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건’,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

여전히 역대 최악으로 남은 ‘유영철 사건’ 재조명

문병곤 기자 | 기사입력 2018/08/22 [01:36]

‘그때 그 사건’,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

여전히 역대 최악으로 남은 ‘유영철 사건’ 재조명

문병곤 기자 | 입력 : 2018/08/22 [01:36]

잔혹한 살해방식으로 늘 논란거리로 회자되는 연쇄살인마 유영철. 그는 20명을 살해하고 사형판결을 받았지만, 아직도 교도소에서 미결수로 살고 있다. 유영철은 엽기적인 범죄를 저지르며 사이코패스 성향의 연쇄살인마 모습을 대표하는 인물이 됐다. 반면, 경찰은 유영철을 잡고도 놓치는 등 허술한 수사와 대처방식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여전히 최악의 연쇄살인 사건으로 기록되는 유영철 사건을 재조명해본다. <편집자 주>


 

넉넉지 못한 살림,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며 성장

잡범이었던 유영철, 수감생활 후 연쇄살인마로 돌변

 

경찰, 연쇄살인 도중에 붙잡아…구속하지 못하고 풀어줘

사형받지 못하고 미결수로 생활, 교도소 문제아로 전락

 

▲ 유영철은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미결수로 교도소 생활을 하고 있다.    <사진=KBS 뉴스 캡처>

 

[사건의내막=임대현 기자] 유영철은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단일 연쇄살인마로 알려져 있다. 단순 희생자 숫자로 치면 총기난사범인 우범곤 같은 인물보다는 적다. 하지만 그는 엽기적인 살인 방법으로 유명세를 더했고, 그의 범행방법은 영화의 모티브로도 활용됐다.

 

유영철은 지난 20039월부터 20047월까지 20명을 연쇄살인한 범죄자이다. 그는 연쇄살인 이전에도 수많은 범죄를 저질러왔다.

 

유영철의 엽기적인 범죄 행각으로 인해 사이코패스의 개념이 널리 알려졌다. 그는 사이코패스 판정 테스트인 PCL-R 검사에서 40점 만점에 34점을 맞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검사는 대중들에게 잘못 알려진 것처럼 만능 테스트는 아니다. 이후에도 유영철은 여러 범죄심리학 관련 연구에서 표본 대상이 되기도 했다.

 

순탄치 않던 일생

1970418일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태어났다. 형제로는 형 2명과 여동생이 있는데, 여동생은 이란성 쌍둥이라고 한다. 그의 부모는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서 부부간의 갈등으로 싸우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유영철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폭력과 외도가 심했다고 한다. 유영철은 6살 때부터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계모와 형제들 슬하에서 자랐다. 유영철의 아버지와 계모는 밤만 되면 유영철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그 뒤 거주지를 옮겨 어머니와 같이 살게 돼 입학을 다시 하게 된다.

 

결국 초등학교를 두 번 입학한 셈이 되며, 9살에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을 서울 공덕동 일대에서 보냈다. 하지만 중학교 1학년 무렵 유영철 아버지가 죽고, 유영철과 형제들은 생모와 합쳤다. 유영철의 어머니가 아이들을 돌보는 보모로 살림을 꾸렸다. 유영철은 계모 밑에 살던 시절보다 행색이 훨씬 나아졌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그 전보다 생활이 나아졌는지 보통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성장했다. 하지만 미술특기생을 꿈꾸던 유영철은 모 예고에 낙방하자 크게 좌절했고, 그 뒤로는 국제공고에 입학했지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자퇴하였다.

 

쌍둥이 여동생은 고등학교 시절 3년 내내 전교 10위권 안에 드는 학생이었고, 학교 졸업 후 대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다. 동네 주민들은 유영철은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질 정도로 공부를 못했고, 동생은 공부를 너무 잘했다어떻게 쌍둥이 남매가 이렇게 정반대의 인생을 사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러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유영철은 그 후부터 방황의 길을 걷게 됐다.

 

본격적인 살인행각은 지난 2003911일 전주교도소를 출소한 이후다. 유영철은 출소 13일 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명예교수 부부를 살해했다. 이 사건 이후 20047월까지 서울 각지에서 주로 부유층 노인 또는 출장마사지사 여성 등 총 20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

 

살인 행각에 빠지기 이전에는 각종 절도나 금품 갈취를 했었는데, 그중 한 사건은 위조한 경찰수첩으로 경찰을 사칭해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퇴폐업종의 사람들로부터 금전을 뜯기도 했다.

