서 지중해로 흐르는 나일 강을 바탕으로 붉은 땅과 검은 땅의 문명을 낳은 이집트 문명이 동행하면서 크고 작은 도시와 나라들이 생겨나 인류의 선구적인 삶을 개척하고 있었습니다. 종족의 보존과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려는 경쟁 속에 지키고 앗으려는 치열한 투쟁이 전개되면서도 서로의 이익을 위한 협력이 대륙과 바다를 오가면서 역사라는 도도한 물결을 일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출중한 항해술 바탕으로 기원전 지중해 해상무역 주도
수많은 예술품과 함께 경이로운 페니키아의 염료 제품
전화발명과 비견될 획기적임 발명품 이집트 ‘파피루스’
교역 중심지로서 파피루스를 집중적 거래했던 페니키아

 

▲ 고대 페니키아인의 배 <사진출처=http://gossamerstrands.com/Hist100/lecture6.htm>

 

전설처럼 아득한 시대에 자연의 변화를 지켜보며 삶의 지혜를 하나씩 모아 문명의 개척시대를 살아갔던 인류의 조상들이 남긴 경이로운 이야기들을 역사로 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서나 선구의 조상이 남긴 경험과 실패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가 생성되었으며 그 자취를 따라 문명의 길이 대륙에서 바다로 이어졌습니다.

 

상인의 나라


이러한 선구적인 문명의 역사에서 끝을 알 수 없는 거센 물살을 가르며 바다의 왕국을 건설한 전설적인 상인의 나라 페니키아 국(Phoenicia)은 반드시 짚고 가야 할 이야기들이 넘쳐나는 나라입니다.


이와 함께 우리가 일반적으로 공부한 역사의 교과에서는 크게 기억되지 않는 나라이지만 인류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소중한 바탕을 가지고 있는 엘람 왕국(Elamite Dynasty)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합니다. 나아가 중앙 유라시아 대초원의 광활한 터전에서 뛰어난 기마술과 궁술을 바탕으로 역사의 중심을 달려간 전사의 부족 스키타이(Scythai) 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려 합니다.


페니키아(Phoenicia)인들은 BC 3,000년 경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 사이의 오늘날 페르시아만 해역인 에리트리언해(Erythraean Sea)가 있는 바레인 바닷가에서 지중해 동쪽으로 이동하여 키프로스와 레바논 해안에 정착하였습니다. 가나안 북부의 셈 어족에서 출발한 이들은 출중한 항해술을 바탕으로 BC 1500년경부터 BC 300년까지 지중해 해상무역을 주도하였습니다. 이들은 도시별 국가로 연합하여 BC 2613년경 이집트 제4왕조와 교역하였던 기록을 전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조선술로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형 선박을 건조하였으며 이와 같은 대형 운송능력을 바탕으로 목재가 귀한 여러 나라에 이를 공급하였습니다. 페니키아 인들이 만들어 사용하였던 여러 선박 중에서도 그들이 최초로 만들었던 ‘갤리선 (bireme galleys)’은 2단으로 된 노를 가진 배로 당시 가장 빠른 속력을 가진 강력한 전함이었습니다.


훗날 BC 55년경 로마 시대에 카이사르가 영국을 침략할 때 사용하였던 배가 바로 페니키아인들이 만들었던 갤리선이었습니다. 페니키아인들은 나라마다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특수상품을 중개하는 특화된 교역을 통하여 부가가치가 높은 상업에 주력하였던 나라입니다.


이와 같은 뛰어난 상업 왕국의 힘은 결정적인 시기에 국력으로 나타났습니다. BC 1200년경 지중해 연안에 거듭된 가뭄과 홍수로 모든 나라가 경제적으로 공황상태에 이르는 어려움을 맞게 되었습니다. 당시 페니키아 인들은 지중해 상권을 장악한 경제력과 탄탄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이베리아 반도와 지중해 연안의 주요 거점 도시들을 식민도시로 거느리는 세력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페니키아인들은 해상무역의 왕국에 적합하게 국가적 시스템을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로 분산하여 오랫동안 세력을 지속하여 왔습니다. 대표적으로 지중해 연안의 레바논 지역에 비블로스(Byblos)와 시돈(Sidon)그리고 두로(Tire)와 같은 3대 도시를 거점으로 도시별로 상품을 구분하여 취급하였던 것입니다.


나아가 3대 거점 도시를 통하여 도시가 취급하는 상품과 연관된 식민도시를 거느리는 효율적인 체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두로(Tire) 도시는 바위라는 뜻을 가진 섬이었습니다. 페니키아인들이 지중해에서부터 시작하여 에게 해와 아프리카 북부 해안의 도시에 이르기까지 해상무역로를 개척하면서 천연 요새와 같은 섬을 거점으로 삼아 모든 상품을 이곳에 보관하여 각 나라로 보내는 전초기지로 활용하였습니다.


