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이계홍의 노·변·정·담

“저주와 증오의 언어 남발…국회 도저히 못 봐주겠다”

글/이계홍(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12/05 [09:29]

칼럼니스트 이계홍의 노·변·정·담

“저주와 증오의 언어 남발…국회 도저히 못 봐주겠다”

글/이계홍(칼럼니스트) | 입력 : 2018/12/05 [09:29]

지난 11월23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예산안조정소위원회 회의에서 “니가 뭔데!” “너 몇 년생이야!” 따위의 여야 의원 간 막말과 고성이 오갔다. 이날 원자력안전위원회의 내년도 예산심사 도중 나온 막말들이다. 송언석 자유한국당 의원은 “국민 혈세를 꼼꼼히 챙겨봐야 해서 의구심이 든 부분에 대해 질의하는데 동료 의원 발언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말씀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고 항의했다. 같은 당 장제원 의원 역시 “야당 발언에 인내해 주시는 게 빨리 회의를 진행할 수 있다”고 지원군으로 나섰다. 그러자 민주당 박홍근 의원이 “어제 소위 운영에 대해 합의한 게 있는데 바로 잊어버리고 있다”며 질의 시간을 조절할 것을 요구했다.

 


 

“니가 뭔데” “너 죽을래?” 장제원 나선 곳엔 늘 거친 말싸움
정치가 민생의 공기라면, 나쁜 공기에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지미 카터 대통령 때 남북미 3자대화 추진’ 기사 보며 가슴 먹먹
그때 회담 열렸다면 남북대결 완화되어 박정희 암살 없었을 수도

 

▲ 요즘 국회에서는 사사건건 트집 잡고, 정파적 이해에 매몰돼 추태를 벌인다. 수준 이하의 언어,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억지와 궤변이 난무한다.

 

1. 억지·궤변 난무하는 국회


지난 11월23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예산안조정소위원회 회의에서 여야 의원 간에 막말과 고성이 오갔다. 송언석 자유한국당 의원 항의에 박홍근 민주당 의원이 질의시간 조절을 요구하자, 장제원 의원이 “사사건건 끼어들지 말라”고 책상을 치자, 박홍근 의원은 “약속이잖아. 저는 아침 합의 내용을 확인한 것”이라고 맞받았다. 장제원 의원은 “위원장 말이 법이냐?”고 되받아쳤다.


이를 지켜보던 조응천 민주당 의원이 “위원장이 법이냐고?”라고 되물었고, 장제원 의원이 “니가 뭔데”라고 소리쳤다. 이에 조응천 의원이 “니가? 너 몇 년생이야”라고 응수하며 “‘니가’라고 한 거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장 의원은 “조 의원에게 한 말이 아니니 잘못한 게 없다”고 사과를 거부했다.


경위야 어찌됐든 장제원 의원이 나선 곳에 늘 거친 말싸움이 있었다. 장 의원은 지난 11월5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도 민주당 박완주 의원과 험악한 말을 나누었다.


이날 사태는 질의에 나선 한국당 송언석 의원이 “소득주도성장 경제기조를 그대로 가져가면 경제악화가 우려된다”고 발언했다. 이에 민주당 박영선 의원이 “송 의원이 경제위기를 조장하고 있다”고 지적하자 장제원 의원이 나서서 “저희 당 의원을 콕 찍어서 대한민국 경제위기를 조장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는데, 심각한 명예훼손”이라고 반박했다.


민주당 박홍근 의원은 “송 의원 질의 중 소비지표가 악화된 것이 아니라고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었다”고 반박하자 다시 장 의원이 “교묘하고 야비하게 말한다”고 받았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 박완주 의원이 나서서 “국회의원이라고 앉아 있는 사람이 독해능력이 안 된다”고 비판하자 장의원은 “저런 게 국회의원“이라고 받아쳤다.


서로 비난 수위가 높아지고 급기야 박완주 의원이 “장제원 나와“라고 소리치자 장 의원이 “너 죽을래? 한 주먹감도 안 된다. 나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누리꾼은 이를 두고  “그렇게 주먹들이 강하면 국회 말고 UFC로 가라”고 비아냥댔다.


지난 3월 장제원 의원이 경찰이 비리 혐의로 자유한국당 소속 김기현 울산시장 측근과 울산시청을 압수수색하자 “정권의 사냥개가 광견병까지 걸려 정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닥치는대로 물어뜯기 시작했다. 정권과 유착하여 20세기 권위주의 정권의 서슬 퍼런 공안정국을 만들고 있다.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다“라고 발언했다.