 

살인을 본격적으로 저지르기 전에 이러한 각종 절도 전과로 구속된 적이 있었다. 당시 유영철은 한 목사와의 인연으로 십자가를 지니고 있을 정도로 종교에 귀의하려 했으나, 결국 징역 10개월 선고를 받았다. 이 당시 유영철은 신도 있는 놈 편이라고 생각하며 반종교적으로 돌변했다.

 

이는 유영철의 연쇄살인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그의 전반부인 일련의 부유층 살해사건에서 상당수의 피해자가 교회 인근에 거주했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주로 출장마사지사 여성을 노리면서 살해방법이 변모한다.

 

유영철 사건일지

유영철은 2003924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S여대 명예교수 이모(72)씨와 부인 이모(67)씨를 둔기로 살해한다. 그는 금품을 갈취하거나 외부침입 흔적을 없애고 달아난다. 현장은 아들 부부가 발견했다.

 

노부부는 머리가 깨어진 채 잠옷 바람으로 엎어져 있었고, 이불과 방바닥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112신고를 받고 출동한 강남 경찰서 형사들은 출입문이 잠겨 있고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없으며, 뒤진 흔적은 있으나 거액의 현금과 귀금속들이 그대로 있는 걸 보고는 면식범에 의한 원한 관계나 가족 갈등에 의한 살인으로 보고 피해자 주변을 중심으로 수사에 착수했다.

 

서울 경찰청 과학수사 요원들의 현장 감식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결과 남편인 이씨는 머리에 둔기로 5차례 공격을 받고 두개골 골절 및 뇌손상을 심하게 입은 것이 사인이었고, 목과 팔에도 칼에 찔린 상처와 골절상이 발견되어 방어와 저항을 한 흔적이 역력했다.

 

아내인 이씨는 같은 둔기로 머리에만 3번의 공격을 받았는데, 정수리 부근에 집중됐다. 다른 부위에는 공격받은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전혀 저항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방적인 공격을 받고 사망한 것으로 판단됐다. 두 사람 모두 유영철과는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다.

 

같은 해 109, 종로구 구기동에서 주차관리원 고모(60)씨의 집에 침입해 고씨의 아내(58) 어머니 강모(82)씨와 고씨의 아들(35)을 둔기로 34회를 강타해 살해했다. 고씨는 새벽부터 출근해 하루 종일 일을 하던 상황이라, 저녁에 집에 들어와서야 처참한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아내는 거실에 쓰러져있었고, 지체장애를 앓던 아들은 2층 방문 앞에 노모는 현관 앞에 쓰러져있었다. 역시나 첫 범행과 같이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없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현장을 보고 역시 면식범의 소행으로 판단한다.

 

당시 언론에서는 신사동 사건과 한데 묶어 이를 부유층 노인 연쇄살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에서는 강남경찰서와 서대문경찰서에 각기 차려진 수사본부가 꾸려졌다. 이들은 인근 지역 불량배, 강절도 전과자와 정신질환자를 대상으로 탐문 수사를 전개해나갔다.

 

여전히 경찰은 단서도 못 잡고 있던 그해 1016, 강남구 삼성동 2층 단독주택에 침입해 최모(70)씨의 부인 유모(69)씨를 둔기로 살해했다. 지병치료를 위해 장인을 모시고 병원에 가려던 사위 최씨가 사건 현장을 발견했다. 그의 장모였던 유씨는 최초 발견 당시 의식은 있는 상태였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병원 응급실에서 사망했다.

 

이 사건 역시 유영철은 침입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나, 경찰은 집 뒤쪽 담장 안과 밖에서 다량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경찰은 구기동 사건족적과 비교해 일치한다는 점을 발견하고 동일범으로 추정했다.