또한, ‘시돈(Sidon)’ 도시는 성경 창세기 6장에서 8장에 이르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로 잘 알려진 노아의 증손자인 시돈의 도시로 페니키아의 가장 신비한 문화와 역사의 도시입니다. 찬란한 예술로 전한 페니키아의 금속공예가 이곳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정황으로 볼 때 경이로운 유리공예 또한 이 도시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당시 페니키아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은과 키프로스(yprus) 에서는 구리와 주석 등을 수입하여 여러 나라에 공급하면서 시돈 도시를 금속무역의 중심지로 삼았던 이유입니다.


이와 함께 페니키아의 가장 대표적인 상품이었던 신비의 보랏빛 염료의 가공이 ‘두로’ 도시와 함께 시돈에서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역사적으로 페니키아의 보랏빛 염료 제작과 염색 기술은 많은 예술품과 함께 경이로운 기록들을 후세에 전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페니키아인들의 보랏빛 염료를 채취하는 과정에서부터 추출방법과 염료제작법에 이르는 상세한 기록을 저서 ‘동물의 역사’를 통하여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이와 같은 연구를 위하여 그리스의 에게 해에 있는 레스보스 섬(Lesbos I)에서 수년간을 해양 생태 연구에 몰두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는 식물학의 창시자인 제자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os)의 고향이 바로 이 섬이었던 이유로 당시 제자와 함께 그곳에 있었다는 기록이 분명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놀라운 연구 과정은 해안에서 바다로 길게 나는 모래톱 지형인 우리가 석호(lagoon)로 표현하는 지형이 당시 레스보스 섬 서쪽에 있는 피라(Pyrrha)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보랏빛 염료의 원료인 복족류(Gastropod) 과인 바다 고둥의 가장 적합한 생태 지로 이를 세세하게 살피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바다 고둥의 분비물에서 채취된 원료가 보랏빛 염료이었던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동물의 역사’는 제목과 달리 해양생물에 관한 연구에 비중도 높은 저서입니다. 저서에서는 동물의 해부학적 관심과 특히 빛깔을 나타내는 동물과 생물에 대한 연구가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를 토대로 훗날 로마제국 시대의 해군 제독이며 자연사학자이었던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 ?~79)가 펴낸 최초의 백과사전(Historia Naturalis)에 보랏빛 염료에 대한 더욱 상세한 기록이 전해진 것입니다.


페니키아인은 이와 같은 신비한 보랏빛 염료의 독점적인 기술을 바탕으로 당시 모든 나라에 보랏빛 고급 천을 공급하였습니다. 그 수요를 맞추기 위하여 대서양 연안 모로코 서부의 오늘날 에사우이라시인 모가도르(Mogador)항구를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섬 일대를 장악하여 극도의 보안 속에서 노예들을 데리고 신비한 보랏빛 염색작업 기지로 활용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비한 빛깔 보랏빛을 구현하는 희소의 가치에서 당시 지중해의 모든 왕은 보랏빛 옷을 입었습니다. 이집트의 왕에 이어 그리스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을 거쳐 로마제국의 황제에 이르기까지 보랏빛 의상을 착용하였습니다. 바다의 생물 뿔고둥(뮤렉스 브란다리스-Murex Brandaris)과 쇠고둥(푸르푸라 하에마스토마-Purpura Haemastoma)이 분비하는 신비의 빛깔 보랏빛을 구현하여 그 시대 최고의 상인으로 자리를 잡았던 페니키아가 역사에서 사라진 이후에도 보랏빛은 오래도록 권위와 위상을 상징하는 절대적인 빛깔이었습니다.


인류의 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보랏빛의 근원 바다 고둥을 찾아 외딴섬에 들어가 수년을 보낸 2300년 전의 이야기가 물결처럼 일렁이는 역사의 바다에 가슴을 적시며 페니키아인들의 남은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현대 도시 비블로스(Byblos)와 옛 유적 / <사진출처= http://www.byblostempe.com

 

파피루스 무역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 비블로스(Byblos)는 두로(Tire) 와 시돈(Sidon)과 더불어 페니키아의 대표적인 3대 도시였습니다, 페니키아의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상업 도시 비블로스는 당시 모든 나라에서 가장 귀중한 물품이었던 이집트산 파피루스(Papyrus) 교역의 중심지로 전문적으로 파피루스를 거래하였던 도시입니다.