민주당 의원들도 정제되지 않은 언어가 문제지만 꼭 장제원 의원이 끼어들면 싸움이 붙고, 막말이 터져나온다. 중고생들이 뒷골목에서 싸우는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너 몇 년생이냐”는 말도 시쳇말이라고는 하지만 국회에서 사용할 언어는 아니다. 나이로 서열 만들려는 것은 공적인 의정에서 어울리지 않는 어법이다. 꼰대의식에 젖은 언어라는 점에서 그렇다. 논리로 말한 다음, 군번을 따져도 늦지 않다.


국회가 절간처럼 고요적막하기를 바라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시끄럽고, 격론을 벌여야 한다. 갈등을 조절하고 합의에 도달하려면 격한 토론도 마다해선 안 된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국민을 위해, 공공의 이익과 나라의 미래를 위해 밤늦게까지 국회 불을 밝히고 토론을 벌여야 한다. 사회적 갈등을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로 가져와 토론 끝에 최선을 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국회는 어떤가. 국회의원 자신의 이익과 자파 이익을 위해, 그리고 상대방을 망가뜨리기 위해 온갖 음해와 저주와 증오의 언어를 남발해오지 않았나. 사사건건 트집 잡고, 정파적 이해에 매몰돼 추태를 벌인다. 수준 이하의 언어,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억지와 궤변이 난무한다. 가장 사회적 비용이 많이 지출되는 곳이 국회라는 말을 듣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국회는 국민이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누구를 탓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을 뽑았으니 수준 낮은 국회를 마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꼭 유권자만을 탓할 수 없다. 선거법이 그런 사람을 뽑도록 제도화되었기 때문이다. 구조적인 문제다.


능력과 실력, 나라를 사랑하는 젊은 지도자들이나 양심적인 인물이 제도 정치권에 들어갈 수 없는 구조. 대신 지방 토호들이나 기득권 지배세력이 쉽게 정치에 진입할 수 있는 틀이 짜여져 있다. 돈 있고, 지역에 기반을 가진 사람이 정치무대에서 활동하기 좋은 환경이다.


여기에 특정지역에 공천을 받으면 무조건 당선되는 지역정치 현실이 있다. 실력 없고, ‘망나니’ 짓을 해도 자연스럽게 의원으로 배출되는 환경이다. 지역에 쓸 만한 사람을 공천하면 되지 않느냐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목소리 크고, 돈 가지고 떵떵거리는 사람(이들은 줄을 댈 수 있는 힘을 가졌다)이 쉽게 공천장을 받는 풍토라는 것을 모르고 한 말이다. 양심적인 사람이나 정치 신인의 접근이 애당초 차단돼 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기득권의 벽을 견고하게 치고 있는 현 정치제도 아래서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선량을 국회로 보낼 수 있는가. 우선 국민의 정치의식부터 깨어나야 한다. 그것밖에는 정치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 없다.
다음으로 시민사회단체가 대오단결해서 선거법 개정, 국회법 개정에 대대적인 압박을 가해야 한다. 국회가 국민의 편에 서서, 양심의 편에 서서 정치제도를 바꾸지는 않는다. 피터지게 싸우다가도 그들의 기득권을 위해서는 여야가 똘똘 뭉치는 현실 아닌가. 따라서 시민사회가 대대적인 정치제도 개혁운동을 펼쳐야 한다. 정치가 우리 민생의 공기라면, 나쁜 공기에서 계속 살 수는 없지 않은가.

 

2. 40년 전 남북미 대화


‘40년 전에도 남북미 3자대화 추진했다…자카르타 극비회담 타진'이라는 제목의 <연합뉴스> 기사를 보고 왠지 가슴이 먹먹했다. 만약 그때 미국이 주선한 남북미 3자회담이 열렸다면 남북의 대결은 완화되고, 평화가 담보된 가운데 한반도 발전 모델이 새롭게 창출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컸다. 더 나아가 그 4개월 후 박정희 대통령의 비극적인 암살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도 생겨서 안타까움이 더해진다.


보다시피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은 평화를 최우선시 하는 보기 드문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래서 그의 남북미 평화회담도 제안되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핵 개발을 공공연히 진행해와 미국은 골치를 앓았던 때이고, 이를 막기 위해서도 남북 대결을 종식시킬 획기적인 대안을 마련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40년 전 비화를 전한 <연합뉴스>를 좀더 인용해보자.