 

당시 언론 보도는 연쇄살인임을 기정사실로 하기 시작했고, 경찰이 범인의 윤곽조차 잡지 못한 채 엉뚱하게 피해자 가족과 주변인물을 수사 대상으로 삼아 괴롭힌다고 맹렬히 비난하기 시작했다. 여론의 압박으로 경찰은 검문검색을 강화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유영철은 경찰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다음 달이었던 1118일 연쇄살인을 이어간다. 그는 이날 종로구 혜화동의 2층 단독주택에 침입해 집주인 김모(87)씨와 파출부 배모(53)씨를 둔기로 살해했다. 지난 사건에서 족적을 남긴 것을 만회하려는 듯 유영철은 증거 인멸을 위해 금고에 불을 지른다. 당시 현장에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김씨의 증손자가 이불에 둘러싸여 질식 전까지 갔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현장을 관찰한 동대문 경찰서 형사들 중 일부는 사체에 불을 지르고 지하실에 있던 곡괭이와 골프채 등을 가져다 금고를 부수려 한 흔적 등이 신사동, 구기동, 삼성동 사건과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발견하고 이번 사건은 연쇄살인에 해당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현장을 감식한 현장요원들과 사체를 부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관들은 둔기에 의한 두부 및 안면부 다발성 손상과 두개골 함몰 및 뇌손상 등 공격 방법과 흉기가 동일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거실과 복도에서 발견된 발자국 역시 신사동을 제외한 이전 두 사건과 일치했다.

 

피해자 집 주변을 수색하던 경찰은 인근 건물 입구에 CCTV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녹화된 테이프를 제출받아 분석에 들어갔다. 다행히 녹화된 CCTV에는 범행을 마치고 피해자의 집 옷장에 걸려있던 점퍼를 걸쳐 입은 유영철이 보였다. 뒷모습이라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경찰은 이 영상으로 범인의 키가 168cm라는 것과 2~30대 후반의 남자, 그리고 족적 검색에서 찾은 K제화 B캐주얼화를 신고 다니는 것을 확인했다.

 

▲ 영화 추격자는 유영철을 잡은 사람이 성매매 업주라는 점을 착안해 제작했다.     <사진=영화 추격자 캡처>

 

경찰은 곧 수배령을 내렸다. CCTV의 인상착의를 토대로 신원미상의 남자를 찾는 수배전단도 만들었다. 수사망이 좁혀져 오자 유영철은 살인행각을 잠시 멈춘다.

 

해를 넘긴 20043, 유영철은 살인방법에 변화를 준다. 그는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마사지 도우미 김모(25)씨를 살해한다. 이전에 주택가의 노인을 상대로 했던 범죄 방식에 변화를 준 것이다.

 

사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 유영철은 절도혐의로 경찰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경찰은 구속하지 못한 채 그를 풀어줬고, 이후 12건의 연쇄살인이 일어났다. 당시 경찰은 연쇄살인을 막을 수 있었던 것과 관련해 비난을 받아야 했다.

 

유영철은 2004121일 서울 신촌의 한 찜질방에서 손님의 옷장 열쇠를 훔쳐 현금 4만원과 5만원짜리 상품권 등 10만원 상당의 금품을 훔친 혐의로 체포됐다. 그가 체포된 1월은 혜화동 사건까지 8명의 부유층 노인을 살해한 뒤 전화방 여성과 교제하던 때이다.

 

유영철은 120일 밤 30대 여성과 찜질방을 찾았다가 다음날 오전 730분쯤 자고 있던 손님의 열쇠를 훔쳐 옷장에 있던 지갑에서 뭔가를 꺼내다가 종업원의 신고로 오전 930분쯤 경찰에 넘겨졌다. 유영철은 혐의를 극구 부인했으나 경찰은 목격자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해 절도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하지만 혐의를 입증시키지 못했고, 범행금액도 적어 쉽게 풀려날 수 있었다.

 

남성을 살해한 사건도 일으켰는데, 유영철은 같은 해 414일 서울 중구 황학동의 도깨비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던 안모(44)씨를 자신의 승합차로 유인해 살해했다. 그는 시신과 함께 승합차를 월미도에 유기하며 차에 불을 질렀다.

 

차 안에서 타던 시체는 양손목이 절단되어 없는 상태였고, 온몸에 20여 군대 칼에 찔린 상처가 발견됐다. 국과수의 부검 결과 머리에서 커다란 둔기로 얻어맞은 상처도 발견됐다. 이를 통해 유영철이 벌인 일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었다.