중요한 문헌의 기록과 보존이 점토판이거나 석판에 이루어졌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이어오다 이집트 문명에서 BC 3000년경 파피루스의 발명은 오늘날의 유선전화에서 무선전화의 발명과 비교될 수 있을 만큼 획기적인 발명이었습니다. 파피루스는 이집트 나일 강 델타 지역 습지대에 지천으로 널려있던 갈대와 같은 마디가 없는 식물을 재료로 하여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종이의 기원입니다. 이러한 파피루스의 사용은 고대 이집트 왕조 시기에서부터 지중해 전역의 크고 작은 모든 나라에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파피루스를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장 뛰어난 해상운송 능력을 보유한 페니키아 상인들이 독점적으로 거래한 사실은 당연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파피루스의 사용은 송아지와 양과 같은 가축의 가죽을 무두질하여 만든 양피지가 사용된 이후에도 저렴한 가격 때문에 오랫동안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양피지의 발명에 대하여 로마 시대의 해군 제독이며 자연사학자이었던 플리니우스(?~79)가 저술한 최초의 백과사전에 BC 190년경 페르가몬 왕국의 에우메네스 2세에 의하여 양피지가 발명되었다는 기록에 대하여 양피지의 발명에 대한 논란이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현재 베를린 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는 고대 이집트 왕국의 제12 왕조(BC 1990-1777)의 문서에서부터 대영 박물관에 소장품인 이집트 제19 왕조 3대 왕 람세스 2세(BC1303?~BC1213?) 시대의 수학에 관련된 문헌이 양피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양피지의 발명이 누가 어떻게 발명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해오지 않지만 기원전 2000년경에 이미 그 발명이 이루어진 사실에서 아직도 부정확한 기록이 전해지는 내용에 대하여 잠시 살펴봅니다.


페르가몬(Pergamon)이라는 나라는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이 세상을 떠난 후 셀레우코스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조로 분할되면서 에게 해의 오늘날 터키 아나톨리아의 북서쪽 도시국가 페르가몬을 BC 281년 필레타이로스(Philetaerus, BC 343~BC 263)가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아탈리드 왕조를 창시하여 페르가몬 왕국이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이집트 총독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BC 220년 큰 규모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세워 문예 부흥의 상징성을 드러내면서 페르가몬 왕국의 에우메네스 2 세(Eumenes II, BC 220~BC 159)가 뒤를 이어 경쟁적으로 건설한 도서관이 페르가몬 도서관입니다. 이에 방대한 서적의 필사 작업이 요구되면서 파피루스의 수요가 급증하였습니다.


이에 이집트에서 파피루스 수출 금지라는 극단의 조처를 내려 이에 분개한 페르가몬 왕국이 양피지 공장을 만들어 양피지로 격조 높은 서적을 출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고대에서 전해오는 여러 기록과 비슷하지만 두 가지 사실에서 잘못 전해지는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양피지의 발명에 대한 시기에서 현존하는 유물에서도 페르가몬 양피지 사용보다 천년을 앞선 양피지 사용이 확인되는 점입니다.


둘째는 현존하는 기록에 의하면 당시 지중해 지역에 사상 최대의 홍수가 생겨 파피루스의 채취가 거의 불가능하여 수출을 금지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재해로 인한 파피루스의 공급이 어려워 수출금지가 내려지자 페르가몬 왕국이 예로부터 사용되었던 양피지의 제작법을 발전시킨 내용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발명과 발전의 차이는 과장 될 수 없는 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양피지의 대량 생산이 가능하였지만 실제로 양피지의 수요가 대세를 이룬 시기는 이로부터 1000년이 지난 후부터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의 확인은 역사상 가장 많은 문헌이 작성되었으며 보존된 교황청 자료에서 11세기까지 자료들이 대체로 파피루스로 만들어진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 파피루스(左) 양피지(中) 한지(右) <사진출처=https://en.wikipedia.org>

 

종이와 문화


중국의 후한 시대에 채륜(蔡倫, 50?~121?)이 서기 100년경에 발명한 세계 최초의 진정한 종이가 서양에 전해진 시기는 서기 751년 이후입니다. 당시 중국 당나라에 고구려 멸망 이후 중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진 고선지 장군이 있었습니다. 당시 실크로드의 상업권을 두고 이슬람 세력과 대치하던 당나라가 고선지 장군을 앞세워 우즈베키스탄까지 정복하면서 중앙아시아의 세력 확장을 시도하였습니다.


이에 이슬람의 아바스 왕조가 강력한 연합군을 구성하여 오늘날의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경계구역인 탈라스에서 격돌하였습니다. 당시 알타이 산맥 타르바가타 지역의 유목민 세력인 카를룩족(Karluks)이 당나라의 용병으로 전투에 참여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나라를 배신하고 아군을 공격하여 아랍의 사자 고선지 장군이 패전의 아픔을 겪게 됩니다. 이때 포로로 잡혀간 종이 제조공이 제지기술을 전파하여 페르시아에서 유럽으로 전파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이러한 사실도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1455년 서양 최초로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를 시작하였던 시점에 양피지와 종이의 인쇄가 병행되었던 사실에서 서양의 제지기술이 얼마나 열악하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필자가 확인한 기록에 의하면 동양과 페르시아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중국의 비단과 한지가 대량으로 수입되면서 비단에도 그림과 글씨가 쓰이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단은 가격이 너무 고가이었으며 한지는 필기 재료가 달라서 잉크가 닿으면 금방 번져버리는 내용에 정작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의미하듯이 중국의 한지 제조방법을 자신들의 문화에 맞게 실용하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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