『미국이 지미 카터 행정부 시절인 1979년 한반도 긴장 완화를 목적으로 남북미 3자 회담을 극비리에 추진했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특히 3자 고위급 회담 장소로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를 정하고 남북한의 의사를 타진하는 등 미국이 남북미 대화를 위해 상당히 구체적 수준의 실행 계획을 세워 추진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사실은 <연합뉴스>가 11월25일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 제임스 퍼슨 연구원으로부터 입수한 미국 외교 기밀문서를 통해 확인됐다. 기밀문서에 따르면 카터 대통령은 1979년 6월 말 방한해 박정희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가졌던 시기를 전후해 자카르타에서 남북미 3자 고위급 회담을 갖는 방안을 극비리에 추진했다.


카터 대통령은 이 같은 남북미 3자대화를 1977년 취임 첫해부터 비밀리에 추진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기밀문서에 따르면 카터 대통령의 외교 책사였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은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메모에서 카터 대통령이 남북미 3자 대화를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1977년 8월5일 ‘남북 간의 대화’라는 주제로 작성된 이 메모에서 브레진스키 보좌관은 “대통령은 북한·남한·미국 간 3자 대화 가능성에 관한 당신의 보고서를 읽었으며, 단계대로 실행해 나가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브레진스키 보좌관은 그러면서 “우리는 유엔사령부 문제, 기타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한 상호 관심사를 논의하기 위한 남북미 3자 논의를 준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략>


그러나 카터 행정부의 이 같은 비밀 남북미 3자 대화 추진은 북한 측이 호응하지 않으면서 불발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이 <연합뉴스>의 주요 보도내용이다. 이 가운데 북한측이 호응하지 않은 것은 그들 입장에서 남북 간 극도의 대치국면과 박 대통령의 핵 개발 의혹 등 불신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에 앞서 1971년 닉슨 미국 대통령 시절, 미·중 국교수립과 때를 같이해 남북 적십자회담과 7·4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금방 통일이 달성될 것처럼 국민은 들떠 있었는데 곧바로 유신체제가 들어섰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윤보선 후보로부터 빨갱이라는 색깔론에 휘말렸다. 당시 <동아일보>는 대통령 선거를 이틀 앞둔 1963년 10월13일 이례적으로 ‘호외’를 발행해 ‘민정당(당시 윤보선의 정당, 전두환의 정당이 아님=필자 주) 여·순사건 자료를 공개’, ‘당시의 두 신문 보도 제시’라는 통단 제목에 ‘49년 2월13일 군법회의서 박정희씨에게 무기 언도, 심판관은 김완용 중령 등 7명’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기사에서 “민정당은 13일 상오 박정희 후보가 ‘여순반란사건 이래 진행된 숙군 당시 1949년 2월13일 군법회의에서 김학림, 조병건, 배명종 등과 같이 무기징역형을 언도(사형 구형=필자주)받았다’는 요지의 1949년 2월17일 <경향신문> 기사와 ‘서울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관 김완룡 중령 이하 6명, 검찰관 이지형 중령 이하 1명이 참석한 가운데 심리한 결과 박정희씨는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는 요지의 1949년 2월18일자 <서울신문> 기사를 증거물로 발표했다”는 내용을 실었다.


그로 인해 박정희 후보는 “매카시즘 광풍을 걷어내라”고 반박했는데, 그가 후일 이런 매카시 광풍으로 국민을 탄압한 것은 아이러니다.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전 중앙정보부 창설자 김종필의 장인)는 1946년 대구 10·1 항거 때 경찰 총에 맞아 숨졌다. 박상희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구미지국장을 지내면서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던 사회주의자였다. 당시 항일투쟁의 이론적 근거는 일본 군국주의를 반대하는 사회주의나 민족주의에서 찾았기 때문에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과 항일운동자들은 이 사상에 경도되어 있던 시기였다.


가장 존경했다는 형이 우익의 행동대 경찰 총에 맞아 숨졌다는 것이 박정희로서는 좌익성향을 지닐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사회주의의 중심지역이었고, 빨치산의 원조격인 ‘야산대‘가 경상도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맹활약했다. 이때 박정희는 형의 친구 이재복 남로당 군사부총책의 권유로 남로당 군책 중의 1인이 된 혐의로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이런 박정희의 이력을 수구세력일수록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아도 지워버리려 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를 지운다고 해서 지워질 수 없다. 공권력을 동원해 기록들을 지우려고 해도 어딘가 기록은 남아 있다. 기록은 선명한 화인이 되는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북 화해와 협력, 대결보다 대화로 나갔더라면 그의 암살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시끄러운 국내 정쟁도 어느 정도 잠재웠을 것이다. 평화가 담보되었다면 우리 국민도 그만큼 고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고두고 카터 대통령 시절 한미 간, 그리고 남북 간 대립각을 세웠던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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