 

유영철은 20044월부터 7월까지 마포구 노고산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전화방도우미, 마사지도우미 등 여성 11명을 살해했다. 대부분의 사건이 출장업소에 전화를 걸어 여자를 불러내는 방식이었다.

 

당시 경찰은 성매매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실종사건이라 치부했다. 이 때문에 적극적으로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는 나중에 비난의 화살이 돼 돌아왔다. 이 사건을 두고 경찰이 수사에 적극적이었다면 더 빨리 유영철을 잡을 수 있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업주과 공조해 체포

2004712일 밤 11시경, 서울 관악구에 사무실을 둔 출장 마사지 업체에 30대 남자 목소리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표시 장치에 남겨진 번호는 휴대전화, 신촌 로터리에서 만나자는 호출이었다. 전화를 걸었던 남성이 바로 유영철이었다.

 

이 전화를 받고 나간 임모(27)씨는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에 업소로 전화를 걸어 다급하게 비명 같은 한마디를 남겼다. “나 지금 납치되고 있어요.” 전화를 받았던 동료가 다시 통화를 시도해봤지만 이미 휴대폰은 꺼져있었다. 이후 임씨는 연락도 두절되고 업소로 돌아오지도 않았다.

 

비록 출장 마사지업에 종사했지만 누구보다 성실하고 고향 가족에게 꼬박꼬박 돈을 보내는 보람으로 살아가던 임씨였기에 장난이나 허위 전화는 아니라는 것이 업소 사람들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이에 출장마사지 업주는 특정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나간 여인들이 돌아오지 않자, 다른 업주들과 힘을 모아 범인을 잡자고 모의한다.

 

유영철은 꼬리가 밟힐 걸 우려해 한번 걸었던 업소 전화번호로는 다시 여자를 부르지 않았지만, 그 각기 다른 전화번호들이 최종적으론 한 업소가 사용한다는 것을 잘 몰랐다. 같은 번호로 전화가 오자, 업주는 경찰을 불러 여성과 함께 장소로 나간다.

 

유영철은 결국 2004718일 체포됐다. 그는 현장 검증에서 26명을 살해하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26명을 살해했다는 주장은 추후에 유영철 본인이 이를 부인하고 정황도 맞지 않아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수사 담당자가 밝히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살해한 희생자는 20명으로 확인이 됐다. 이후 813일 구속기소 돼 20명에 대한 살인죄의 유죄가 인정됐다.

 

문제의 미결수로 남아

유영철은 지난 200569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고 현재도 구치소에서 복역 중이다. 그에 대한 사형은 아직까지도 집행되지 않아 사형 미결수로 분류돼 있지만, 20071월경 법무부에서 유영철에 대한 사형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노무현 정권 때였던 청와대의 강력한 반대에 막혀 무산된 바 있다.

 

문제는 유영철의 교도소 수감생활이다. 그는 수감 후에도 문제를 많이 일으켜 물의를 빚었다. 사건에 대한 반성이나 사죄는 없고, 교도소 안에서도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특히, 그가 감옥에 처음 들어갔을 때 조폭과 경제사범을 한 명씩 더 죽이겠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알려졌다. 교도관에게 불성실하게 대하는 등 행실 역시 나빴다. 그는 자주 독방에 가둬지는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지난 2014년에는 교도관을 통해 성인 화보와 일본 만화, 성인 소설 등을 받아봐 온 것이 알려졌다. KBS 보도에 따르면 해당 물품은 구치소 내 반입이 엄격히 금지된 것들이다. 당시 유영철은 한 물품구매대행업체에 편지와 돈을 부치고 특정 교도관 앞으로 물품을 받아봤다.

 

이에 대해 해당 교도관은 유영철 대신 두 번쯤 책을 받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합법적인 물품만 전달했으며 반입이 금지된 노골적 성인물 등은 사전에 걸러냈다고 해명했다. 사형 미결수인 그는 사실상 교도소 내에 골칫거리로 전락한 모습이다.

 

한편, 지난 20082월 유영철을 모티브로 한 영화 <추격자>가 개봉했다. 당시 영화는 5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을 기록했다. <추격자>에 출연한 두 주연배우 하정우와 김윤식은 이 영화를 통해 유명세를 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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